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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다시 알아보기
2018년 10월 10일 01시 44분  조회:4115  추천:0  작성자: 죽림
 

파일:나무위키+유도.png  

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파일:건국훈장독립장약장.jpg

 

 

 

 

파일:hZxy6aN.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Yun_Dong-joo_01.jpg

 

파일:external/md1945.com/d03567d60948b64ceb1f876a414128e7_1376442252.47.jpg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우(親友) 정병욱(1922-1982)과 함께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파평 윤씨.

파일:IQVPXX7.png

윤동주(尹東柱)

파일:500px-Emblem_of_the_Provisional_Government_of_the_Republic_of_Korea.svg.png 시인작가독립운동가

아명

윤해환(尹海煥)

출생

1917년 12월 30일

사망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출신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북간도 명동촌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 시)

사망지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형무소

학력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중퇴
도시샤대학 문학부 제적

가족

윤영석(父), 김용(母)

종교

개신교 (장로회)

 

1. 소개2. 생애
2.1. 사망과 의혹
3. 사조4. 성격과 일화5. 작품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6. 중국의 자국 시인화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6.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
7. 기타8. 참고 항목

 

1. 소개[편집]

동주야.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예수보다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1987년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


한국인의 영원한 시인(詩人)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한 일제강점기의 저항(항일)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윤동주가 사망한 지 6달이 지나서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윤동주의 막내 동생은 윤광주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지내다 1965년에 사망한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고작 김일성 회고록에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 정도로 매우 간단하게 쓰여진 게 전부이며 한국 학생들처럼 그의 시를 공부하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연구가 정체되어 있는 북한 국문학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2017년 12월 30일,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2. 생애[편집]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기독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동쪽은 조선을 의미,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는데,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1]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2]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폐교한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기에, 윤동주의 시에는 만주, 북간도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다. 별 헤는 밤이 대표적이다.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3]로 진로를 정하고,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진학을 희망한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희전문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연희전문 문과는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학교이기도 했다.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와의 싸움을 말리고 고생 끝에 윤동주는 문과로 진학을 가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동의했으나, 너무 싸움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선 모양.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서울에 살던 시기에 많은 명시가 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흉흉해진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하지만 그는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윤동주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인이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교토3고학생 고희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일본 경찰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일본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 윤동주 판결문에 나와 있다(번역본은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수록)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3고의 선배.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기소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 씨가 생존한 고희욱 씨를 직접 만나 관련 증언을 듣고 평전에 실었다.

수감 후 윤동주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뇌일혈로 병사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윤동주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전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고 '아'라는 외마디의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윤동주 사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친구 강처중이 그를 생각하며 쓴 발문엔 당시 간수가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온 유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2.1. 사망과 의혹[편집]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다. 윤동주는 실제로 복역 중에 어떠한 주사를 자주 맞았고 함께 수감된 고종사촌 형이자 친구 송몽규 또한 이 주사를 자주 맞다가 1945년 3월 7일 급사했다.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그리고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씨가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윤동주에게 주사한 물은 다름 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로, 일본군이 연구하던 이런 생리식염수 연구는 이미 십 수 년 전 유럽에서 동물에게 실험하여 이미 검증이 끝난 실험이었다고... 731부대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은 파시즘에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으므로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이 설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바닷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혈관으로 들어가는 점은 엄연히 다르다. 위생상 두 방법 다 안 좋긴 마찬가지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건 토하거나 나중에 배변으로 나올 수 있지만, 살균작업을 거치지 않은 무수한 세균이 득실거리는 바닷물이 영양실조 상태의 인간 혈관에 주사된다면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유력하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이다.[4][5] 일각에서는 뇌일혈이라는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던 주사로 인해 1800여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그렇지만 윤동주가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기사 주요 골자는 생체실험에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3. 사조[편집]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서시[6]자화상참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아니고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주도적이었다. 거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그 밖에도 윤동주는 2권 분량이 될 시를 남겼으나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 이걸 전해 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분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기사1 기사2

4. 성격과 일화[편집]

  •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성격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 2016년 3월 6일 KBS에서 「불멸의 청년, 윤동주」가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1년 후배인 유동식 교수에 의하면 윤동주는 피부가 희고 깨끗했는데, 됨됨이 자체도 깨끗한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시도 그렇지만 윤동주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발간되자마자 직접 구입해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정지용 시집에는 인상 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7]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놓은 글귀도 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동시를 재평가하게 되고, 자신도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보면 인상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중간중간 자신의 감상이나 소견을 메모한 흔적이 있다.

