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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일본 사람들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의 ‘비에도 지지 않고 한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다’라는 시를 떠올리며 인생을 생각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눈보라와 여름철 더위에도 지지 않는/튼튼한 몸을 가지며/욕심은 없고/결코 화내지 아니하며/늘 조용히 웃고 있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된장과 약간의 나물을 먹으며/이 세상 모든 셈에서 자신은 계산에 넣지 않으며/잘 보고 듣고 이해하며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초가집에 살며/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 주고/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 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냉랭한 여름에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모두에게 얼간이 소리를 들으며/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 시는 숱한 역경을 견뎌낸 미야자와 자신의 경험을 적어 내려간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의 실제 모델은 사이토 소지로(?藤宗次?)라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이토는 1887년 도호쿠(東北)지방의 이와테(岩手)현 하나마키(花卷)에서 승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소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크리스천이 됐다. 당시 일본에서 기독교는 ‘야소교’(耶蘇敎)로 불리며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사이토도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만으로 돌에 맞기도 했다. 부모는 그와 의절했으며, 교사도 그만둬야 했다. 이뿐이 아니다. 근처에서 불이 났을 때 전혀 관련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가족에게 물을 뿌리고 집을 부서뜨렸다. 이때 아홉 살이던 큰딸이 예수쟁이의 딸이라는 이유로 배를 걷어차여 복막염으로 죽기까지 했다.
보통 이 정도 끔찍한 박해를 받으면 조금이라도 박해가 덜한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토는 오히려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틈틈이 시간을 내 아픈 사람을 위해 병문안을 가고 그들을 위로해주면서 기도했다.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쉬지 않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얼간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1926년 그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의 인연으로 하나마키를 떠나 도쿄로 오게 된다. 하나마키를 떠나던 날 배웅하러 나오는 사람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역에는 촌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 교사, 학생, 승려, 일반인, 걸인까지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로 인해 역장은 정차시간을 연장해 기차가 플랫폼을 떠날 때까지 서행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날 배웅하러 모인 사람 중에 미야자와가 있었다.
일본에서 기독교는 지금도 소수 종파이지만 이전에는 이교(異敎)의 종교로 인식돼 심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봉사하고, 실천한 사이토와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소금이 돼 일본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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