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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곡간
2018년 10월 18일 00시 13분  조회:3952  추천:0  작성자: 죽림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시 ‘곡간’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만주는 서글픈 변두리였다. “돈 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땅”(‘오줌싸개 지도’)은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유랑지였다.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명동촌(明東村),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변두리에서 1917년 12월 30일 한 생명이 태어났다. 

 
산들이 두 줄로 줄다름질치고,
여울이 소리처 목이 자젓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작이를 빠르게도 건너련다 

―윤동주 ‘곡간’(1936년 여름)에서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는 골짜기(谷間·곡간)에 있는 명동마을에 꽃이 피면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집 근처 풍경을 동생 윤일주는 생생하게 남겼다.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윤일주 ‘윤동주의 생애’·1976년)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생가. 
윤동주는 마을에서 돋보이는 큰 기와집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개척하여 소지주였고, 아버지는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셨다고 윤일주는 회고했다. 명동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자 소리 듣는 소지주의 후손이었던 윤동주는 맘껏 공부할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뽕나무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집 동쪽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며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윤동주 아버지가 선생으로 있던 명동학교에서는 변질되지 않은 갓 태어난 한글을 가르쳤다.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 때 국어 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당시의 교과서는 ‘솟는 샘’이란 등사본이었다. ‘가’자에 ‘ㄱ’(기역)하면 ‘각’하고, ‘가’자에 ‘ㄴ’(니은)하면 ‘간’하여 천자문을 외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1976년)

 
명동학교는 졸업식 때 파인(巴人)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나누어주는 학교였다. 윤동주는 한글로만 작품을 남겼다. 중국어 성적이 높았던 윤동주지만 중국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로 구별했고, 일본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구별했다. 그에게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는 이국어였다. 변두리에서 배운 때 묻지 않은 한글과 투박한 사투리를 버무려 그는 고소한 시를 썼다.  

변두리에 있는 ‘언덕 중턱의 교회당’은 북간도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명동마을 모든 집의 막새기와에는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이 새겨 있었다. 천둥 비가 내려 무서워하는 동생들을 윤동주는 “예배당 십자가를 봐”라며 달랬다. 성탄절에 친구들은 교회당에서 가까운 동주네 집에서 새벽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변두리에 살던 저들은 ‘히브리인’(경계를 넘어선 방랑인)들이었다. 외삼촌 규암 김약연은 환갑에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다.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자였다.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년 반 동안 룽징(龍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냈다. 김약연,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윤동주, 송몽규, 안병무, 강원용 등 이들은 예언자와 예수를 혀가 아니라, 몸으로 살려고 했다. 윤동주 시를 해석할 때 성경은 종요로운 텍스트다.

이 변두리 명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이 살아났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만주로 가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시킨 의인들이 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맹자와 독립사상을 몸으로 가르쳤다. 1901년에 세운 규암재 이름을 명동서숙으로 바꾼 그는 1909년 다시 이름을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예배당과 학교 건물을 서양식 벽돌집으로 짓고, 서울 기독교 청년학교를 갓 졸업한 실력자 정재면을 모셔 신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명동소학교는 일경이 볼 때 불손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우글거리는 소굴이었지만, 윤동주에게는 한없는 자유를 가르쳐 준 꿈터였다. 윤동주는 4학년 때 잡지 ‘아이생활’을 서울에서 구독해 읽었고, 당찬 송몽규는 ‘어린이’에 독자편지를 투고해 실리기도 했다. 두 아이가 읽은 잡지를 동네 꼬마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5학년생 몽규와 동주가 찍어낸 등사판 월간지 ‘새 명동’은 두 아이의 운명을 엿보인 여린 새싹이었다. 

지금 명동마을 윤동주 생가 입구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애국’의 대상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란 뜻이다. 중국 국적으로 산 적이 없고, 중국어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윤동주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변두리 만주에 소설가 염상섭 강경애 현경준 김창걸 안수길 박영준 황건, 시인 박팔양 유치환 백석 김조규 서정주 함형수 등이 거쳐 갔다. 그들은 잠시 머물렀지만, 윤동주는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다시 만주에 묻혔다.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고나!”(정지용 ‘서문’)라는 평가처럼, 저들보다 늦게 태어난 윤동주는 변두리가 낳은 작은 별이다. 

