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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강소천
2018년 11월 17일 20시 41분  조회:4537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대 현대
출생 1915년
사망 1963년
유형 인물
직업 아동문학가
대표작 호박꽃초롱, 조그만 사진첩, , 꿈을 찍는 사진관, 꽃들의 합창, 봄이 너를 부른다
성별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1915∼1963. 아동문학가.

강소천 / 강용률
강소천 / 강용률

1915~1963. 아동문학가.

ⓒ 동아일보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생애

본명은 용률(龍律).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신. 1930년 고원보통학교, 1937년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고원중학교, 1946년 청진여자고급중학교, 1948년 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월남하였다. 1951년 문교부 편수관을 거쳐 1959∼1963년 한국보육대학·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의 강사로서 아동문학을 강의했다.

활동사항

1952년 어린이 잡지인 『새벗』과 『어린이다이제스트』의 주간, 1953∼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1960년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아동문학』의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1931년에 「길가에 얼음판」·「얼굴 모르는 동무에게」·「호박꽃과 반딧불」·「봄비」, 1933년에 「닭」 등 우수한 동요·동시를 다수 발표했다.

1937년 이후에는 동화 및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와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이야기」, 『조선일보』에 「마늘먹기」, 『소년』에 「딱다구리」 등의 단편과 『아이생활』에 「희성이의 두 아들」 등 장편을 발표하였다. 그는 윤석중(尹石重)이 시도한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의 출현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의 동요·동시는 낭만적 기조 위에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이미지 형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에 나타난 경향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글이 아닌 의도적인 창작에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닭」·「달밤」·「조그만 하늘」 등이 이에 속한다. 그는 초기의 낭만적이고 예술적 향기가 짙은 율문 시대를 거친 다음 현실에 대한 긍정적 태도 위에 강한 교훈성을 부여한 후기의 산문시대를 맞이한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꿈을 찍는 사진관」(1954)인데, 이 작품은 교화성 문제로 많은 논란을 겪기는 하였으나, 많은 아동독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열렬한 아동애호가로, 마해송(馬海松) 등과 함께 「어린이헌장」을 기초, 반포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동들의 독서와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기울여 아동문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3년 아동소설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가 49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5년 배영사(培英社)에서 ‘소천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동요동시집 『호박꽃초롱』과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진달래와 철쭉』·『꽃신』·『꿈을 찍는 사진관』·『종소리』·『무지개』·『인형의 꿈』·『꾸러기와 몽당연필』·『대답 없는 메아리』, 그리고 소년소설집에 『해바라기 피는 마을』·『꽃들의 합창』·『봄이 너를 부른다』 등이 있다. 전집으로는 『강소천아동문학전집』(전6권)·『강소천아동문학독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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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함남 고원, 1915. 3. 16
사망 1963. 5. 6, 서울
국적 한국

요약 강소천은 어린이의 바탕으로 한 많은 아동 문학들을 써냈으며,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로 등단했다.

 

어린이의 밝고 건강한 정서를 바탕으로 시적 언어로 동화를 썼다. 본명은 용률(龍律). 고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함흥 영생고보를 마쳤으며 고원중학교·청진여자고급중학교·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다. 6·25전쟁 때 혼자 월남하여 1951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었고 1952년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으로 있었으며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장, 〈아동문학〉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0년 〈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민들레와 울아기〉가 뽑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닭〉·〈보슬비의 속삭임〉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글들을 묶어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을 펴냈는데 1939년 무렵부터 동시보다 동화를 더 열심히 써서, 해방 전까지 〈돌멩이〉·〈토끼 삼형제〉 등을 발표했다. 마해송 등과 함께 '어린이 헌장'을 기초하여 널리 알렸으며 어린이 독서와 글짓기를 가르쳐 문학교육에도 이바지했다. 1963년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을 받았다.

