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산협의 오후
2018년 11월 25일 01시 32분  조회:3503  추천:0  작성자: 죽림

산협山峽의 오후

 

                                 윤동주

 

 

내 노래는 오히려

섧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暝想은

아- 졸려.

 

1937년 9월.




===================

윤동주 (1917.12.30. ~ 1945.2.16)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 1895-1965?), 모친 김룡(, 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아명은 해환().
 출생 전조부 윤하현(尹夏鉉) 때인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주.
  • 증조부 윤재옥(尹在玉) 때인 1886년에 함경북도 종성에서 간도의 자동(子洞 또는 紫洞)으로 이주, 조부 윤하현 때인 1900년에 명동촌으로 옮기어 살았다. 1910년에는 일가가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외삼촌 규암 김약연(金躍淵) 선생은 1899년, 역시 종성에서 명동촌으로 이주한 한학자로서 1900년대 초에 명동학교를 세우고 많은 지사를 길러낸 선각자이며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한 인물로 윤동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1917년12월 30일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아명은 해환(海煥). 당시 조부 윤하현은 개척에 의한 소지주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후에 윤동주와 함께 옥사하게 되는 고종(姑從) 송몽규(宋夢奎)는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같은 해 9월 28일에 태어났다(부친 송창희, 모친 윤신영, 아명 한범(韓範)). 송몽규와 윤동주는 유아 세례를 받았다(연도 미상). 호적상 윤동주 생년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 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대지진때 동경에 유학 중.

    12월, 누이동생 혜원(惠媛)이 출생하다.

  • 1925년(9세)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다.

    같은 학년에는 고종 송몽규, 당숙 윤영선(의사), 외사촌 김정우(시인), 문익환(목사, 시인) 같은 분들이 있었다.

  • 1927년(11세) 12월, 동생 윤일주 출생하다.
  • 1928~1930년(12세~14세)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잡지를 만들다.

    명동소학교 4학년 무렵부터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아이생활> 구독, 5학년 때에는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등사 잡지를 만들다. 그림에도 소질을 보이다.

  • 1929년(13세)외삼촌 김약연은 목사 안수를 받다.
  • 1931년(15세)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다.

    학교에서는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로 주다.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소읍인 대납자(大拉子)의 중국인 소학교 화룡 현립 제일소학교 고등과(高等科)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 1932년(16세)은진중학교에 입학하다.

    4월, 명동에서 20리 서쪽에 있는 소도시인 용정의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송몽규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윤동주의 집에서는 명동의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에 이사하다. 부친은 인쇄소를 내었으나 사업이 여의치 않았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교내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 선수로 뛰고, 교내 웅변 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을 하기도 한다.

  • 1933년(17세)4월, 동생 윤광주 출생하다.
  • 1934년(18세)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는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 1935년(19세)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다.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아명인 송한범이라는 이름으로 당선되다. 4월경, 송몽규는 가출하여 난징(남경)의 독립운동 단체로 가다.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하다(만주 학제와의 차이로 1년 늦어지다). 숭실학교 4학년에는 한 학기 전에 옮겨간 문익환이 있었다.

    10월, 숭실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 제15호에 시 ‘공상’이 최초로 인쇄화되다. 이 무렵 수학여행으로 동룡굴을 구경하다.

  • 1936년(20세)숭실학교를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다.

    3월 말,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 고향 용정(룽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다. 문익환은 같은 학교 5학년에 편입하다. 3월, 중국 남경(난징)과 제남(지난)의 독립운동 단체에 가 있던 송몽규가 고향에 돌아와 4월에서 8월까지 본적지인 웅기 경찰서에 구금, 문초를 받고 나오다. 그 후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계속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다.

    윤동주는 간도의 연길(옌지)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광명중학교 시절, 일본판 [세계문학전집]과 한국인 작가의 소설과 시를 탐독하다. [정지용 시집]을 정독하다.

    이 무렵 용정(룽징)의 외가에 와 있던 동요 시인 강소천을 만나다. 한국 문학작품을 신문과 잡지에서 스크랩하다. 이상(李箱)의 작품을 스크랩하다. 이 무렵, 부친은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나 선비형인 그에게 맞지 않았다.

