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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 <십자가(十字架)> 해석을 논박함
1. 문제제기의 이유
윤동주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을 들라면 <십자가><자화상><서시>일 것이다. 그 다음에 <쉽게 쓰여진 시><별 헤는 밤><또 다른 고향><참회록>이 되리라 본다. 특히 <십자가十字架><자화상自畵像><서시序詩>는 이른바 그의 3대 명시라고 말할 수 있기에 한국명시선이나 학교 교과서 등등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고 있는 단골 메뉴이다.
그런 만큼 이런 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 왔고,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감상이나 문학교육의 차원에서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혹여 잘못된 해석이 있다면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근래에 필자는 인터넷 ‘지식정보’ 창에 들어가 이것저것 점검해 보다 우연히 윤동주 시 해설 몇 가지를 보게 되었는데 곧바로 <십자가>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스런 마음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해설용 명시선과 일부의 윤동주론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하나같이 잘못된 해석이 판에 박은 듯 재생산되고 있다.
그 문제의 해석 부분이 바로 ‘괴로왔든 사나이’(원본 그대로)와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일인이 아닌 것이 마치 동일인인 양 앞질러 널리 유통되고 있다면, 적어도 이 시를 보는 나의 견지에서는 그것은 마치 불환지폐가 태환지폐를 대신하는 형국이고 또 가짜 불량상품이 정상품을 압도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에 문제제기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2. 문제 부분의 두 관점
지금까지 발표된 윤동주에 관한 연구나 평론은 너무나 많다.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와 더불어 단연 수위급에 속한다. 웬만한 일선 평론가치고 또 웬만한 현대시 담당 교수치고, 그를 언급해 보거나 논해 보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에 관한 본격적인 접근은 1950년대의 고석규를 필두로 하여, 1660년대에 이상비, 최홍규, 이유식, 김열규., 김종길, 김상선 등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어 1970년대에는 김현자, 이건청, 정현종, 백승철, 김인환,김윤식, 김흥규, 박진환, 홍기삼, 김용직, 정한모, 오세영, 김우종, 임헌영, 김우창, 신동욱 등에 의해 가히 봇물을 만난 듯 쏟아져 나와 더러는 재해석이나 보충 ․ 보완되기도 했다. 그 다음, 198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논문이나 평론은 크게 보아 1960년대나 1970년대의 그 연장선상의 반복이거나 그 짜깁기라 보아 무방하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꼭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직접적인 충동은 나 자신이 윤동주 연구사나 비평사의 그 초창기에 윤동주론을 써 보았고 또 그 글에서 문제의 <십자가十字架>란 시를 다루어 보았기 때문이다. 1963년도 『현대문학』지 10월호에 발표된 <아웃사이더적 인간상>이란 제목의 평론에서이다. 그 당시 발표되는 평론으로서는 제법 긴 편에 속했는데 200자 원고지로 약 80-90매 분량이었고, 또 윤동주론으로서는 최초의 긴 글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윤동주 시의 여러 특징을 통해 이것이 바로 이 계통의 최초의 접근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그의 내면세계를 살펴보았는데, 이 중 ‘아웃사이더의 자세’란 항에서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십자가十字架>란 시를 그 예증 중의 하나로 인용해 가며 설명해 보았다.
거기서 나는 4연 1행과 2행 즉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가 동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서 ‘괴로왔든 사나이’를 윤동주 자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나 해석은 그 후 상당기간 공감대가 형성되어 유효성을 얻었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1970년대의 몇몇 평론에서 새로운 관점 같은 다른 해석이 나오자 그만 그 시와 관련 있는 일부의 어떤 글, 어떤 해설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 필자들이 대부분 유력한 대학의 교수인지라 특히 시험과 연관 있는 문학교육현장에서는 그 전파력이 불을 보는 듯 했다.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를 동일인으로 보아 소가 웃을 일이지만 심지어 그 수사적 기법까지 논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괴로왔든 사나이’였지만 인류의 죄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큰 오류이다.
