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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경우의 기념비( 장정일)
2017년 08월 11일 08시 41분  조회:1539  추천:2  작성자: netizin-1
종래로 본 적 없는 희귀한 평론집 한 권이 나왔다. 소설가 정세봉이 편찬한 그의 작품 관련 평론 모음집 《문학, 그 숙명의 길에서》(부제는 “정세봉과 그의 문학”)가 그 것이다.
 
작가의 행운이라 할가, 평론집을 보면 정세봉의 중단편소설은 무려 31명이나 되는 우리 문단의 작가, 평론가(약간의 기자, 연구생 망라) 그리고 한국의 평론가, 교수들의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누가 동원한 것도 아니련만 두세편 인터뷰, 창작담까지 합치면 평론은 저그만치 44편으로 분량이 가관이라 문단사적으로 봐도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개혁개방 후 중국력사의 거대한 전환기, 변혁기에 의욕적으로 분출된 정세봉소설의 그 시의적절한 주제, 생동한 인물, 신선한 기법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더불어 평론집은 감동과 론란의 중심에 자리했던 이들 작품에 대한 격찬의 목소리가 단연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개척적인 의미를 가진 초기작 단편소설 <하고 싶던 말>에서부터 대표적인 중편력작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이르기까지를 아우르며 ‘우리 시대의 뽀에마’. ‘놀라운 걸작’,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의 그런 사실주의’, ‘인간성의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라는 평가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예술특점상 ‘갈등구조의 첨예성’, ‘극적인 서사방식’, ‘비극적색채의 활용’, ‘상징과 산문수필식의 기법’을 비롯한 다양한 측면들도 다각도로 투시되고 있으며 신선하고 완숙한 필치로 ‘한 개인의 깊이 속에 내려간’(프루스트) 작가의 근작 단편소설 <고골리 숭배자>에 대한 평글도 망라되여 평론집에 력사감, 현실감,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약간한 쟁명의 글들도 있고 넓은 시각으로 부족점을 지적한 부분도 진일보한 사고와 상론의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해 보인다.
 
례컨대 농촌을 비롯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 형상화’에 대한 요청, 인물의 문제해결 방식으로서의 행동양식에서 ‘적극적인 방식보다는 소극적인 방식을 즐겨 선택’한 문제,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아직 미분화된 상태에 머물고’ 작중인물들의 행동양식이 ‘몇가지 류형으로 구분될 만큼 단순감이 없지 않다’는 점, 특히 ‘문화와 관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어필할 수 있는 감동원을 창출해 낼’ 필요성 등 지적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소설가 정세봉의 이미지를 아주 형상적으로 비유한 낱말이 하나 있다. 자갈밭을 가는 소, 즉 석전경우(石田耕牛)가 그 것이다.
 
석전경우는 워낙 농민, 무직업자였던 소설가의 한단계 인생의 어려운 처지를 지칭하면서 널리 회자된 비유어였는데 사회 말단세포에서 살며 집필활동을 했던 그런 고된 삶의 체험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사회와 인간을 읽어내는 동심같은 맑은 눈을 가지게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던 걸가, 고리끼를 방불케 하는 억척스런 독학으로 문학의 넋을 지닌 정세봉의 작품은 독자들의 상상 밖의 열렬한 사랑과 평단의 남다른 주목을 받으면서 높은 찬사와 필화직전까지의 론란을 한몸에 안았었다. 그러한 진동효과의 자초지종이 고스란히 정세봉 작품 평론집으로 탄생을 고하였으니 작가는 결과적으로 이 책 한권으로 후세에 전해질 나름의 빛나는 문학기념비를 세운 셈이다. 이름하여 석전경우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념비는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빛바랜 돌비석이 아니라 사회의 동란기, 격동기 인간의 처절한 애환을 증언하는, 령혼 세례의 무형의 기념비요, 오늘의 무수한 행인들과는 물론이거니와 해당 연구자나 후세들과도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한 정신의 기념비일 것이다.
 
여기서 석전경우는 기실 정세봉 일개인에 한정된 비유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정직한 작가시인과 예술가들의 공통의 이미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작가예술인이라면 중복이나 안주는 운명적으로 거부된다. 다사다난한 현실의 고난을 탐스러운 예술로 꽃 피우는 작가는 언제나 거칠고 낯설면서도 가슴 설레이는 새 길을 걸어가야 하는 고행승이자 행운아다.
 
자갈밭을 갈아 오아시스로 만드는 숙명 앞에서 희세의 시인 괴테는 한평생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천재작곡가 모짜르트도 이실직고한다. “사람들은 나의 예술창작이 식은 죽 먹기로 이뤄진다고 보는데 이는 틀린 생각이다. 작곡을 하면서 나처럼 대량의 시간과 심혈을 바친 사람은 없다. 내가 재삼 연구해 보지 않은 대가의 작품은 없다.”
 
여기서 나는 물러설 수 없는 벼랑끝 선택으로 석전경우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정세봉의 자세에 공감한다. 그 선택과 자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남다른 용기와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반석 같은 의지로 개괄된다. 만년에 발표작이 희소한 상황을 그의 충전기 또는 탐색기라 해도 좋고 아니면 아예 침묵기라 해도 무방하다. 휴지부가 없는 전진은 불가능하고 침묵이 없는 발언은 가볍다는 점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을 비운 채 만학의 열의을 불태우며 정신의 서식지를 찾아 동구권, 중남미와 유럽 문학명작의 바다를 항해하는 그의 항온(恒温)의 침묵은 값진 것이다. 설익은 가시적인 성과나 일시적인 허명보다는 풍부한 학식, 형이상(形而上)의 감화력을 가진 진정 문학다운 문학을 갈구하는 그의 태연자약한 침묵은 차라리 봉황열반과도 같은 변신의 몸짓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이야 리해해 주든 말든 정신의 풍요와 중후함을 위한 그의 침묵은 또한 문단과 독자들과의 긴밀한 호흡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다년간 소설가학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인 애정을 쏟으며 국내외 유능한 동포작가들을 발굴장려하고 있으며 인터넷카페 <대지>와 개인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우리 문학과 세계문학 작품들을 독자들과 폭넓게 공유한다. 문학 교류와 소통을 위해 현대기기를 다루는 칠순 작가의 기량과 집념이 경이로움과 탄복을 자아낸다. 그리고 근래의 수필집필과 단편신작은 그의 창작 사상과 기법의 변화를 예고한다고 할가.
 
진정으로 저력있는 문학을 위해서는 작가의 혈관에서 흐르는 학식과 창작적 감성의 결합이 요청된다. 정세봉이 편찬한 평론집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는 이렇게 긴 호흡으로 문학을 응시하면서 속도숭상의 부박한 세월에 대처하는 하나의 계기로 돼보여 한결 유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축적보다는 지출이 잦아 재고가 빈약한 나 역시 새삼스레 침묵의 미학에 경도되는 느낌이다. 정세봉의 침묵이 더 큰 말, 더 많은 말을 하기 위한 침묵이기를 바란다.

연변일보 2017-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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