  • 1937년(21세)윤동주(尹童舟)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다.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지도’(1월호), ‘무얼 먹고 사나’(3월호)를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尹童舟)란 이름으로 각기 발표하다. 동주(童舟)란 필명은 이때 처음 사용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와 휴양하던 송몽규는 용정 대성중학교(룽징중학) 4학년에 편입하다. 이 무렵 광명중학 농구 선수로 활약하다. 8월, 100부 한정판인 백석 시집 [사슴]을 완전히 베껴내다. 9월, 수학 여행으로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같은 곳을 구경하다. 이때 ‘바다’, ‘비로봉’ 2편의 시를 얻다.

    광명중학교 졸업반인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상급 학교 진학 문제로 문학을 희망하는 윤동주와 의학을 택하라는 부친과의 대립이 심해지다. 조부 윤하현의 권유로 부친이 양보하여 문과를 택하기로 하다. [영랑시집]을 정독하다.

  •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하다.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윤동주는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다. 연희전문 3학년에는 고향 은진중학을 졸업한 선배 박창해가 있었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 촉탁의 이름으로 있던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우다.

    연희전문 입학 초부터,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던 <소년>지를 매달 동생 윤일주에게 우편으로 보내다. 여름 방학에 고향 용정의 북부(감리) 교회 하계 아동 성경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이 무렵 동생들에게 태극기, 애국가, 기미독립만세, 광주 학생사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다.

     

  • 1939년(23세)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하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23), 시 ‘유언’(2.6), ‘아우의 인상화’(10.17)를 윤동주(尹東柱)와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동시 ‘산울림’을 <소년>(3월호)에 윤동주(尹童舟)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이를 계기로 <소년> 편집인인 동요시인 윤석중 씨를 만나다.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다.

    <문장>, <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다. 신문에서 한국 작가 작품을 스크랩하다. 이 무렵, 부친은 한국인 경영의 삼화물산회사의 취체역 상무로 취직하다.

     

  • 1940년(24세) 릴케발레리지드 등의 작품을 탐독한다.

    4월, 고향 광명학원 중학부 후배 장덕순,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정병욱(1922~1982)을 알게 되어 그 후 깊이 사귀다. 이화여전 구내의 협성교회에 다니며,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던 영어 성서반에 참석하다.

    이해 여름 방학, 고향 용정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에게서 ‘시전’을 배우다. 이해 무렵 릴케발레리,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는 한편, 프랑스어를 자습하다. 고향에 오면 안과 의사인 당숙 윤영선의 방에서 함께 고전 음악을 듣다. 이해(또는 다음 해) 논산, 부여 낙화암 같은 곳을 여행하다.

     

  • 1941년(25세)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다(김송 씨와는 하숙생이 됨으로써 우연히 알게 되다). 9월에, 요시찰인인 주인 김송 씨와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주목이 심하여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옮기다.

    서정주 시집 [화사집]을 즐겨 읽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본래 예정했던 시집 제목은 ‘병원’이었으나 ‘서시’가 씌어진 후 위와 같은 제목으로 바꾸었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이었다.

    같은 시고집 3부를 작성하여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하다. 오늘날 시집 그 부분의 유일한 원고가 된 것은 정병욱 보관본에 의한 것이다. 이해 말 고향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 이기고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하여 성씨를 '히라누마(平沼)'라고 '창씨'하다. 송몽규 집에서는 성씨를 '소오무라(宋村)'라고 창씨하다.

  • 1942년(26세)연희전문을 마치고 일본에 갈 때까지 1개월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나이와 경제 사정 같은 이유로 진학을 망설였으나 부친은 일본 유학을 권하다. 가계가 다소 어려워지다. 당숙 윤영선에게 서정주 시집 [화사집]과 미요시 타츠지(三好達治)의 시집 [春の岬]을 선물하며 이상의 작품 읽기를 권하다. 이 무렵 키에르케고르를 탐독하다. 용정에 돌아와 있던 박창해에게서 [퀴리부인전]의 영문 원서를 빌려 일역판과 대조하여 읽다.