그의 동시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밝고 건강한 생활을 담아 표현했으며, 동화는 시적인 문장과 감각적인 표현과 운율로 사회악과는 무관한 동심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사회현실의 좋은 면만 돋보이게 하여 도덕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고, 소년소설은 어른들이 옛 일을 회고하는 것에 그쳐 아동문학 발전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동화집은 〈꿈을 찍는 사진관〉(1954)·〈무지개〉(1957)·〈어머니의 초상화〉(1960) 등, 장편에는 〈달 돋는 나라〉(1955)·〈꽃들의 합창〉(1957) 등이 있다. 죽은 뒤 〈강소천문학전집〉 전6권을 배영사에서 펴냈으며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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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
姜小泉
본명 강용률 
姜龍律
출생 1915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고원
사망 1963년 5월 6일 (47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필명 (號)는 소천(小泉)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
직업 아동문학가 
시인 
소설가 
대학 교수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소속 前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 
前 연세대학교 강사 
前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前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
학력 함경남도 고원보통학교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활동기간 1930년 ~ 1963년
장르 아동문학, 시문학, 소설
대표작 《꿈을 찍는 사진관》
《바둑이와 편지》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시집 속의 소녀》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예장통합)[1]

강소천(姜小泉, 1915년 9월 16일 ∼ 1963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시인소설가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생애[편집]

본명은 강용률(姜龍律)이고,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이다. 소천(小泉)은 아호이며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생이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여자고급중학·청진제일고급중학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였다.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당선되었으며, 그 뒤 〈닭〉을 비롯한 동요·동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1940),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 이야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월남 후 피난지 경상남도 부산에서 독서 지도와 글짓기지도 등 아동문학의 보급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1952년), 《아동문학》 편집위원(1962년), 한국보육대학, 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강사(1959년 ∼ 1963년),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1960),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문예상을 수상한 후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사후 1965년에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아름답고 무한한 동심의 세계와 착하고 고운 소년 소녀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표작으로 〈꿈을 찍는 사진관〉(《소년세계》 1954.3)[2], 《호박꽃 초롱》(1941, 박문서관), 《꽃신[3] 등이 있다. 금성출판사가 펴낸 창작동화전집에 실렸던 강소천 선생의 글중에는 사이가 나쁘던 두 나라가 삶으면 이 되는 꿀꽃, 꽃잎이 무지개무늬인 무지개꽃 같은 신기한 씨를 주고받으면서 갈등을 풀어간 이야기도 있다. 평화라는 기독교 사상을 담아낸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인간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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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시인 박목월(朴木月)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었다.

각주[편집]

  1. 이동  "); padding-right: 13px;">강소천 선생 가시다동아일보
  2. 이동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사진으로 찍는 사진관 이야기.
  3. 이동 구두를 만드는 노동자가 아기를 위해 예쁜 꽃신을 짓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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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20세)

  •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 외사촌 누이 허흥순의 안내로
  • 간도의 용정으로 감.

1935년(21세)

  • 용정 외삼촌 집에서 1년간 머무름.
  •  
  • 이 시기에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를 만남.

1936년(22세)

  • 용정에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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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윤동주의 시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화려하고 조숙한 낱말을 이용하여 관념적으로 그려내던 그의 시가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하고 순수한 표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은 용정의 외가에 온 동요시인 강소천을 만나고 습작에 대한 조언과 함께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발간된 ‘정지용시집’을 탐독한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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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박사의'그것이 알고 싶지?'... 

불멸의 시인 윤동주를 그린 영화 '동주'

링컨·잡스 외국에선 역사인물 영화 인기

 

영화 ‘동주’,ㅡ 윤동주 시인(1917년 12월30일~1945년 2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 시인과 함께 순국한 사촌 송몽규(1917년 9월28일~1945년 3월7일)의 생애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최근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흑백으로 펼쳐진 화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총 제작비가 5억원에 불과한 저예산 영화여서, 거리 소품, 의상, 거리 재현 등에 큰 예산을 들일 수 없었던 감독의 ‘현실적 고뇌’가 느껴졌습니다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청년 시인의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아닌 영화로 만든 전기

