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전쟁
다섯 살 나던 해, 나는 신장염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나면,
물에 헹군 김치와 밥이 달랑 놓인 밥상을 받아 할머니와 나는 따로 식사를 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엄마가 고구마 씻은 물을 집 앞에 버리면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잽싸게 뛰어나와 고구마 꼬랑지를 주워들고
후다닥 골목길로 뛰어 들어가곤 하던 모습이었다.
난 장난삼아 한 짓일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보니 제한된 식사에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외갓집에 갔다가 밤에 자다 일어나
배가 고파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외할머니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싶어 하는 밥이나 실컷 먹이고 죽이자(?)는 마음으로
마음껏 밥을 먹게 하셨다고 했다.
다음날,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어봤는데
아 글쎄, 쌔근쌔근 숨을 쉬며 잘도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 뽀얗게 살이 오르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 들과 산으로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장이 약하게 태어났는가 봐, 나는….
사실, 하루 이틀에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1초도 쉬지 않고 박동을 하던 심장도 몰랐던 일이니 만큼….
그 전쟁은 아주 조심스럽고도 조용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혈관을 따라 돌던 혈액이 평소와는 다르게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분과 포도당이 이리저리 밀려들며
점차 그 양이 늘어나고 있었고,
하수관을 타고 쭉쭉 내려가야 하는 노폐물마저
혈관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처음 반응을 보인 곳은 얼굴이었고,
제일 먼저 눈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양쪽 볼은 사탕을 한 개씩 넣은 것처럼 불룩해져 버렸다.
약간의 시간차로 다리에도 붓기가 시작되었고,
윗배 아랫배 사정 볼 것 없이 불룩해져 왔다.
다급하다! 코의 바로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뇌하수체에 SOS를 쳤다.
호르몬 분비를 담당하고 있는 아주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다.
전엽과 중엽에서는 이상 신호가 잡히지 않는데 후엽에서는 소식이 없다.
그럼 후엽에서 문제가?
다시 한 번 후엽에 SOS를 쳤지만 신호가 미미하게 잡힐 뿐이었다.
결국, 신장이 파업을 선언한 것일까?
며칠 밤샘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등 뒤 갈비뼈 아래 신장이 자리한 곳에서
양쪽이 번갈아 가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몇 번 두들겨 주면 괜찮아졌기에 계속 작업을 하곤 했었는데.
그것이 원인이었나 보다.
내 주먹 크기만 했던 신장이
갓난아기 주먹만 하게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고 했다.
혈압이 떨어지면서 모세혈관에서 여과를 하지 못하자
아예 공장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어릴 적부터 약하던 신장이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구나!'
약으로도 달래고 조혈호르몬제 주사도 맞고.
건포도처럼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소변을 만들어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겨우 버티고 있는 신장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단 말인가.
주인이 누구여?
결국 새로운 신장으로 대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건포도 신장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주인님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괜찮구먼요…."
쌍둥이처럼 꼭 같더라는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새로운 신장은 오른쪽 골반 바로 위로 이사를 왔다.
새 신장이 이사 온 지금, 몸 안에선 한창 전쟁 중이다.
식구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처음 3년이 고비란다.
3년이 되는 올 봄엔 약 독이 심하게 올랐었고,
겨울엔 감기몸살이 지독하게 들었다.
그렇게 한고비를 겪어 넘겼나 보다.
창가에 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는 봄날의 오후.
요즘 같은 날씨에 신장도 기지개를 켜나 보다.
살 만한 걸 보니.
고맙구나.
아직도 치러야 되는 고비가 여러 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치러지는 전쟁을 방치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의 전쟁에서 많은 것을 잃고 배웠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전하는 메시지에 항상 관심을 가지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공장이 가동되는 것을 지켜본다면
꾀를 부리던 공장들도 속속 가동을 재개하리라.
오른쪽 아랫배를 살며시 만져보면 내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오는 신장.
약한 떨림마저도 따스함으로 전해져 온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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