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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정병욱의 老母
2018년 10월 10일 02시 13분  조회:3514  추천:0  작성자: 죽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오롯이 품었던 곳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의 정병욱 생가. 일제강점기와 광복으로 이어진 혼란기에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이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2년 선배인 윤동주에게 받은 원고를 이 고향집에 맡겼다.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왼쪽)와 권영민 교수. 광양=황인찬 기자 
 
 

《 매년 봄이 되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 일대. 남해와 맞닿은 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엔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인연이 깃든 정병욱의 생가가 남아 있다. 윤동주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비밀을 품은 집이다. 시간을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으로 돌려본다. 》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전문(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한 뒤 가장 먼저 친해진 선배가 윤동주였다. 신문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윤동주가 먼저 정병욱을 찾았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학교 2년 선배였다. 멀리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온 윤동주와 전남 광양에서 온 정병욱, 두 문청(文靑)은 글을 통해 가까워졌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기숙사 생활부터 학교 공부까지 윤동주의 도움을 받아 낯선 서울 생활에 적응했다. 

이듬해 봄 둘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 누상동에 하숙을 정했다. 광복 직후 활동했던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이었다. 두 사람은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는 늘 자신이 쓴 시의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 ‘간(肝)’ 같은 시들이 하숙방에서 탄생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윤동주가 2년 선배였지만 둘은 하숙방을 함께 쓰며 문학에 대해 고민하던 절친한 문우였다. 광양=황인찬 기자 
 

두 사람의 대화는 문학과 예술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를 따라 정병욱도 일요일이면 교회당을 찾았다. 충무로 책방거리도 함께 거닐었고, 음악다방에 들렀다가 영화관을 찾기도 했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신이 평소에 써두었던 시들을 정리해 시집을 펴낼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제강점기 상황에서의 시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된 책자 발간이 금지됐다. 윤동주는 1941년 모두 열아홉 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해 놓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원고를 손수 제본해 총 세 권을 만든다. 이 시집의 서문을 시로 적은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서시(序詩)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입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거러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는 그중 한 권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썼다. 육필로 만든 단 세 권의 시집 가운데 하나를 아끼는 동생에게 준 것. 다른 한 권은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선생께 드리면서 시집 출간을 상의했지만 무산됐다. 결국 윤동주는 남은 한 권을 지닌 채 1942년 일본으로 떠났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뒤 정병욱도 모교를 떠나야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학병에 징발되었기 때문이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자신의 책과 노트, 그리고 윤동주의 자필 시집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셔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도 곁들였다. 정병욱은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부상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다.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정병욱은 경성대학(현 서울대) 국어국문과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하던 중에 끊겼던 윤동주의 소식을 들었다. 북간도 용정에서 광복과 함께 귀국한 윤동주의 가족을 통해서였다. 충격적이고 가슴 아린 소식이었다. 윤동주가 1943년 7월 교토의 도시샤대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결국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악형(惡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 정병욱은 윤동주가 생전에 건네주었던 시집 원고를 떠올렸다.  

정병욱은 고향 집을 찾았다. 광복 후 어수선한 서울을 떠나 오랜만에 찾은 귀향길이었다. 고향집은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 있는 점포형 주택. 그의 부친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향리의 청년 교육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정병욱은 집에 들어서자 바로 어머니에게 전에 맡겼던 책과 노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잘 간수했으니 걱정 마라”고 말한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 놓은 책과 노트를 꺼내왔다. 보자기를 푼 정병욱은 자신의 책과 노트 사이에 있는 윤동주의 시 원고를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는 혹 남들 눈에 띌까, 이들 자료를 양조장 큰 독 안에 감추었다가 지금껏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해 왔다고 전했다. 

정병욱은 서울로 올라오자 곧바로 시집 원고를 윤동주의 가족에게 보였고, 이 원고와 함께 윤동주의 시 작품들을 조사하여 시집 발간 작업을 서둘렀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마침내 나오게 된다. 

