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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윤동주에게는 완전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은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재일유학생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영원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울러 친구에 대한 굳은 의리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까지 퇴색시킬 수 있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이었던 강처중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꽃피웠고, 재가 되어버린 윤동주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원고와 그의 장서,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속까지 죄다 보관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시인의 생생한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던 5편의 시를 공개함으로써 윤동주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1947년의 소란스런 해방공간에서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봉직하면서 무명시인 윤동주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안에 있던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가운데 12편을 추려내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정음사 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발간했다.
그 후 강처중은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반 남로당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 영향으로 학계에서도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에서 그를 제외함으로써 절름발이 논문을 자초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탄압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옥사했다면 강처중은 그처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강처중은 1916년생으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보급과 문맹타파에 헌신했음은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시작된 브나로드운동은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했던 14세의 장준하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년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당대의 수재였음에 분명한 강처중 역시 솔선수범하여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애초에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소년 강처중으로서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뉴스였다.
당시 강처중은 방학기간인 8월 2일부터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의 고평역에서 100여 명의 농민들에게 한글, 일용계수법, 성경, 지리, 역사, 유희, 창가, 체조, 동화 등을 가르쳤다.
책임대원이었던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처중 자신은 한글을 가르쳤고, 다른 과정은 여러 동지와 타처에서 피서 온 학생들이 가르쳤다. 그 결과 한글과 일용계수법을 해득한 사람이 20명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은 학생하기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강처중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대원으로서 북성면 문평리에서 남녀 7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다.
강처중은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했다. 당시 송몽규는 문과 별과에 합격하여 동급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뒤틀린 심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풍자적인 면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이름을 신농처중(神農處重)이라고 지어 학적부에 올렸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심하지 않냐고 타박하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본래 강(姜)씨였으니 거리낄 게 무어냐며 되받아쳤다.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그때 평자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 실감이 없었다고 혹평했고, 특히 글에 설명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매사에 앞장섰던 그는 4학년 때 연전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문예부장인 송몽규와 함께 잡지 《문우》를 발간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잡지는 최종호가 되었으며,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문우회까지 해산의 비운을 겪는다.
후배 장덕순의 회고에 의하면 그 무렵 강처중은 연희동 산기슭을 산책하다가 개울가에서 뱀을 사로잡은 뒤 자신에게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 제일 독한 종자가 바로 뱀이다. 동물은 보통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뱀은 먹이를 받아먹기는 하면서도 전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열정이 압제에 눌리고 패배감만 안겨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옥사한 뒤 반년 만인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조카의 유품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내려와 그가 한때 묵었던 북아현동 하숙집을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남북이 좌우로 갈리고 38선으로 가로막혀 어수선한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강처중을 찾아왔다. 그러자 강처중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유품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당시 그가 전해준 윤동주의 육필 시고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였다.
첫째, 윤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기 전에 쓴 작품 가운데 시집에 넣은 19편의 작품을 제외한 시 작품. 〈팔복〉, 〈위로〉 등. 둘째, 자선시집을 엮은 뒤 새로 쓴 시 작품. 〈참회록〉, 〈간〉 등. 셋째, 일본에서 쓴 시 작품.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
1947년 2월 16일의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정병욱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출간시기는 사망 3주기인 1948년 2월 16일 이전으로 잡았다. 그 일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강처중이 도맡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간에 앞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작품을 게재했다. 정지용이 퇴사하고 난 뒤인 7월 27일자 지면에 세 번째 실린 〈소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이런 사전작업과 함께 강처중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정지용에게 유고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지용은 강처중이 데려온 윤일주로부터 윤동주와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내용을 서문에 자세히 썼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강처중이 쓴 초판본 시집의 발문에는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그리움이 아래와 같이 애타게 묘사되어 있다.
강처중은 이처럼 친구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지극한 우정을 모아 윤동주를 무명시인에서 일약 민족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대가는 참담했다.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정지용과 함께 강처중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까지 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87년 공식적으로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학계의 논문이나 학술서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용’, ‘정용’ 등으로 표기했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1일 경성의 가톨릭재단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최초의 회장은 노기남 주교, 주간은 정지용, 편집국장은 횡보 염상섭이었다. 이때 강처중은 조사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15일 정지용이 ‘여적(餘滴)’ 란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었다가 미군정 당국과 극우 단체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그와 같은 경향신문의 진보적인 성향을 주도했던 강처중은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골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27일자 2면에는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는 강처중의 흔적이 이순신과 윤동주에 대한 2편의 기사만 남아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엄령 치하였던 1953년 9월 21일 손원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정국은 간첩사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 일본 마이니치(朝日)신문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는데 해방 후 연합신문사 주일특파원, 국제신문사 편집국장 들을 지냈으며 동양통신사 및 연합신문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치안국 고위관리인 홍택희 총경을 비롯하여 언론, 정부, 국회의원까지 연루되어 국회 내에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정국은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단심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뒤 그해 12월 2일 사형이 언도받았다. 한데 1954년 1월 23일 총살형 장소로 예정된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 결국 정국은은 1955년 2월 18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미국 극동사령부의 보호 아래 일본에서 이중스파이로 활약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강처중은 남로당의 젊은 실세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군 당국은 정국은의 모든 간첩 혐의가 남로당의 상부선인 강처중의 지령에 따라 행해졌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데 작가 송우혜의 조사에 따르면 강처중은 이미 1950년에 남로당 간부였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강처중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9월 4일 강처중은 갑자기 부인 이강자 여사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건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자 실망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먹이를 주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뱀 같은 민족의 비정한 세월을 조소하면서…….
그래서일까. 그 후 남로당과 관련된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관객들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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