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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젖은 두만강의 유래와 그 노래에 얽힌 사연
2008년 03월 02일 17시 14분  조회:3134  추천:89  작성자: 명상산악회
2008년 3월 1일 도문 일광산산행을 하면서 눈물젖은 두만강 기념탑을 지났습니다. 마침 이날은 3월 1일이라 비문에는 눈물젖은 두만강의 유래가 3.1독립운동이였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우연히 지나면서 다시읽게되였던 비문이지만 마침 이날도 3월 1일이라 더욱 감개무량했으니 보는 사람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뭔가 마음 한구석이 못내 슬퍼졌고 혼자서 눈물젖은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와 함께 그 유래를 여기서 올리니 독립투쟁으로 희생된 우리의 조상들을 위해 잠시나마 노래와 함께 묵례하였으면 합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유래:

1919년 조선3.1독립운동의 실패로 수많은 조선동포들은 원한을 품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연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30년대부터 도문에는 두만강나루의 착선장이 생겼는데 이 곳이 바로 나라잃고 부모처자 생리별 하던 원한의 두만강 나루터였다.  1935년 가을 북간도(연변)순회공연차로 도문에 도착한 극단<예원좌>일행이 투숙한 려관에서 밤중에 만주(동북)땅에서 반일투쟁을 하다가 살해당한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는 녀인의 애절한 호곡소리를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작곡가 리시우 선생은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음을 통탄하며 <눈물젖은 두만강>을 창작하였다. 도문 공연에서 극단의 소녀화술배우 장월성이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르게 되였는데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 절찬을 받았다. 서울에 돌아간후 시인 김룡호선생을 찾아 가사를 다듬고  가수 김정구 선행을 청하여 레코드에 취입하도록 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노래가 민간에 급격히 류행되였는데 사람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떠나간 옛님이 그리울때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였다.

연변조선족전통문화연구쎈터 정리.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에 얽힌 사연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는 독립투사 문창학의 부인인 김증손녀(당시30세)가 상해 임시정부 시절 3.1독립운동에 참가한 남편을 찾아 중국 독립군이 있다는 곳이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10여년을 찾아 다니던 어느날 두만강가에 있는 용정(도문)에서 남편 문창학씨가 이미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당시 머무르던 용정(도문)여관방에서 원망과 슬픔에 겨워 밤새도록 목놓아 통곡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에서 유랑극단 생활을 하던 작곡가 이시우씨가 옆방에서 흘려 나오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 하였다가 이튿날 여인의 사연을 알아본바 너무나 가슴 아파 그 심정을 오선지에 담았는데 작사자 김용호 선생이 노랫말을 붙이고 김정구 가수가 부른 노래가 오늘날 불멸의 노래인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이다.

독립투사 문창학씨는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출신으로 1921년2월2일 대한 군정서 김학섭의 인솔하에 소총10정,탄약150발,폭탄2개씩을 가지고 웅기항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본군경의 경계가 심하여 2월5일 신건원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고 오후8시에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일본순사를 사살하고 주재소에 폭탄2발을 투척한 후 일본군경과 교전타가 피신한 후 만주 훈춘에서 맹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1년 12월에 체포되어 압송된 후 1923년 12월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꽃다운 청춘인 41세에 사형당하였다.

그후 문창학 가족 일부는 남한으로 내려와 생활 했으나 노래의 주인공인 김증손녀의 손부인 박인경 74세 할머니가 현재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혼자 살고 있으나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만 나오면 눈물을 훔치고 있다.

눈물젖은 두만강 / 이미자


*★PARK★*


눈물젖은 두만강 / 김정구

    1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눈물젖은 두만강에 담은 민족의 애환과 독립의지

국민가요 ‘ 눈물젖은 두만강’은 1935년 여름, 악극단 예원좌의 일원으로 두만강 유역의 도문에 공연 갔던 작곡가 이시우가 만들었다. 당시 여관에서 쉬고 있던 이시우는 먼길을 찾아 와 독립군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어떤 여인의 통곡에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두만강의 정경과 여인의 통곡에서 민족의 한을 느낀 그는 멜로디가 떠올랐다. 공연 마지막 날, 소녀 가수 정성월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노래의 사연을 소개하자 공연장은 이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생의 역작을 작곡한 이시우는 이 노래를 정식 음반으로 남기고 싶어 인기 가수 김정구를 찾아갔다.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김정구는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음반 제작 허락을 받아 내고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1절밖에 없던 노래를 3절까지 완성시켜 취입을 했다. 노래가 발표되자 김정구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꼭 불러야 했을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다.