 

  • 학창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북간도에서 기독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학생 때는 '가톨릭 소년'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어릴 적 그가 기독교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간직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적어도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간도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녔던 것이 추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서울 소재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던 기독교계 대학이었던 릿쿄대학[8]에서 유학을 했었는데,[9]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10]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 윤동주는 남이 자신의 시를 지적하는 것에 따라 고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병욱의 지적이나 조언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의 '그러나~'로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조언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 정병욱의 회고록인 「동주 형의 기록」도 인용되는데, 그에 의하면 항상 남보다 먼저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이든 예사로 넘기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난 이상한 풀에 꽃이 피어있으면 꺾어서 단춧구멍에 꽂고 다녔다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제자의 안위를 걱정해 원고 출판을 만류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스승으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못해서 용정의 아버지께 보여드렸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출판하지 못했다고. 학창시절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유학까지 간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계속 공부한 것이다.[11] 이때 윤동주는 300원(현대의 가치로 약 300만 원)이 없어 출판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동기였던 모리타 하루에 의하면 키가 크고 항상 바른 자세였으며, 자신을 '윤동주'라 소개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 동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에 의하면 동급생들에게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윤동주에게 노래를 청하자 활짝 웃으며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약간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체포될 당시에는 1년 가까이 일본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미행한 끝에 내건 죄목이 '독립운동(개정치안유지법 5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한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드러났다.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한다.

 

  • 위의 방송에서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도 나왔는데,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한다.' 등 윤동주의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이 엿보이는 구절이 여럿 있다.

 

  • 강처중에 따르면 소심하고 좀체 말이없는 성격탓에 친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방엔 친구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친구들의 부름에, 산책권유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별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고 얼굴은 침울했다고 한다. 그도 가난했지만 항상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해서 항상 그의 외투와 시계는 부지런히 전당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양과 맛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

 

  •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12]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13], 일본유학 당시 여러 일본 여인네들을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인지 백석과 임화황순원과 함께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자주 관심을 받는 시인이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  

 

5. 작품[편집]


국어영역에서 꽤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 데다[16],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17]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18][19]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자화상>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20]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듯.[21]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편집]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22]김소월의 <가을 아침에>, 필자불명의 <편지>[23] 등

특히 <편지>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편지>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편지>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편지>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6. ...(참고하기)[편집]

파일:mVO6Qbgr.jpg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24] 그러다 오오무라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25]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중국의 관련 기사.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으로 국적 바꿔 /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 설치

6.1. ...(참고하기)[편집]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조선족> 은 <민족(民族)은 조선민족이며 국적(國籍)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26]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대장정 이전의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국, 즉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 재만 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단에서 서술한 중국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소유한 "조선족"이 아니다. 윤재옥은 고종 즉위 22년인 1886년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의 증손 윤동주는 1917년에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윤동주는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27]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의 개념이 부재했기에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고 되려 현대에 일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또한 현재 조선족은 남북한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문학의 현대 연구에서 만주, 중국지역 대비 재일 조선인 측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례가 훨씬 많은 원인 중 하나다.[28]

6.2. ...(참고하기)[편집]

위와같은 기념이나 추모행태를 동북공정같은걸로 생각해서 윤동주를 중국인화하려 한다며 중국 정부를 성토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앙정부는 위와 같은 일개 소수민족 시인에 아무 관심 없다. 이렇게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려는 인물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사들이다.

한국인 입장에서야 중국 조선족들이 "민족공동의 시인"으로서 접근해주길 바라겠지만, 민족주의의 확산을 강력히 우려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29] 조선족들의 입장도 사실 이해할 만한데, 20세기 초반에야 형성된 중국 조선족은 대표적인 문학이나 시인이 드물기에, 윤동주야 말로 자기 고장 출신의 거의 유일한 네임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동주를 조선족 차원이 아니라 남북한을 아우르는 전민족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어그로를 끌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 당국에 의해 이런 "중국조선족" 출신 민족시인로서의 추모마저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뿐.

사실 이런 문제는 천년이상 한반도에 자리잡고 단일민족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온 우리에겐 생소해도 유럽엔 굉장히 흔하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독일과 폴란드가 자국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쓴 유대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 작가로 봐야하는지 체코 작가로 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작가라고 꿋꿋하게 우기고 있다.

7.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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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구글 두들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1980년대에 TV문학관 특선으로 저항시인 3부작이[30] 방영되었는데, 윤동주 편에서 송승환이 열연했다.


2011년 MBC스페셜에서 윤동주를 기념하는 일본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2014년 최근에는 EBS <라디오 인물열전>[31]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 역 성우의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윤동주 평전>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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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 목사[32]가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다.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 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윤동주 평전>의 3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장준하 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선생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하셨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진은 정일권 항목 참조.)