도시샤대 영문과 선배였던 시인 정지용은 이 시집에 이런 글을 붙였다. ‘청년 윤동주는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난달 말 망덕포구에 있는 정병욱의 생가(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23)를 찾았다. 1925년 건축된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 집은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기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집은 원래 건평만 264m²(약 80평)였지만 지금은 반파돼 105m²(약 32평·방 5칸)의 한 건물만 남았다. 생가 옆에서 횟집을 하는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57)가 현재 소유주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을까. 날 좋은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단다. 다만 이들을 맞을 안내자도, 변변한 공중화장실조차 없다는 게 아쉽다고 박 씨는 전했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 표지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드림)’이라고 적었다. 권영민 교수 제공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정신과 그 맑은 영혼을 가슴 깊이 간직하기 위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를 한자로 바꾼 ‘백영(白影)’을 아호로 삼았다. 두 사람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말을 듣고 원고를 고이고이 간직했던 노모(老母)의 자상함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눈을 돌려 바라본 섬진강의 물결은 이날도 말없이 평안하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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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말벌술을 함께 마신 정 교수님은 국문학자 정학성 교수다. 정 교수의 부친이 정병욱 교수라는 것을 그 밤에 알았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이 되어 국문학과 배정을 받아 과 사무실을 드나들었을 때 바로 앞방이 정병욱 교수 연구실이었다. 봄학기 내내 연구실 문이 닫혀있더니, 그해 가을에 정병욱 교수가 암으로 타계했다.

나는 <국문학산고>, <한국고전시가론> 교재를 통해서만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나 말벌술을 마신 그 밤에, 정병욱 교수의 호 백영(白影)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딴 것이고, 그가 양조장집 아들이었고, 그 양조장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손 글씨 원고가 보관되어 오늘의 윤동주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명의 윤동주를 시인으로 일으켜 세운 친구들
 
 함께 하숙하며 연희전문을 다닌 윤동주와 정병욱
▲  함께 하숙하며 연희전문을 다닌 윤동주와 정병욱

 

윤동주 시집을 다시 읽어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시 속에서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그는 술로 생을 위로받지 않았고, 술 마신 사연을 한 줄 시 속에도 남기지 않았다. 감성적인 문학 청년이 일제 탄압이 혹독해지던 시절인데도 술 한 잔 마신 흔적을 남기지 않다니, 그의 시가 맑고 깨끗하고 선명했던 이유를 알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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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살아서 문단에 정식 데뷔하지 못했다. 그의 시가 튼튼해지던 시기는, 당대의 문학청년들이 등단하고 싶어했던 <문장> 지가 1941년 4월호로 폐간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1940년 8월로 폐간된 상태였다. 우리말로 자유롭게 글을 짓고 뜻을 펴지 못하고,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부역을 하듯이 글을 쓰던 상황이었다.

윤동주가 개인시집을 내려고, 훗날 '서시'라는 제목이 붙게 된 서문을 쓰고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붙이고 지인들의 의견을 구했을 때가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이었다. 윤동주는 일제로부터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출판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아들였고, 자필 시집 3권을 만들어 한 부는 영시를 배운 연희전문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함께 하숙을 했던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자신이 소장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2월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가족에게 시신이 인도되어 북간도 용정현에 묻혔다. 윤동주는 데뷔도 하지 않았기에 무명의 문학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시인으로 일으켜 세운 친구들이 있었다.

연희전문 문우였던 강처중이 그렇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5편의 시를 편지지에 써서 건넸는데, 그중의 한 편인 '쉽게 씌여진 시'가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문과 함께 게재되었다. 이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던 강처중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 시가 해방 뒤에 발표된 윤동주의 첫 작품이고, 윤동주라는 시인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십자가', '자화상'은 1941년 손 글씨로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소장한 작품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양하 교수에게 건넨 것도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정병욱에게 건네준 것만이 남아 오늘의 윤동주 시인을 이루게 된다.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에 보관되어 있던 윤동주의 손 글씨 시집
▲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에 보관되어 있던 윤동주의 손 글씨 시집
ⓒ 허시명

 

 
윤동주보다 2년 늦게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은 1944년 학병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정병욱은 전라남도 광양에 계신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시를 맡겼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 

정병욱의 증언이다. 어머니가 시집을 보관했던 곳은 양조장 마루장 밑의 항아리 속이었다. 정병욱은 1948년 강처중, 그리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함께 정음사에서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시집을 펴냈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

1948년 시집을 내기 위해서 서문을 받으러 윤일주가 정지용 시인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 정지용 시인이 윤일주에게 그의 형에 대해 물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싸스나 거저 줍데다." 


