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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세 권의 시집 ◇ 정지용과 윤동주와 ‘카톨릭소년’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시를 써두기만 하고 발표를 거의 안 했던 그로서는 이 잡지가 중요한 발표 지면이었던 셈이다. 이 잡지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에 의해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만주에서 발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만주 옌지(延吉)에 가톨릭 교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 다니던 정지용은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성당에서 천주교 입교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프란치스코였고, 중국식 표기인 방지거(方濟各)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돌아온 정지용은 천주교 종현(鍾峴) 성당 청년회 총무를 맡았다. 1933년에는 천주교 전국 5개 교구(옌지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 ‘카톨릭청년’의 문예란 편집을 맡게 되었다. 편집위원은 윤형중 신부를 비롯하여 장면, 장발, 정지용으로 구성되었고, 주간은 이동구였다. 필진은 이병기, 정지용, 이상, 신석정, 이태준, 김기림, 김억, 조운, 유치환, 김동리, 박태원, 김소운, 이효상 등이었다. 정지용은 카톨릭청년 문예란에 이병기의 ‘조선어강좌’를 연재하였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상(李箱)의 시편을 처음 싣기도 했다. 처음에 그림과 숫자로만 시를 썼던 이상은, 이 지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꽃나무’ ‘이런 시(詩)’ 등 의젓한 한글 시편을 발표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회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정지용의 신앙은 더욱 고양되어 1937년 성프란치스코회 재속(在俗) 회원으로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지용은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과 착의식에 참석하였는데, 한창우는 나중에 경향신문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정지용은 일제 말기에 부천 소사로 이사하여 천주교 공소 신자로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의 애독자이자 투고자로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매체들에 의해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지용은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정음사, 1948년) 서(序)에서 윤동주의 신앙시 ‘십자가’를 정성스레 인용할 정도로, 두 사람은 신앙이라는 공통항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 주간도 물러나고, 이화여대 교수도 사퇴한 후 녹번동 한 초가에 은둔하다가 정지용은 홀연히 북으로 떠나갔다. ◇‘정지용시집’과 정음사와 윤동주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지만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가 정지용을 찾아갔을 때 정지용이 일본 유학을 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윤동주가 정지용을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하게 되었고, 시집 초판에 감동적인 서문을 씀으로써 도시샤대 선후배로서의 인연을 완성한다. 그리고 정지용의 월북 후 만들어진 윤동주 시집 재판은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년)의 배열을 그대로 따랐다. 북으로 간 강처중이 아니라, 시인의 아우인 윤일주와 후배인 정병욱의 편집 결과였다. 박용철에 의해 만들어진 정지용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최근작, 2부 초기 시편, 3부 동요·동시, 4부 신앙시, 5부 산문시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정음사, 1955년 2월 16일) 역시 1부 자필시고, 2부 도쿄(東京) 시편, 3부 연대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군(群), 4부 동요, 5부 산문으로 배열했다. 윤일주와 정병욱이 이 시집을 편집했을 때 정지용시집을 깊이 참고했으리라. 이 시집을 출간한 정음사(正音社)는 1928년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가 창설하여,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는 출판 활동을 벌여온 출판사이다. 정음사에서는 외솔의 ‘우리말본’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도 꾸준하게 한글 관련 책을 출간하였다. 바로 그 출판사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사상불온, 독립운동’ 죄목으로 싸늘하게 옥사한 비극적 청년 시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최현배의 아들로서, 양정고보와 연희전문 문과를 나왔고, 조선일보 출판부에 들어가 ‘소년’ 편집을 하기도 했고, ‘삼사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하였고, 정음사 사장을 지내면서 윤동주 유고시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지용과 강처중, 최영해, 한창우 등이 결속하여 윤동주의 유고 시편을 발표하고 시집을 발행하는 동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연희전문-경향신문-정음사’의 동선과 그대로 겹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윤동주는 정지용시집을 소장하게 된 날짜를 1936년 3월 19일로 시집 내지에 감격적으로 기록하였다. 정지용 시는 윤동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후배 예컨대 신석정, 이상, 임화, 청록파 등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감염된 어떤 수원(水源)이자 정전(正典) 역할을 했다. 