    졸업증명서 등, 도일 수속을 위하여 1월 19일,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다. 1월 24일의 시작품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다. 일본에 건너가(날짜미상) 4월 2일, 도쿄 릿쿄대학(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다(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다). 일시 도쿄 한인 YMCA 숙소에 기거하다가 개인 집에 혼자 하숙하다. 학적부에 의하면 릿쿄대학 한 학기 동안 <영문학연습>과 <동양철학사> 2과목만 수강하였는데, 각기 85점, 80점을 취득하다. 릿쿄대학 시절인 4-6월의 시 작품 ‘쉽게 씌어진 詩’를 비롯한 5편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하다.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다.

    여름 방학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가다. 이 때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다. 방학 도중 도호쿠 제국대학 입학을 목표로 다시 도일하였으나 10월 1일 교토 도시샤 대학(동지사대학) 영문학과 선과에 입학하여 교토시 사교구 타나카타카하라 마을(京都市 左京區 田中高原町) 27, 타케다(武田) 아파트에서 하숙 생활을 하다. 봄에 교토제국대학에 와 있던 송몽규는 사교구 키타시라카와 히가시히라이 마을(左京區 北白川 東平井町) 60번지에 하숙하고 있었다. 10월 29일, 외삼촌 김약연 목사, 고향 용정에서 별세하다.

  • 1943년(27세)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1월 1일, 동경에서 온 당숙 윤영춘, 그리고 송몽규와 함께 비와호(비파호, 琵琶湖)를 구경하다. 일본 체류 중 읽은 책은 [고흐 서간집], [고흐의 생애], [다치하라 미치조우(立原道造) 시집] 같은 책들이다. 여름 방학 중인 7월 10일, 송몽규가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려고 차표를 사놓고 짐까지 부쳐놓은 윤동주도 송몽규와 같은 혐의로 검거되고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송몽규와 같은 하숙집에 있던 고희욱도 같은 날 검거되다. 윤동주와 고희욱은 학생 식당에서 두 번 가량 상면하여 인사를 나눈 정도의 사이였다.

    그 후 도쿄에서 교토의 경찰서에 면회하러 간 당숙 윤영춘은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 일역(日譯)하는 것을 목격하다.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하여 같은 장면을 목격하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이 송청(검찰청으로 넘겨짐)되다. 이해 무렵, 부친은 회사를 그만두고 양계업을 하며 10여 년 동안 다니지 않던 교회에 다시 나가다.

  • 1944년(28세)후쿠오카 형무소(복강 형무소)에 투옥되다.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윤동주는 도쿄 지방재판소의 재판 결과 1941년 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 죄로 징역 2년의 언도를 받다(구형은 3년이었다). 그중 미결 구류일 수 120일이 산입(算入)되다.

    재판장 이시이 히라오(石井平雄) 외 판사 2인. 이 재판 결과는 4월 1일 확정되다. 4월 13일, 송몽규는 재판 결과 윤동주와 같은 죄목으로 역시 2년 형의 언도를 받다(구형 3년). 미결 구류 일수 산입되지 않다. 재판장 코니시 노부하루(小西宣治) 외 판사 2인. 이 재판 결과는 4월 17일 확정되다. 윤동주,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다(날짜미상). 수감된 후 고향에의 서신으로는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고향 집에 부탁하여 보내진 [영화대조 신약성서(일문으로 번역된 신약성서, 英和對照 新約聖書)]를 옥중에서 읽다.

     

  • 1945년(29세)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 사망하다.

    2월에 엽서는 오지 않고 중순이 지난 18일에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トウチユウシボウシタイタイトリニコイ)>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어 윤동주의 사망이 알려지다. 부친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 인수차 일본으로 떠난 후,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규슈제국대학(구주제대, 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요지의, 고인 생존시에 보낸 형식의 우편 통지서가 뒤늦게 고향집에 배달되다.

