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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은 어린다.
이 시는 가을 단풍잎이 떨어지는 가을날에 사랑하는 순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날 여기저기서 단풍잎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에 필 잎눈을 이 마련되어 있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는 ‘슬픈 가을에 여기저기서 단풍잎이 뚝뚝 떨어진다’는
제목 <소년>에서 ‘소년’은 순수함을 간직한 존재이고 미래를 책임질 존재이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있다.’는 부분도 문장이 합치고 상징을 사용하여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는 화자가 하늘에 몰입한 상태를 말하고 있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는 눈섶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로 슬픔이 확산되어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에서 ‘다시’ 보는 행위는 ‘파란 물감’의 근원을 탐구하는 행동이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이 어린다.’는
‘사랑처럼 슬픈얼골’에서 ‘처럼’은 ‘거의 비슷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은 어린다.’는
이 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순이를 잃어버린 역사로 볼 수 있다.
가을이 되어 단풍잎이 여기저기서 뚝뚝 떨어진다. 나무와 잎이 헤어지는 것을 보니 슬픈 가을이다.
앞의 해석과는 다르게 해석한 부분은 ‘하늘’을 관습적 상징인 ‘희망, 꿈, 이상’으로 풀었고, ‘강물’을 ‘역사의 흐름’으로,
필자는 윤동주가 표현하고자 한 이 시의 진정한 의미는 소년이 잃어버려 슬픈 역사를 사랑하고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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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 윤 동 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참고 부끄러움의 미학 실상 윤동주의 시에는 많은 부끄러움의 증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대부분 '욕됨/미움/괴로움'등의 정감과 공유적 정서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끄러움의 결벽증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반성,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기 혐오와 연민의 순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에서 보여 주는 '미움/가엾음/그리움'의 변증법적 자기 인식과 사랑은 윤동주의 순결벽이 빚어낸, 청순한 젊음의 고뇌와 생래적 부끄러움의 변용적 실체인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는 실향 의식과 상실감에서 모티브가 비롯되며, 존재론적 자기 인식과 정서에서의 변증법적 고뇌가 순결벽과 충돌하는 데서 부끄러움이라는 시적 정서의 실체를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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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소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윤동주, 「소년」
단풍잎이 진다. 가을이다. 시인은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을 노래한다. 단풍이 뚝뚝 떨어지는 건 자연(自然)이다. 자연은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그저 시간을 따라 흐른다. 가을이 오면 단풍잎은 떨어진다. 단풍잎이 떨어져야 겨울이 온다. 단풍잎이 떨어지지 않는 가을도 있을까? “슬픈 가을”은 그러므로 시인이 자기 마음속에서 펼쳐낸 가을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보는 가을이 있다. ‘소년’이라는 시 제목을 보면, 시인은 지금 소년이 지닌 감수성으로 세상을 본다. 소년은 뚝뚝 떨어지는 단풍잎에서 슬픔을 느낀다. 가을이면 단풍잎은 당연히 떨어지는 거라고 소년에게 말할 수 있을까?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라는 진술에 나타나듯, 소년이 된 시인은 가을이 가고, 겨울까지 가면 봄이 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안다. 나뭇가지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 있다. 가을 하늘이다. 봄은 저 멀리에 있고, 지금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소년은 하늘을 들여다본다.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나는 것 같아 소년은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본다.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소년은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파란 하늘이 손바닥에 들어온다. 손금이 보인다. 살짝 파인 손금 사이로 맑은 강물이 흐른다. 파란 하늘은 어느새 강물이 되어 손금을 넘어 손바닥으로 흐르고, 손바닥을 넘어 어깨로 얼굴로 흐른다. 온통 맑은 강물이 된 소년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시인은 “사랑처럼 슬픈 얼굴”을 이야기한다. 소년은 파란 강물 속에서 슬픈 얼굴 하나를 떠올린다. “사랑처럼”이라는 시구가 붙은 걸 보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인가 보다. 소년의 마음에 새겨진 슬픈 얼굴이라? 어린 시절에 겪은 추억만큼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게 있을까? 파란 강물에 빠진 소년은 마음속을 떠다니는 얼굴 하나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상태이다.