최근에는 영화로 쓰여진 전기(傳記)가 많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바이오그래피컬 필름(biographical film)이라고 하지요. 최근에 나온 전기 영화로는 ‘링컨’, ‘잡스’, 프랑스 샹송가수 피아프의 일대기 ‘라 비앙 로즈’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위인이나 기억할 만한 사람들의 생애가 책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시대가 변했다는 신호입니다. ‘진지한 정보’를 취득하는 통로가 다양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원시시대 이래 몸짓언어, 음성언어, 문자언어를 발명하며 의사소통 수단의 진화를 이룩했습니다. 후자로 갈수록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많은 용량의 정보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문자언어에 비해서는 음성언어가, 음성언어에 비해서는 몸짓언어가 더 배우기 쉽고 인간의 본성과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인간 본성’ 몸짓을 담는다
 

 

기술이 인간의 본성을 담기에는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 획기적인 수단이 태어났습니다. 인터넷과 휴대폰 발명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송하는 일이 가능해졌지요. 저는 이 현상을 ‘몸짓언어의 부활’이라고 정의합니다. 몸짓언어가 번성할 수 있는 ‘대중적 기록, 저장, 전파’의 수단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시대에는 문자보다 동영상이 번성하리라고 예측합니다.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은 ‘문자’를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언어이고 문자는 단지 언어의 기록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언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동작, 표정, 기타 여러 가지 행위도 의사전달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발아한 학문이 기호학입니다. 예컨대 영화감독이 잡은 특정 화면에 인물과 대사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일반인들이 일상적인 차원에서 통신, 녹음, 녹화 및 모든 정보를 실시간 전송·공유·확산할 수 있는 휴대폰 보급은 인류가 정보를 전달하는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만큼 인류사에 혁명적인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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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 ‘동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영화 서두에 ‘사실에 바탕을 두었지만 영화적 허구가 섞여 있다’는 자막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적 표현을 몇 장면 비교해 보겠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데이트하던 여성이 두 분 나옵니다만, 둘 다 가상의 인물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정지용(1902~1950) 시인을 직접 만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 말미에 ‘정지용 서문을 붙여 윤동주 시집이 간행되다’라고 나오지요.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1936년 《정지용 시집》을 정독하고 정지용 시인을 흠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두 분의 인연은 윤동주 시인 사후에 비로소 이뤄집니다. 1947년 2월13일 경향신문에 ‘쉽게 씌여진 시’가 해방 이후 최초로 발표되는데 이때 정지용 시인이 소개문을 씁니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의 서문도 정지용의 것인데, 이 글 속에서 정 시인은 ‘생전에 윤동주 시인을 만난 일이 없다. 그래서 성품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몸은 건강했는지를 시집 원고를 가지고 온 시인의 동생에게 물어본다’고 적어놓았습니다. ‘누가 셔츠를 벗어달라면 그냥 벗어줍니다, 중학교 때 축구선수였습니다’가 답변이었지요.

생전에 만나지 못한 정지용과 윤동주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교분은 없었지만 일본 교토에 있는 기독교계 대학인 도시샤대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습니다. 캠퍼스 안에 두 시인의 한글 시비(詩碑)가 서 있습니다. 혹시 방문할 일이 있거든 두 분 모두를 뵙고 오세요. 6·25전쟁 중 정지용 시인이 납북되는 바람에 1955년 《시인 사후 10주기 기념 개정판》에는 정지용 시인의 서문이 빠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55년 복각판에 정지용 시인의 서문이 없는 이유입니다. 영화 말미에 숭실대 신사참배에 항의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자막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는 평양 숭실대 부설 중학부, 즉 지금의 고등학교였습니다. 1936년 3월 말 숭실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를 당합니다. 학교가 없어졌기에 시인은 애교심을 가졌던 숭실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지요. 이 무렵 용정 외가에 와 있던 동요 시인 강소천(1915~1963)과 교우합니다.

연희전문 졸업 무렵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던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습니다.

필사본 3부 가운데 외우 정병욱이 보관했던 판본만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언젠가 기회를 보아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설가 송우혜는 송몽규의 조카딸, 통기타 가수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이라는 사실도 알려 드립니다.

///장원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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