3. 동일인이 아닌 이유
먼저 2004년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원본대조 윤동주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원본을 소개해 두는 것이 순서일 상 싶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가요.
種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
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기에 구태여 구차스런 해설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신 이 글의 진행을 위해 주제와 구성법만은 간단히 언급해 두기로 하겠다. 주제는 민족고난을 짊어져 보고자 하는 자기희생의 다짐이고, 구성면을 보면 1연과 2연은 교회당 꼭대기에 첨탑 위에 걸려 있는 ‘햇빛’(민족광복)에 대한 동경, 3연은 현실(주어진 상황)에 뛰어들지 못하고 배회만 하고 있는 망설임, 4연은 예수를 모델로 해 생각해 본 희생양 실천(행동) 에 대한 부러움, 5연은 민족구원을 위한 자기희생의 결의 표백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4연 해석이다. 동일인이 아니라 ‘괴로왔든 사나이’인 시인 자신과 ‘행복한 예수’가 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일인이란 해석의 문제 발단은 아마도 ‘괴로왔든 사나이’란 표현이 과거형으로 되어 있기에 역시 과거의 인물인 예수와 동일시해 버린 데서 연유되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괴로운 사나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었거나 또 아니면 이에다가 ‘행복한’까지 ‘행복했던’으로 되었다면, 시인 자신과 예수는 별개의 인물이란 점이 명명백백해져 이런 문제의 불씨는 아예 없었으리라 쉽게 가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동일인이 아니라는 반증을 하나하나 들어보기로 하겠다.
첫째, 민족광복의 상징일 수도 있는 ‘햇빛’이 교회당 첨탑 위 십자가에 걸리어 있는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감히 행동할 수 없고 또 그러다 보니 아웃사이더로서 상황 밖에서 무위롭게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 보니 행동의 양심과 자기의 나약함 사이에서 강한 갈등이 생겨 마음이 무척 괴롭고 괴로웠다. 3연 끝행 즉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에 쉼표(,)가 찍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쉼표란 생각이나 사고의 진행을 잠시 휴지시켜 주며 시간경과를 암시도 하는 만큼 노상 현재의 상황에 뛰어들지 못하고 서성거리고만 있다 보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겠다.
그러자 문득 예수 ․ 그리스도가 떠오르자 용감하게도 행동실천을 못하는 불행한 자기를 ‘괴로왔든 사나이’라고 낮추면서 반대로 직접 행동으로 희생양이 된 예수를 ‘행복한’ 사람으로 보며, 자기에게도 허락만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해 보겠다는 다짐을 해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윤동주는 자기 자신을 객체화 내지 객관화 시켜 ‘나’라는 표현 대신 ‘젊은이’ 이나 아니면 ‘사나이’로 바꾸어 표현하는 관습이 더러 있다는 사실이다.
1937년도 작인 <비애悲哀>의 끝연에서 자기 심정을 “아- 이 젊은이는/피라미드처럼 슬프구나”라고 하고 있으며 또 산문 <별똥 떨어진 데>(작품연도 없음)를 보면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라고 객체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1938년도 작인 <가로수> 끝연에서는 ‘젊은이’ 대신 자기를 ‘사나이’로 지칭하고 있으며, 또 동년 작으로 되어 있는 산문 <달을 쏘다>에는 ‘서러운 사나이’로 보기도 했고, 1939년도 작인<자화상自畵像>에서는 익히 알다시피 ‘사나이’란 표현이 무려 7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1940년도 작인 <위로慰勞>에서도 역시 자기를 ‘젊은 사나이’ ‘이 사나이’로 객체화 시켰다.
따라서 ‘젊은이’나 ‘사나이’란 자기 객체화의 이런 습관은 역시 1941년도 작인 <십자가十字架>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확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연성의 논리다.
셋째,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그 겸손성을 미루어 보아 예수는 그에겐 가히 초월적, 신적 존재로 느껴졌으리라 본다. 더욱이나 그 흔한 이름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예수 ․ 그리스도’란 극존칭을 쓰고 있는 그 심상적 정황으로 보아 25실의 새파란 젊은 청년시인으로서 감히 불경스럽게도 예수를 ‘괴로왔든 사나이’라고 표현할 리는 없다.
