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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나온 첫 창작시집, 김억 「해파리의 노래」
우리 나라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은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펴낸 「오뇌의 무도」다. 1921년의 일이었다. 다음으로 나온 시집은 「기탄자리」. 이 역시 안서가 펴낸 것이다.
이 시집들은 모두 번역시를 수록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뇌의 무도」는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이자 번역시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인으로 자신이 창작한 시를 맨 먼저 시집으로 엮어 발표한 사람은 누구일까? 또 그 시집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는 역시 안서 김억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의 시집은 「해파리의 노래」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사륙판 총 162면에 83편의 창작시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첫 창작시집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이미 출간된 시집은 번역시집 두 종류뿐이었고, 창작시집도, 번역시집도 모두 안서의 이름으로 발간된 것이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한국 근대시 형성에 김억이 끼친 영향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억은 1893년생으로 평북 정주 출신이다. 같은 고향 출신인 김소월을 문단에 소개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창조> <폐허>의 동인으로 있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태서 문예신보>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처음으로 소개한 일은 유명하다.
「해파리의 노래」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192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종합잡지 월간 <개벽>을 통해 발표한 것들이었다. 이전의 시들은 시집 맨 뒤에 '부록'이라 하여 실어놓았다. 30대 초반인데 1년 남짓한 시간에 한 권 분량의 시를 썼다는 것은 대단한 창작의욕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활동했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그런 창작의욕은 그자체로 뭔가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4년. 조국은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였다. 감수성 예민한 한 지식인이 그런 시절에 토해낸 시구는 좌절과 허무, 실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런 분위기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이 시집의 권두언에서부터 나타난다.
당시의 철자로는 '다같이'가 '다갓치', '하염없이'가 '하욤업시'로 되어 있다.
권두언을 보면 시인이 시집의 제목을 왜 「해파리의 노래」라고 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그것은 곧 좌절의 시대를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 시인의 노래인 것이다. 시집에서 무심코 한 편을 읽어보아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피리'라는 작품이다.
안서는 국내에 에스페란토 어를 처음 소개하고 연구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개벽>에 에스페란토 지상 강의실을 열어 보급하는 한편 번역에도 인용했다. 그가 번역시를 쓸 때 참고했다는 외국어 중에는 '세계어·영어·일어·불어' 등이 있었는데, 이중 세계어가 바로 에스페란토 어였다.
한국 시의 발전적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던 첫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 그 시인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아직도 인명사전의 생몰년에는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은 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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