    일본에 도착한 부친과 당숙은 송몽규를 먼저 면회하다. 그로부터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듣다. 그는 매우 여위어 있었다.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일본인 간수가 말하다. 형무소측에서는 운명 시간이 오전 3시 36분임을 알려주다.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방부제를 사용하여 윤동주의 시신은 생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유해는 화장하여 고향에 모셔와 3월 6일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묻히다. 장례식에서는 <문우> 지에 발표되었던 ‘우물속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다. 3월 10일, 송몽규도 옥사하다. 그의 부친에 의해 시신이 인수되어 고향인 대납자(大拉子)에 묻히다. 이해 단오 무렵, 윤동주 묘소에 <詩人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의 묘)>라는 비석을 가족들이 세우다. 8월 15일, 윤동주, 송몽규 사망한 지 반 년 만에 일제가 패망함으로 해방이 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 연보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타임라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730 윤동주묘 발견 당시 "묘비는 제대로 서있었다"... 2017-09-15 0 2120
729 시의 재료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2017-09-15 0 2029
728 미국 시적 스타일 실험영화 감독, 시인 - 제임스 브로톤 2017-09-15 0 3182
727 미국 실험영화 감독, 시인 - 크리스토퍼 맥클레인 2017-09-15 0 2815
726 미국 비트시인 - 코소 2017-09-15 0 3086
725 미국 시인 비트운동의 지도자 - 케루악 2017-09-15 0 2992
724 [시문학소사전] - "비트"문학이란?... 2017-09-15 0 3413
723 만약 당신과 함께 지구별 한 골목에서 세탁소를 연다면... 2017-09-14 0 3242
722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2017-09-14 0 2242
721 시인은 시에서 때론 목소리를 낮출줄도 알아야 한다... 2017-09-14 0 1895
720 이상시인 문학의 매력은 "모호함"... 2017-09-14 0 2044
719 "윤동주 전문가" - 마광수님 2017-09-14 0 1993
718 마광수님은 "값비싼 대가"로 통시적 진실를 치렀다... 2017-09-14 0 2019
717 시쓰기는 남자가 녀자를, 녀자가 남자를 꼬시는것과 같다... 2017-09-13 0 2302
716 시를 쓰는것은 집을 짓는것과 같다... 2017-09-13 0 2017
715 "윤동주는 기적, 우리 문학 축복"="윤동주처럼 멋진 시인이 꿈" 2017-09-12 0 2154
714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의 "패, 경, 옥"은 "페이, 징, 위"로... 2017-09-12 0 2383
713 "600년보다 더 길고 긴 60년"... 2017-09-11 0 1899
712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다"... 2017-09-09 0 2010
711 마광수님과 "대추 한알" 2017-09-09 0 2576
710 마광수님의 자유로운 령혼과 죽음앞에서... 2017-09-09 0 2176
709 "시대의 狂人" - 마광수님은 시인이였다... 2017-09-09 0 2238
708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글은 쉽게 써내는것 명문장이야... 2017-09-09 0 2161
707 {쟁명} - 동시도 "하이퍼동시"로 쓸수 없다?... 있다!... 2017-09-08 0 1903
706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은 '엄마의 젖강'인것을"... 2017-09-08 0 1792
705 "시인"을 마음대로 사고 파는것은 절대 용납할수 없다... 2017-09-08 0 1944
704 진정한 프로시인은 내용과 형식을 절제, 일치하게 쓰는 시인... 2017-09-07 0 2207
703 시는 운률도 적절히 살리고 여백의 미도 적당히 활용할줄도... 2017-09-07 0 2261
702 "문단의 이단아" 마광수님은 항상 "자유인"이 되고싶어 했다... 2017-09-07 0 2177
701 "별것도 아닌 인생"길에서 미술도 열심히 좋아했던 마광수님 2017-09-07 0 2239
700 마광수,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2017-09-07 0 3636
699 마광수-국문학 력사상 처음으로 윤동주시인의 모든 시를 분석 2017-09-07 0 3766
698 구수한 "배추국"과 마광수님의 "배출구"는 어디?!... 2017-09-07 0 2152
697 "솔직한 시인" 윤동주와 "부끄러움" 찾아낸 마광수 2017-09-07 0 2309
696 시교육은 권위주의적인 주입식 일방적 통로와 결별해야... 2017-09-04 0 2252
695 독일 시인 - 베르톨트 브레히트 2017-09-03 0 3676
694 시인들이여, "낯설게 하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왔을가... 2017-09-03 0 3715
693 "가져오기주의"와 "받아먹기주의"와 그리고 "민족적인것주의" 2017-09-02 0 1981
692 동시의 예술은 오로지 이미지변형, 그 표준;- 하하하 없단다... 2017-09-02 0 2041
691 시에서 낯설음의 이미지용법은 곧 시적 해방이며 자유이다... 2017-09-02 0 2170
‹처음  이전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