넷째, 인용한 원본을 보면 과로왔든 사나이‘에 쉼표(,)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나오면서 어느 사이에 쉼표가 그만 없어진 경우가 많다.
대체로 동일인을 나타내는 동격일 경우라면 쉼표를 찍지 않는 것이 관례다. 쉼표가 있다는 것은 곧 다음 행의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와 구별의 간격을 두고 보자는 휴지(休止)의 의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4연과 5연을 자연스러운 문맥 흐름에 따라 일반 산문으로 풀어 써 본다면 두 가지 문장이 가능해진다. “괴로왔든 사나이인 나에게도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서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 ․ (중략) ․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가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괴로왔든 사나이’가 주어가 되어 ‘흘리겠습니다’로 끝나는 형태다.이를 시로 압축시키려다 보니 ‘〜에게도’이나 ‘〜는’이란 조사 대신 곧 바로 쉼표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그러니 동일인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또 한 가지 더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1939년도 작인 <소년少年>이란 시에서 동격을 표시하기 위해“사랑하는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라며 줄표(-)를 썼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문장 부호 넣기 관행으로 미루어 볼 때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를 동일인으로 보았다면, 아예 쉼표가 없거나 아니면 줄표라도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쉼표가 나보란 듯이 버티고 있으니 이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섯째, 다소 견강부회란 느낌은 있지만 산문문장의 논리로 보아 예수를 한때 ‘괴로왔든 사나이’로 보고 또 그렇게 표현했다면, 바로 뒤에 나오는 수식어 ‘행복한’도 당연히 ‘행복했던’이 되어야 이치에 맞다. 그렇지 않으면 별개 인물의 설정이라고 추리해 볼 수도 있다.
여섯째, ‘괴로웠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를 동일 인물로 본다면, 이 시에서는 이른바 시적 자아가 과연 누구인지 불분명해진다. 물론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 화자로서 작품의 이면에 숨어 말하고 있는 ‘함축적 자아’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마치 나르시스처럼 자기 존재성이나 정체성을 두고 늘 깊이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자기애적인 자성적인 체질성을 보아 그의 시 곳곳에 나오는 시적자아인 ‘나’를 대신해 보는 객체로서 ‘사나이’를 폐기처분할 리가 없다.
일곱째. ‘문체는 인간이다’라는 말이 있듯 윤동주의 성격이나 또 그의 시집에 나타나 있는 수사상의 취향으로 보아 ‘괴로왔든 사나이’를 금세 대칭해서 ‘행복한’ 사람으로 바꾸는 전화적 역설을 구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나 여러 작품에서 자기를 ‘괴로워’하거나 ‘괴로운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가. <거리에서>(1935)에서는 걷고 있는 거리가 ‘괴롬의 거리’로 비춰졌고, <산골물>(1939)에서는 자기를 스스로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라고 탄식적으로 영탄해 보고 있으며, <십자가十字架>를 5월에 쓰고, 바로 6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에 쓴 너무나도 유명한 <서시序詩>에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해의 <흰 그림자>(1942)에서는 ‘괴로운 수 많은 나’임을 자가진단도 하고 있다.
그러니 <十字架>가 쓰여진 시기, 그 이전과 이후 작품에 나타난 ‘괴롭다’는 말의 사용 빈도수를 참고해 보아 <十字架>에서 자기를 ‘괴로왔든 사나이’로 표현해 본 것은 시인의 표현 관행으로 보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겠다.
여덟째, 이 시를 쓸 당시 시인은 이런 논란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겠지만,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면 4연의 첫 행에 나오는 ‘괴로왔든 사나이’를 3연 끝에다 배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동일인이 아니라는 점은 명명백배하다.