또,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는가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숭실중학의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 문익환은 자진 퇴학[33]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이 일본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은 이 광명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 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민족주의계 학교로 수업을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형이다.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에서도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34]도 있다. 시 낭송회를 열기도 하는등 여러모로 팬층이 꽤 있는편.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년과 청년층들도 꽤 자주 보인다.[35]

2015년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완역했으며, 이에 대한 일본인 독자들의 평가는 "서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줄 몰랐지만 이 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작가가 윤동주였나." "윤동주의 시 몇 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천재성이 있는 작가였나." 하는 극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전부 작가가 어휘선택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영혼의 울림이 있게끔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구성된 시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임을 파악 가능한 것. 대신, 이것을 한자나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로 번역할 때에는 높은 싱크로율로 일본인들도 찬양하는 명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타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되면 무슨 학생이 쓴 시가 되어버린다는 단점이 있다.[36]

여하튼 일본인들조차 그 재능을 인정하는 천재. 위에서 언급했듯 일부 일본 교과서에도 '서시'가 실려 있다. <별 헤는 밤>의 첫 대목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는 한국인을 넘어 일본인들도 울려버린 명 구절이다.

 

우연히 윤동주의 사진을 본 후 "이런 미남이 무슨 시를 썼나??"하면서 찾아보다 빠져들었다는 예도 보이며,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예도 있다.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던 윤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에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 적혀 있는 시는 서시. 그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적혀있다.[37] 이 시비를 보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교토여행 중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찾기도 한다. 시비 위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놓은 한국과 관련된 물품이 놓여져 있다. 가끔씩 소주나 담배, 동전 등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약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학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 감사성찬례,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한다.

상기한 도시샤대학 시비 말고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이 배우는 '윤동주=자아성찰'의 코드는 소설가 마광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에 의해 정립되었다. 오늘날 윤동주가 국민시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마광수. 어째 현재의 마광수에 대한 인식은 "야설이나 쓰는 노망난 할배" 정도지만(...) 모종의 사건[38]으로 체포되기 이전에는 유망한 국문학자로 기대를 받았는데 바로 이 논문 덕이다. 논문은 1986년200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영화)'가 2016년 2월 17일 개봉했다. 감독은 이준익.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으로 출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취조받는 씬과 과거를 번갈아 가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연출. 평단의 평은 전체적으로 좋다.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등으로 유명한 이정명 소설가의 책 중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벌인 일과 간수의 죽음,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간수의 죽음을 수사하는 다른 간수가 윤동주 시인과 죽은 간수, 그리고 수감자들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서브컬처계에서는 드물게 하이큐!!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니시노야 유가 치룬 기말고사 답안지에서 윤동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안녕, 쿠로(2003)>의 엔딩으로 교장이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한다. 자막이 별헤는밤이라고 적어놨다

무한도전에서 개코황광희오혁이 윤동주 시인을 주제로 한 "당신의 밤" 노래를 제작해 불렀고, 여러 음악 차트에서 오랜 기간동안 1위를 차지했다. 윤동주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의 가사로 "서시", "별헤는 밤"의 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이 12년간의 노력끝에 2017년에 교토 우지강변에 윤동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부터 일본, 한국의 900여명의 사람들에게 모금을 받았으며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윤동주기념비건립준비"모임에서 12년간 30번 이상 본청에 요구하였으니 정말로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8. 참고 항목[편집]

