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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이 쉽다
궁금이
아동절이다.
친구가 아침에 단체방에 문자를 올려서 이날은 어쩌다가 사이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날이라고 했다. 하긴 뢰봉아저씨가 절약을 위해 사이다 대신 랭수를 마셨다는 미담이 전해지던 때였으니 사이다도 그렇게 마음대로 먹었던 시기는 아니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는 소고기 사러 가는 날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아동절은 집에서 소탕을 끓여주는 날이였는가 본데 가정 형편이 꽤 좋았던 것 같다. 나는 흰헝겊신에 분필칠을 해서 광을 냈던 날이다.
예로부터 이날은 분명 어린이의 날인데 괜히 어른들이 덩달아 바쁜 날이다. 원래 녀성절은 남자들이 더 흥분하고 로인절은 자식들이 더 취하는 법이다.
“어느것이 얼굴이고? 어느것이 꽃이냐?”
어느해인가 고향의 6.1절 경축행사를 중계하던 아나운서의 입에서 나온 해설사다. 행사장에서 어린이들이 알록달록 색동저고리를 입고 커다란 리본을 팔랑이면서 꽃을 들고 있는 장면을 말로 생생하게 옮겨놓았다.
“와~ 저 방송원의 말이 멋있지 않습니까?”
내가 해설사를 듣는 순간 너무 흥분해서 옆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여쭤봤다.
“허~허~”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거리가 멀게 담담했다. 아버지의 이 랭정한 반응은 뭐지? 나도 저 정도의 해설사는 쓸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
나는 아버지도 동요작가여서 일정한 문필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면서도 그래도 어느것이 얼굴이고 어느것이 꽃이냐는 이 기가 막힌 표현에 덤덤한 건 겸손한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식이란 놈이 아버지가 쓴 많은 동요에는 아무런 평가가 없다가 우연하게 라지오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를 가지고 난리냐는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최근에 출판사의 편집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
“아동문학사에서 1977년-1989사이에 률문문학분야 주요 작가로 부상된 분이고 문학상도 수상했다고 적혀 있네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사”라는 책에 씌여진 아버지에 대한 평가라고 한다. 금시초문이다. 30년이 지난 뒤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아버지에 대해 재인식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아버지가 “주요 작가”였다는 평가도 처음 듣는다. 아버지가 전문 교육을 받은 분도 아니고 시골집의 작은 방에서 할아버지가 독상으로 쓰시던 밥상을 책상 삼아 창작했던 작품으로 아동문학사에까지 오를 줄을 몰랐다. 사람은 이렇게 주변의 익숙한 것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나 보다. 동시에 번듯한 책상에 컴퓨터까지 갖춰놓고 상 하나 못 타는 나는 뭔가 싶으며 아버지가 뒤늦게 돋보인다. 그리고 칭찬과 인정이 무슨 사이다값도 아니고 왜 그렇게 아껴서는 아버지를 섭섭하게 했던가 싶기도 하다.
당시 연길시 교외의 어느 마을에서 어떤 청년이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신다면서 부지런히 찾아오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가까운 연길시내에도 쟁쟁한 작가들이 많으련만 아버지한테서 뭘 배울 게 있겠다고 이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고생할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나는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건 아니고 창작과 강의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린 놈이 어른들사이에 끼여서 “저기요, 아버지한테서 뭘 배운다고 그러세요. 일찍 접는 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 여기에 실습하러 온 학생 치고 남은 학생이 없습니다.”
내가 실습을 갔을 때 그 회사의 직원 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뜻인즉 여기 와서 일정 기간 같이 있다 보면 우결함이 서서히 드러날 것이고 만약 나중에 인원을 모집한다면 우점보다는 결점이 더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와서 면접을 잘 보기보다는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하나의 결함을 이미 보여준 익숙한 사람이 더 손해라는 뜻이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점이 잘 보이고 잘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결함이 더 확대되여 보인다.
“온 여름 단 참외를 먹다가 막물에 가서 마지막 한개를 썩은 걸로 먹으면 앞에서 먹은 모든 맛을 다 버립니다.”
중학교 때 한어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잘 나가다가 하나를 잘못해서 풀잎에 손을 베이지 말고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이였다. 일상생활에서 돈을 빌려도 마찬가지다. 두번 세번 빌려주다가 네번째에 가서 못주겠다고 하면 그 앞의 세번은 그냥 없던 걸로 된다. 또 시간이 돼서 재촉을 해도 돈 몇푼 가지고 인정머리가 없다고 욕을 먹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견지를 못할 거면 아예 그런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 거절하는 당시에는 매정한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게 오히려 원래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친구사이에는 더욱 그러하다. 화장실 갈 때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고 했듯이 간절했을 때의 마음은 여유가 생긴 다음에도 그대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나는 명절 때 상사나 선배들께 인사를 할 때도 내가 이걸 쭉 견지할 수 있을지를 여러번 고민한다. 그래서 견지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다. 대신 시작을 뗐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어간다. 아니면 기다리던 사람도 실망하고 견지하지 못한 사람도 자책하게 된다.
“그 친구는 설마다 전화라도 한통 하던 게 최근에 와서는 무슨 섭섭한 일이 있는지 이제 련락을 뚝 끊었네.”
종래로 문안을 한 적 없는 제자는 원망하지 않아도 인사를 하다가 끊은 제자는 기억에 남는다. 뿐만아니라 옛날의 고마움과 현재의 섭섭함이 섞이게 되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섭섭함만 점점 더해간다. 원래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과 삐치는 감정은 나이에 정비례한다.
고마움은 각성제가 필요한 주기적인 감정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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