이 문답 끝에 정지용은 윤동주를 이렇게 해석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빼앗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다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는 입에 술은 거의 대지 않았다. 부끄럼 많은 청년이 괴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하늘의 별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시를 쓰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 고요하고 아득했다. 그는 술과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이 담긴 시를 지켜준 것은 남도 끝 망덕 포구의 양조장이었다.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에 가다
 
 전남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 건물
▲  전남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 건물
ⓒ 허시명

 

 
나는 보리 이삭이 피는 봄날 도다리쑥국이 맛있을 무렵에,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을 찾아갔다. 광양군의 문화해설사가 양조장 가옥을 설명했다. 가게와 살림집과 양조장이 연동되어 있는 건물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윤동주의 시집을 숨겨놓았던 마룻장 위에 시집이 놓여 있었다.

바로 앞 망덕 포구는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으로 이어지고 바깥으로 남해군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이다. 일제강점기 때에서는 인천에서 시모노세키로 연결되던 연락선이 들어오고, 육지와 다도해 섬을 연결시키는 곳이라 물산이 풍부했다.

백영 정병욱은 이곳에서 성장했고, 부산과 서울로 유학하던 시절에 방학이면 이곳을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남해군 사람으로 3.1운동에 연류되어 피신하다가 하동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망덕 포구로 나와 어장과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아들 정병욱을 따라 1960년대에 서울로 이주하기까지 양조장을 운영했고, 그 뒤로 처조카에게 양조장을 넘겨주었다. 그 처조카 박영주는 1980년대까지 양조장을 운영하다 그만두었는데, 다행히 그 양조장은 허물어지지 않고 그의 아들 박춘식씨에게 이어졌다.

양조장 건물 옆에서 도다리쑥국을 해내는 횟집을 운영하는 박춘식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청하여 양조장 안채와 안마당을 보게 되었다. 정병욱이 부산대학교 교수 시절에 우장춘 박사에서 씨앗을 받은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사람은 갔지만, 꽃은 다시 찾아왔다.

양조장 발효실은 어느 해 태풍 오던 날, 뒷산 흙더미에 무너지고 말아 빈 터가 되었다. 그래도 본채에 딸린 양조 공간은 남아있어 그곳에 누룩방이 있었다. 창고로 쓰이는 창문없는 누룩방이 쓸쓸해 보였다.

안마당에 양조장 우물이 남아있는데, 덮개를 열고 보니 우물물이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술을 담았던 질항아리가 장독대에 하나 간신히 남아 있었다. 종이덮개를 하고 있는 질항아리는 자존심을 잃고 매실청을 담고 있었다.

이제 술 향기는 나지 않지만, 양조장 건물은 2007년에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양조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으로 명명되었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과 인연을 소개한 글이 벽보로 붙어있고, 간간이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멀리 북간도에서 유학온 윤동주의 영혼이 한반도를 가로질러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 마루 밑에 깃들면서 새롭게 재구성된 공간이 된 셈이다. 섬진강이 남해 바다로 접어드는 망덕 포구를 걸으면, 지금도 윤동주와 정병욱이 포구에 앉아 도란도란 시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이곳은 한국문학사가 기억하는 최고의 우정이 깃든 곳이라고 평할 만하다. 이 땅에서 이만큼 아름다운 사연을 지닌 양조장도 아마 없을 것이다.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에, 윤동주는 '별 헤는 밤'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은 "따는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끝나 있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라고 말했다. 윤동주가 무척 싫어하는 것은 그의 시를 고쳐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의 힘 때문이었을까? 윤동주는 필사본 시집-양조장에 숨어있다가 세상 빛을 본 그 시집-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라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별 헤는 밤'의 아픈 마지막 시 구절이 완성되었다. 시는 윤동주가 썼지만, 그 시를 지킨 것은 우정이었고, 그 시를 품어준 것은 땅끝 모퉁이 망덕 포구의 양조장이었다.
/허시명

===================///(참조)

한국시인협회는 10여 년 전 '한국 10대 시인'을 선정했던 적이 있다. 이때 선정된 김소월, 정지용, 한용운, 서정주, 백석, 김수영, 김춘수, 이상, 윤동주, 박목월 시인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시인들이다. 당시 시인협회는 현대시 100년을 맞아 한국시의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성찰해보자는 의미에서 10대 시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그럼 한국 현대시를 연 시인은 누구일까? 한국 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했지만, 훗날 변절하여 민족반역자가 된 최남선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시인협회는 100주년이라는 말로써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1908년을 현대시의 시작으로 잡고 있음을 드러냈다. 