[1] 한자로 일(日)자와 왈(曰)자는 표기가 비슷하다. 왈자가 가로로 긴 모양.[2] 숭실중고등학교에서는 윤동주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자부심을 은근 강요한다.[3] 지금의 이과-문과의 이분법이 아닌 문학과를 의미한다.[4] 한국의 시인(1912~1978), 영문학자, 중문학자이자 윤형주의 아버지. 윤동주보다 5살 많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학과 중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윤영춘 본인도 윤동주가 체포될 시기 비슷하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아들 윤형주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에 다닐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본인의 수감과 5촌 조카 윤동주의 옥사를 겪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이후 일본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5] 무릎팍도사 문성근편에서 문성근이 일본군 징집문제로 장준하, 윤동주, 그리고 그의 아버지 문익환의 얘기를 했다. '문익환은 신학자로 절대로 입대할 수 없다는 의지로 신학교장과 담판을 지어 전학가게 되었고, 장준하는 입대 뒤 탈영해 독립군으로 들어가려 하였고, 윤동주는 일단 입대한 뒤 일본군이 약해질 때를 틈타 내부에서 난을 일으키자 했었으나 윤동주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생체실험을 받다 죽었다.'라고 한다.[6] '서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정본에 따르면 제목이 없다.[7] 이 당시에는 세로쓰기였다.[8] 일본성공회 소속 미션스쿨[9] 그러나 릿쿄대학은 윤동주가 처음부터 원해서 갔다기 보다는, 교토제국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진 후, 일본에서 다닐 수 있는 다른 대학을 찾던 중 차선책으로 가게된 것이다. 기독교계 대학이라는 것이 릿쿄대학을 선택할 때 고려된 한 요소가 되었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대학을 가고싶어서 릿쿄대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10]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반전(反戰)을 주장했던 기독교계 인물로서, 특히 윤동주를 만나 사제의 연을 맺던 당시가 일본정부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철저히 감시받던 때였다. 어쩌면 윤동주가 이 때부터 일본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1]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난의 느낌이 강하다. 일제강점기는 고사하고 60~70년대의 배움에 뜻이 있어도 형편때문에 이루지 못 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널렸음을 생각해보면 유학하는 부자 아들내미들보단 가난했겠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확실히 잘사는 집안이다.[12] 조선시대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오성과 한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풍습을 지켜왔으면 현재처럼 존칭 때문에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13] 윤동주의 실물을 본 몇 안되는 이, 즉 친구인 문익환 목사나 육촌 동생인 윤형주 씨의 증언으로는 "확실히 그 당시 한국인들 중에서도 잘생겼다." 라고 인정한다. 윤형주 씨는 본인도 1960년대 활동 당시에 미남 취급을 받았는데 그런 본인보다 더 잘생겼다고 말하는걸 보면 확실히 미남은 미남이다.윤형주 씨가 관련된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윤형주는 1947년생인데 윤동주는 1945년에 옥사하였으므로 윤동주의 실물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4]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19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15] 현대의 맞춤법에 따른 표기로는 '쉽게 쓰인 시'.[16] 어느 정도냐 하면, 윤동주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으면 무조건 '자기반성과 성찰'을 고르면 끝이다. 물론 윤동주가 지은 '오줌싸개 지도' 같은 동시 비슷한 녀석이 출제되면 그런 거 없겠지만 수능에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주제로 한 시가 출제된다.[17] 그러나 고등학교의 문턱을 넘어서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시인이기도 하다. 사실 그저 '저항의식'이라거나 '자기반성'이라고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다가 전공 강의를 듣거나 시집을 사서 제대로 읽어보면 도저히 헤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시들이다. 앞서 이육사보다 난이도가 낮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니 고등학교 때 아는 시라고 훌쩍훌쩍 넘어가지 말고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보자..[18] 굳이 친일 행적으로 트집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창씨개명 하나 정도. 하지만 당시에 창씨개명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도 하지 않으면 일본 유학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퇴학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히라누마 도슈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시집 원고에는 언제나 윤동주로 표기했고, 외국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윤동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 전에 벌써 참회록을 써놓고 자책과 반성을 했다.[19] 그리고 창씨개명했다는 '도슈'라는 이름은 윤동주의 동주(東柱)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일 뿐이다. 창씨개명 때 이름을 아예 일본식으로 갈아엎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생각하면...[20]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은 꽤 많다. 그들의 모임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21] 백석 시인의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으로 출판되었었고,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필사한 것을 소장하였다고 한다.[22] 원작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의 작품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23] 필자는 알 수 없지만, 안치환의 노래 <편지>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24] 집안이 개신교였던 관계로 공산화된 지역에 있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친인척들이 아예 남으로 내려왔다.[25] 윤형주보다 나이가 많은 윤동주의 친척들은 이 시기에 이미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윤형주가 대표라 북간도에 갔다고 한다.[26] 때문에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재일 조선인과 다르게 대한민국과 북한 국적을 지니지 못한 상태이고 이국 국적 취득도 중국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다.[27] 약칭 국호로써 대한제국은 대한과 한국을 동시에 사용하였다.[28] 윤동주의 창작활동은 대부분 1942년 일본 유학 이전 조선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때 이루어졌다.[29]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은 민주국가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30] 하나는 백윤식이 열연한 이상화 편, 다른 하나는 김흥기가 열연한 이육사 편이다. 이상화 편에서는 미니어처로 관동대지진이 재현되었다.[31] 회당 10분짜리 음성 드라마[32] 문성근의 부친으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은진중학-숭실중학-광명중학을 함께 다닌 친우다.(징집령에 대한 판단이 가른 운명).[33] 그 당시의 숭실중학에 재학하던 다수의 학생들이 이 문제로 자진 퇴학을 했다.[34] 1984년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와 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 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35] 윤동주의 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36] 가령 김소월의 <접동새>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이라는 명구절조차 영어로 "쿠쿠 쿠쿠 나인 브라덜스 쿠쿠" 라는 괴이한 번역이 되기 쉬우므로.[37] 윤동주 시비 옆에는 역시 같은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윤동주 시인은 처음 일본에 오기 전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을 다니다가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그가 좋아했던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대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학 역시 릿쿄대학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미션스쿨이다.[38]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자세한 것은 마광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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