그런데 짐작컨대 같은 연인 4연에다 ‘괴로왔든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를 나란히 배치해 본 시인의 의도는 대비의 효과를 예각화 시켜 보자는 의도이다. 동시에 의미단위의 문맥 흐름으로 보아 4연과 5연이 한 문장임인 만큼 ‘괴로왔든 사나이’가 주체(주어)가 되어 이번 행위의 전체를 지배시키려 한 의도였다고 짐작이 된다. 만약, ‘괴로왔든 사나이’를 3연에다 배치했다면 화자인 주체자가 문맥적 행위의 현장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우려의 배려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4.맺는 말을 남기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물론 성경 해석상의 오류가 아니고 번역상의 오류이긴 하지만, 마태복음 19장 24절과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말이 문득 떠 올랐다. 일반화 된 통용비유가 연구가들에 의해 결국 오류 번역 부분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성경사본 중 아랍어 사본을 보면 ‘밧줄’ 즉 gamta로 나와 있는데 번역 과정에서 이를 그만 ‘낙타’ 즉 gamla로 잘못 보았고, 또 가장 오래된 헬라어(희랍어) 고사본을 보더라도 ‘밧줄’ 즉 kamilos로 되어 있는데 실수로 ‘낙타’ 즉 kamelos로 보았다는 것이다. 아랍어 철자에서는 ‘t’를 ‘l’로 잘못 본 셈이고, 헬라어 철자에서‘i’를 ‘e’로 잘못 보아 ‘밧줄’이 그만 ‘낙타’로 둔갑되어 사람들의 입에 항상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연상작용에 의한 언어의 친화성의 결합원리로 보아 ‘바늘귀’에 ‘낙타’가 연상되기보다는 실보다는 수백 배나 굵은 ‘밧줄’이 나온다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진 않았다.
결국 나의 바람도 성경의 오류가 이처럼 바로 잡히듯이, 노파심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글로 인해 잘못된 해석이 하루 속히 바로 잡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불란서 속담에 ‘빠뉘르쥬의 양洋 떼'란 말이 있다. 영문 모르고 무조건 남의 뒤를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 속담이 나오게 된 배경이 아주 재미있어 덤으로라도 소개해 볼 만하다. 16세기 불란서 작가 라블레(라브레르)의 작품《빵따그뤼엘르》제 3권의 한 대목에서 유래된 말이다.
빠뉘르쥬라는 이름의 건달이 거인 빵따그뤼엘르라는 사람의 부하가 되어 항해하던 중, 하도 심심해서 장난을 친다. 동승한 양洋 상인을 좀 골려 보자는 속셈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흥정의 열띤 설왕설래가 있은 다음, 그래 어디 맛 좀 보라는 식의 계략을 하나 생각해 내어 그 중 제일 크고 힘이 센 양 두 마리를 엄청난 값을 쳐주고 산다. 일부러 품에 안아본 그 양이 놀라 시끄럽게 울어대니 다른 양들도 따라 울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러자 빠뉘르쥬는 이때다 싶어 그만 그 양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었다. 웬걸 그 뒤를 따르는 양떼가 하나같이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주인은 혼비백산하여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 마지막 남은 양 한 마리를 부둥켜안은 채 그만 바다로 떨어지고 만다. 이 우화 같은 대목에서 유래된 속담이 곧 바로‘빠뉘르쥬의 양떼’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일부러 이 속담을 인유해 보는 의도는 벌써 짐작은 되었겠지만 <十字架>의 잘못된 해석이 앞으로 잘못으로 판명이 되고, 판명이 나더라도 노상 잘못된 해석을 계속 정설로 받아들일까 보아 내 나름의 노파심에서 그 타산지석의 교훈도 겸해 소개해 보는 것이다.
※본문 중 논박 여덟 번째는 발표 이후에 보충해 본 것임.
『월간문학』(2009년 4월호)
윤동쥬*尹東柱)북간도 동명촌 출생(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
아명은 해환 海煥 연세 전문학과 문과 졸업, 1939년 연희 전문 2학년 재학중에
『소년』지에 작품 발표하며 등단 일본 릿쿄대학 도시시 대학 수학
1943년 여름방학 대 귀국 직전 독립운동가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복역 중 옥사, 일제의 관헌에게 고문 당한 뒤 사마한 것을 추정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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