최남선이 현대시를 열었을지는 몰라도 현대시를 대표하거나 사랑받는 시인은 아니다. 창가와 자유시의 중간쯤에서 다리를 놓았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친일문학인으로 지탄받아야 할 인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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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정주는 친일 행적으로 따지면 최남선 못지않았다. 윤동주, 이육사가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죽어갈 때 서정주는 일장기 앞에 합장하며 친일문학에 헌신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고 태평양전쟁을 사회발전을 위한 진리의 전쟁이라며 조선청년들에게 참전을 독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시 10대 시인에 선정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해방 이후 한국 문단에서 시인들의 등단을 좌지우지하며 권력을 향유했던 서정주를 비호하는 세력들이 한국문단 권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평생을 일제와 독재 권력에 빌붙어 기회주의적 행태로 일관했던 서정주를 떠받는 이들이 여전한 문단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현대 10대 시인' 어쩌고 하는 선정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다. 다만, 선정된 시인들을 통해 현대시를 논할 수 있고, 시를 가까이 하는 기회로 삼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시를 가까이 하려고 해도 현대시가 갖고 있는 특징인 애매모호함 때문에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가까이 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몇 번을 읽어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시를 '좋다'고 하는 평론가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현대시를 읽고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시 쓰는 방법'을 들고 나온 시인이 있다. 2014년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 2015년 <시작작품상>을 수상한 전업 시인 박진성이다. 17년 동안 시인으로 활동했던 박 시인은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을 통해 시를 쓰려는 이들과 시를 쓰고 있는 이들에게 작고 사소한 조언들을 모아 전하고 있다. 

시작법을 다루는 이 책은 문장들을 '시'처럼 연과 행으로 편집하여 시집을 읽는 느낌을 준다. 내용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담백하여 손에 잡으면 금세 읽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 제목을 보며 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소월이 세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국민시인이기는 하지만, 현대시의 아버지하면 정지용인데, 왜 하필 김소월일까? 좀 더 나아가 김수영이면 안 되나 하는 질문도 나올 법하다.

박 시인은 김소월이야말로 현대시에서 '한(恨)'이라는 민족 정서를 쉽게 잘 표현했기 때문에 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시가 좋아하는 말들' 중에 '너'가 있다는 박 시인의 진술을 통해 김소월이 '님', '당신'과 같은 말을 좋아해서 택했을 거라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불특정 2인칭 "너"를 시는 좋아합니다. 시의 모든 발화는 나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너, 라고 쓰는 순간 그 안에는 내가 포함됩니다." - 60쪽.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은 시가 갖고 있는 특징을 쉽고 짧게 설명한다. 말을 절약하는 대신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명은 저자의 역량을 가늠하게 한다. 그와 함께 시를 쓰는 이의 윤리를 말하며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은 읽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함부로 시 안으로 가져온 타인의 고통은 그 시 시 자체의 재앙일 뿐만 아니라 자의식의 재앙이기도 하겠지요. 시의 윤리와 미학은 어쩌면 착한(착하고 싶은) 시선으로 쓸 때 얻어지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겨우겨우 시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 99쪽

혹자는 시인이 하고 싶은 말과 비유, 상상을 간신히 참아내는 일을 '자기검열'이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쓰면 안 되는 부분을 스스로 참고 제어하는 일'을 시를 쓰는 일의 시작이라고 하는 시인에게서 시인의 윤리, 타자에 대한 따뜻하고 겸손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 가난한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빈곤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며 동정심을 일으키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가 넘쳐난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힘없이 풀린 눈동자를 한 아이들에게 뭔가를 떠먹여주며 감성을 자극하는 모금 방식은 일반적이다.

그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금 단체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환한다. 시인은 최소한 빈곤 포르노처럼 내가 보고 있는 슬픔, 타인의 고통을 멀리서 관망해서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타자'의 자리를 생각하며 글을 다듬는 일은 쉽지 않다.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은 그런 '나'를 '우리' 혹은 '너'의 자리로 '시'가 이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내 주변에 '너'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는 '나'를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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