시인은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을 불러낸다. 기억은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시인이 기억하는 순이는 어느 한 순간에 고정된 이미지로 떠오른다. 시간이 사라진 공간에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사라진 그 시점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순이는 시인이 소년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른을 고집하면 시인은 순이를 만날 수 없다. 시인은 순이를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순이는 밀려나와 시인을 소년 시절로 이끌고 간다. 파란 하늘을 들여다보는 소년은 어느덧 맑은 강물이 되어 순이를 만난다. 아름다운 순이는 하늘이고 강물이고, 또 다른 무엇이다. 소년이 된 시인이 상상하는 세계에 순이는 있다. 순이는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상상이 미치는 자리마다 아름다운 순이가 깃든다. 시인이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어김없이 순이가 존재한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는 진술로 시인은 소년의 마음을 표현한다. 소년은 왜 눈을 감은 것일까? 파란 강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다. 마음속 곳곳에 자리한 순이를 불러내기 위해 소년은 눈을 감고 제 마음에 집중한다. “황홀히”라는 시어가 암시하는바, 시인=소년은 바다처럼 드넓은 마음속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던 순이와 만난다. 소년 화자가 되어 갈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소년은 순이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 펼쳐진 수많은 경계들을 허문다. 파란 하늘을 보면 소년은 파랗게 물들고, 맑은 강물을 보면 소년은 맑게 물든다. 하늘을 보면 하늘이 되고 강물을 보면 강물이 된다. 순이를 보면 소년은 어떻게 될까? 순이는 소년의 마음속에서 자란 또 다른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소년이 됨으로써 자기 마음 깊숙이 숨은 ‘순이’를 시 세계로 길어올린다.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로 시인은 자신이 가고 싶은 어떤 세계를 표현한다. 그곳에는 파란 하늘이 있고, 맑은 강물이 있다. 「우물」에 나오는 우물 속 세계와 유사한 이곳에서 시인은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온갖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아와 만나려고 한다. 새로운 자아는 아름다운 순이를 상상하는 소년으로 이어진다. 소년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일상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의 모습이 소년 화자에게는 그대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순이는 이리 보면 바람에 이는 잎새일 수도 있다. 타자들이 내보이는 아주 작은 상처에도 온몸을 떨며 우는 이 마음이 바로 시심(詩心)이 아닐까? 시인은 아름다운 순이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소년이 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려고 한 윤동주 시인의 품격은 어찌 보면 이런 소년 이미지에서 뻗어 나오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한없이 맑다. 마음속에 그 소년을 품은 시인 또한 한없이 맑다.
순수한 사랑을 꿈꾸다
이 시를 읽으면 윤동주가 얼마나 해맑은 감성을 지닌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저항 시인이라는
선입견에 가려 보지 못했던 윤동주의 온화한 내면과 유연한 감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맑은 마음과 순정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어두운 현실에
그토록 괴로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했음을,
그리고 결국 시대의 질곡 속에서 죽음의 길로 떠날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순수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순결한 자아의 존재가 지속될 수
있겠는가.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다.
제목인 "소년"은 순정한 마음을 지닌 화자의 나이를 가르킨다.
마치 이런 순정한 마음은 소년 시절에만 유지된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의 삶을 타락한 세계에 점점 길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소년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가을날 자기가 좋아하는 순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호소한다.
가을의 계절감은 소년의 사랑의 감정을 영롱하게 채색해 준다.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단풍잎같은 슬픈 가을이 떨어진다'고 표현한 데는
소년의 사춘기적 애상의 감정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풍부한 정감도 반영되어 있다.
단풍잎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시간은 흐르고 이 아름다운 가을도 아쉬움만 남긴체
지나가고 말 것이라는 허전한 심사가 이 시행에 응결되어 있다.
단풍잎 떨어진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았다고 한 것은 연희 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청년 윤동주의 긍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이것은 소년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단풍잎이 떨어진 자리에 봄이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뭇 가지위에 파란 하늘이 펼쳐저 있다.
윤동주는 이렇게 섬세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있다.
소년의 천진한 생각은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붉은 단풍잎과 푸른 하늘의 시각적 대조를 넘어 이룩되는 푸른 물감의 환상이다.
가을 하늘이 너무도 파랗기 때문에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나고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 난다고 했다.
여기서 시인은 '따뜻한 볼'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서도 청년 윤동주의 온화한 심성이 드러난다.
눈썹과 두볼, 손바닥 까지 파랗게 물들자 이제 손바닥에는 맑은 강물이 흐른다.
이 상상력의 변화 과정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볼 만 하다.
푸른 하늘이 푸른 눈썹으로, 푸른 눈썹이 다시 푸른 손바닥으로,
그것이 다시 푸른 강물로 바뀌는 전환의 심상은 그 이전에 우리 시사에서 접한바가 없다.
이렇게 신선한 시적 감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학습이나 수련해서 온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맑은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리라.
윤동주의 상상의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손바닥에 떠오른 푸른 강물의 심상은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로 전환된다.
'사랑처럼 슬픈 얼굴'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절묘한가.
진정한 사랑은 슬플 수 밖에 없는 것, 사랑은 그안에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임을 스물두 살의 청년 시인 윤동주는 이미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무능하고 무력한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당신을 재대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떠오를때 정직한 사람은 슬퍼진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고 했다.
혹시 황홀히 눈을 감아본 기억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주체할 길 없는 격정에 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던 기억.
윤동주는 순정한 감성으로 이러한 체험을 상상 적으로 구성하여 시로 표현 하였다.
이 구절을 쓴 윤동주야 말로 진정한 사랑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 했을리 없다. 거짓된 시대에 어떻게 참된 사랑이 실현되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화자는 "사랑처럼 스픈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계속
강물에 비친다고 했다. 이것 자체가 시대의 모순이며 시인 자신의 내면의 모순이었다.
윤동주는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는 시대에 수수한 사랑을 꿈꾼 것인데
그의식 자체에 이미 비극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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