윤동주는 만주의 시인일까.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며 만주를 그리워했지만, 윤동주의 시는 만주에 갇혀 있지 않다. 후기로 갈수록 지리적 고향을 넘어, 인간의 원형적인 본향의식으로 향한다. 

모든 변두리에서 진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진리는 변두리에서 태어난다. 싯다르타의 고향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는 인도 북부의 변두리 성읍 공동체였다. 시장과 공동묘지라는 변두리에서 지냈기에 맹자는 여민동락 사상을 축조할 수 있었다. 큰 인물이 나올 리 없다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지리멸렬한 갈릴리에서 진리를 말했다. 윤동주, 그는 막막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희미하게 밝혀주는 변두리의 작은 별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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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간 /윤동주 /1938년 여름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고
여울이 소리쳐 목이 잦았다.
한 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짜기를 빠르게도 건너려 한다.

산등아래에 송아지 뿔처럼
울뚝불뚝히 어린 바위가 솟고,
얼룩소의 보드라운 털이
산등서리에 퍼-렇게 자랐다.

삼 년 만에 고향에 찾아드는
산골 나그네의 발걸음이
타박타박 땅을 고눈다.
벌거숭이 두루미 다리같이......

헌신짝이 지팡이 끝에
모가지를 매달아 늘어지고,
까치가 새끼의 날발을 태우며 날 뿐,
골짝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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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문학 전문가 오무라 교수 주장
“육필원고와 현재 시집 사이에 차이 있어”
펜클럽 주최 세계한글작가대회 특별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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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 참가하는 한국문학 전문가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올해로 탄생 100주년(2017년도)을 맞은 윤동주의 시집 정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이사장 손해일) 주최로 12~15일(2017년 9월),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 참가하는 일본의 한국문학 전문가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사진)는 13일 오전에 행할 특별강연 ‘원고로 읽는 윤동주 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오무라 교수는 1985년 중국 용정에서 윤동주의 묘를 처음 발견했으며 <윤동주와 한국문학> <조선 근대문학과 일본> 등의 연구서를 낸 한국문학 전문가다. 1999년 왕신영·심원섭 등 한국인 연구자들과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교수와 함께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을 펴낸 바 있는 그는 미리 배포한 강연 원고에서 ‘병원’ ‘곡간’ ‘아침’ ‘별 헤는 밤’ 등 윤동주의 시 네 편을 예로 들며 정본 확정이 불가능한 까닭을 설명한다.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표제로 삼으려 했을 만큼 윤동주가 소중하게 여긴 시 ‘병원’의 2연 4행 중 “이 지나친”에 이어지는 “放○”의 “○”이 무슨 글자인지 해독하기 어렵다고 오무라 교수는 밝혔다. ‘방일’(放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맥으로 보아 맞지 않는다는 것. 시 ‘곡간’(谷間)은 처음에는 6연으로 썼는데 최종본에는 이 가운데 두 연이 삭제되었다. 삭제된 두 연에는 “말탄섬나라 사람이,/ 길을뭇고지남이 이상한일이다.”와 같은 대목이 들어 있는데, 윤동주가 자기검열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오무라 교수의 추측이다.

 

‘아침’은 10행짜리로 나오는 윤동주의 원고에서 여섯 행에 ×표를 치고 여백에 “고칠 것”이라 써넣었는데, 그의 사후 시집 편찬자가 그의 다른 습작 원고의 시구를 뽑아내어 남은 4행과 합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윤동주 자신이 의도한 최종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원본 대조 윤동주 전집>(2004, 연세대출판부)의 ‘아침’은 각각 다르다.