김정구는 최초의 음반사의 전속연주단인 OK 연주단과 함께 전국을 순회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OK 악극단은 북경, 상해, 만주, 일본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는 한편 이름도 조선악극단으로 변경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멤버는 작곡과 반주 박시춘ㆍ 손목인ㆍ김해송, 가수 남인수ㆍ고복수ㆍ김정구ㆍ송달협ㆍ이난영ㆍ장세정ㆍ백설희 등 가히 최강의 라인 업이었다. 당시는 남인수와 김정구의 라이벌 시대. 두 사람의 공연 후에는 항상 장안의 기생 인력거가 길게 줄을 섰다. 김정구의 한달 수입은 당시 집 2채에 해당하는 거금 1,000원에 달했다. 그가 출연했던 서울의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전신)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은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이 건물 둘레를 뱀이 또아리 틀 듯 휘감았다. 그가 종로거리를 걸으면 거리가 마비되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달리던 전차가 멈추기까지 했다.

두만강 부근 공연 때, 일본 경찰에 잡혀 남편이 옥사해 소복을 입고 있던 한 여성 관객이 사연과 함께 노래를 듣고는 두만강에 투신 자살을 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며 ‘ 눈물젖은 두만강’은 더욱 널리 불리워졌다. 이에 일제는 ‘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라는 멍에를 씌웠다. 평양 금천대좌공연 때는 ‘ 낙화삼천’을 노래하자 조선인 일본 경찰이 “ 노래가 불온하다”며 경찰서로 끌고 가 사흘동안 고문을 했다. 또한 ‘ 타향술집’에선 “ 술잔을 기울이며 외로이 우나니”라는 부분을 두고 “왜 외로이 우느냐?”며 문제 삼기도 했다. 무대 장치 가운데 태극선이라도 그려지면 무조건 문제 삼던 시절이었다. 동경 공연 때는 ‘ 유쾌한 봄소식’에서 “ 긴자의 버들이 넘실넘실”부분의 “ 넘실넘실”을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부르자 감격에 겨운 유학생들이 무대위로 올라와 그를 얼싸 안았다. 그 때문에 경찰에 끌려 가 조사를 받았지만 그의 숙소에는 유학생들이 가져 온 꽃다발이 넘쳐났다. 하지만 총독부의 강요에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독려하는 영화 ‘ 너와 나’에 백마강의 뱃사공으로 출연해 주제가 ‘ 낙화삼천’을 부르는 수모도 겪었다.

그는 일본 패망 직전인 동경에 볼모로 잡혀있던 조선 영친왕(이은)과 방자여사를 위해 열었던 아카사카 별궁 공연을 가장 잊지 못했다. 1943년, 27살의 청년 김정구는 춘천 처녀 조남진과 결혼을 해 2남 4녀를 두었다. 해방 후에도 영화 ‘ 눈물젖은 두만강’에 출연해 꺼지지 않는 인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형 용환과 함께 결성한 태평양가극단의 지방순회공연이 실패해 모든 재산을 날리는 좌절도 겪었다. 정부 수립에 이어 6ㆍ25 전쟁이 터지고 9ㆍ28 수복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날아든 두 발의 포탄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1ㆍ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풀 빵 장수를 해 연명을 했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외국 팝송과 현인, 박재홍 등 후배들에 밀려 입지를 잃어 갔다. 1961년, 한일관계가 새로운 장을 맞기 직전에 재일 동포 위문 공연을 떠나 동경을 비롯해 6개 도시 순회 공연을 열었다.

‘ 눈물젖은 두만강’, ‘ 왕서방 연서’, ‘ 바다의 교향시’ 등 700여 곡을 남긴 그는 1967년 서울시장공로상, 73년 국방부장관상에 이어 1980년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6년 2월, 퍼시픽호텔 홀리데이인 서울에서 열흘동안 대중가요 사상 최초의 회갑 기념 공연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밤무대는 물론 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서 평양 공연, 87년 미주 해외교포 위문 공연 등에 참여했다. 87년 KBS 가요대상 원로가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90년 MBC TV ‘ 토요일 토요일은 胄탓?에서는 그의 55년 가요인생에 대해 특집방송을 했다. 하지만 92년 노인성 치매로 “ 이제는 눈물젖은 두만강 가사도 깜빡 깜빡한다”며 요양차 미국으로 건너갔다. 6년 후, 병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98년 9월 25일 향년 82세로 LA에서 세상을 등졌다. 2000년 8월, 가수분과위는 두만강변에 연변조선족 전통문화연구센터를 세우고, 도문성 옛 두만강나루터에는 ‘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비 건립을 추진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개화기부터 60여년 동안 활동을 이어오며 산증인 역할을 했던 국민가수 김정구. 고 현인도 “ 스타 이전에 인간적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셨고 노래에 앞서 항상 바르고 검소한 생활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생전에 회고했었다. 그의 노래 ‘ 눈물 젖은 두만강’"은 한국 대중 음악사상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불멸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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