마치 근대 초기에 시인들이 모두 김억의 번역 스타일을 따라 하자 춘원 이광수가 “전부 ‘오뇌의 무도’화(化) 하였다”고 말한 현상이 1930년대에 정지용 모방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별히 윤동주에게는 정지용 영향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정지용시집은 윤동주 습작 시절의 교과서였던 셈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맥락 그런데 이 재판 시집은 사실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반 때 자신의 시편 가운데 18편을 정선하고, 마지막에 1941년 11월 20일 날짜로 시집의 서시를 써서, 모두 19편으로 만들어 원고지에 정서해 묶은 것이다. 비록 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1941년 11∼12월에 완성된 윤동주 자선 친필 시고가 온전한 제목으로서의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인 셈이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이 원본 시고가 남아, 훗날 일반에게 공개되어 친필 전집의 자양이 된 것이다. 이어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 글과 함께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詩’가 최초로 발표되었고, 1948년 1월에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과 유영의 추도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을 간행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두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이 시집 표지는 파란색으로 더 유명하지만, 초간본 겉표지는 사실 갈색이었다.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인 최동식(전 고려대 화학과 교수)은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초간본을 헌정하려 했으나 제작이 늦어져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꾸민 뒤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가져갔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즉 벽지로 표지를 제본한 ‘갈색’ 시집 10권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윤동주의 최초 시집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48년 3월에 초판본 1000부가 파란색 표지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19편만 그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윤동주의 뜻을 존중한다면, 시집 전체 제목은 ‘윤동주시집’ 정도로 하고 1부 19편을 원래 시집 제목으로, 그리고 나머지 12편을 다른 소제목을 달아 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밋밋하게 윤동주시집으로 했다면 대중들의 호응은 훨씬 덜했을 것이니, 윤동주 시집 제목은 역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이후 1948년 12월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습작 노트를 가지고 북간도에서 서울로 이주하였다. 1953년 7월 15일 정병욱이 ‘연희춘추’에 ‘고 윤동주 형의 추억’을 썼고, 1953년 9월에는 윤동주에 대한 최초 비평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쓰였다. 1955년 2월에는 시인의 10주기를 기려 시 89편과 산문 4편을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을 정음사에서 펴냈는데, 이때 초판본에 실렸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은 제외되었다. 편집은 정병욱과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는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앞에서 말한 정지용시집 편제를 따른 바로 그 시집이다. 그리고 1967년 2월에는 백철, 박두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새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대중 보급판이 완료된 셈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 안으로 제국과 식민, 기억과 망각,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흔적이 흘러간다. 그 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의 맥락과 구성까지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습작과 완성작, 진정한 윤동주 정전을 위하여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 들어간 이후 죽을 때까지 학생 신분으로만 있었다.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견지하면서, 선행 명편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표현이나 사유에서 자신의 시적 좌표를 정성스레 찾아갔다. 마치 서양화 그리는 학생이 데생 연습을 반복하면서 어떤 상(像)을 그려가듯이, 윤동주는 선배들의 빛나는 성과에 힘입어 자신의 시상(詩想)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간 것이다. 그 대상은 정지용, 김광섭, 이상, 백석, 이용악 등에 두루 걸쳐 있다. 특별히 정지용의 압도적 영향 아래 여러 편의 습작들을 써두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자신이 마지막 정리한 친필 시고에서 정지용 모작들을 모두 뺌으로써, 그것들이 학생 시절 습작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남긴 노트의 습작들을 인용하면서 그가 엄선한 작품들과 등가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 심지어 그것을 예로 들어 윤동주 시의 결함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전혀 온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윤동주가 최종적으로 갈무리한 19편을 일단 윤동주 정선(精選)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 나머지는 섬세하게 실증적 위상을 따져 윤동주의 ‘습작’과 ‘완성작’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오랜 습작기를 거쳐 진정한 ‘시인’에 이르게 된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문화일보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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