 

‘별 헤는 밤’에 나오는 이국 소녀들 이름 ‘패, 경, 옥’은 윤동주의 원고에는 한자로 되어 있다.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는 이 시를 쓰면서 화룡현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서 1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던 시절을 떠올렸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며 “윤동주가 이 시를 썼을 때는 틀림없이 중국어 발음이 귀에 맴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패, 경, 옥’이 아니라 ‘페이, 징, 위’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시에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등장하는데,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가 릴케 시를 일본어 번역으로 읽었을 것이라며 당시 일본에서 릴케의 이름은 ‘라이너’가 아니라 ‘라이넬’로 읽었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역시 1955년 재판까지는 ‘라이넬’로 표기했다가 그 뒤부터 ‘라이너-’로 표기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별 헤는 밤’의 마지막 4행은 초고에는 없었으나 후배 정병욱이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라고 소감을 말하자 나중에 써서 덧붙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때문에 홍장학 편 <정본 윤동주 전집>(문학과지성사, 2004)에서는 이 4행을 아예 삭제해 버렸는데, “이 부분도 윤동주가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점에서 삭제해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오무라 교수는 지적했다.

 

‘세계화시대 한글문학, 평화를 꿈꾸다’를 주제로 열리는 세계한글작가대회에는 고은·신경림·유안진·김종회·방민호 등 17개 나라 문인과 연구자 63명이 발표와 토론자로 참여하고 국내 문인과 동포 문인, 경주 시민 등 수백명이 참가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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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청년 말테가 반한 시인은 누구였을까. 당대 최고 명성의 베를렌이 아니었다. 문학의 마천루 파리에 사는 시인도 아니었다. 그는 ‘맑은 공기 속에 울려퍼지는 종소리 같은 시인’이자 ‘자기 집 창문이나 아련히 먼 곳을 비추는 책장의 유리문 이야기를 해 주는 행복한 시인’ 프랑시스 잠이었다.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에서 평생 사랑과 생명을 노래한 전원시인.

 

그를 좋아한 건 릴케만이 아니었다. 식민치하 조선의 백석과 윤동주도 그를 사랑했다.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시스 잠과 릴케의 이름을 시에 녹여냈다. 백석은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라고 썼다.


 
 
 
프랑시스 잠 시어에 릴케도 반해

동주도 ‘별 헤는 밤’에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썼다.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한 프랑시스 잠은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인 요소를 씻어낸 자연주의의 대가다. 프랑스 대혁명 후 ‘온갖 것에 대한 불만족’으로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며 어디로든 도피하려던 세태와는 달랐다. 그는 달아나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포용과 모성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당나귀 이미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박함의 상징인 당나귀를 좋아해서 자주 타고 다녔다. ‘나는 당나귀가 좋아’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 같은 시를 썼고 별명도 ‘당나귀 시인’이었다.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미명계’ ‘연자간’ ‘귀농’에 당나귀가 나오고, 동주 시 ‘밤’ ‘곡간’에도 당나귀가 등장한다.

이들과 프랑시스 잠을 잇는 당나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백석이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고 할 때 당나귀는 연인과 함께 산골마을로 가는 꿈의 매개다. 동주가 ‘밤’에서 한밤중 당나귀에 여물짚을 주는 아버지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모습을 겹친 것도 사랑과 생명과 희망의 메타포다.
증오사회 치유하는 '삼종의 기도'

한편으로는 생의 무게를 말없이 견디는 존재가 당나귀다. 프랑시스 잠은 시집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에서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다’며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들이 살던 시대는 냉엄했다. 프랑시스 잠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기에 태어났다. 백석은 105년 전 청나라가 망한 해에 나서 평생을 변방인으로 살았다. 동주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기에 나 2차대전이 끝나기 6개월 전 옥사했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가 충돌하던 역사의 격변기에 인간과 삶의 근본을 되새기던 시인들….
지금도 다를 게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급변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앞세운 열강의 패권 다툼은 치열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안싸움에 정신이 없다. 분노와 증오, 경멸과 힐난의 ‘팔매질 사회’를 껴안을 희망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비관보다 낙관, 슬픔보다 사랑을 노래한 그 시절 시인들처럼 지금 우리 삶은 얼마나 깊이 있고 성찰적이며 엄숙한가.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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