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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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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민테른 대표로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 설립을 시도한 박진순
2021년 06월 29일 15시 23분  조회:583  추천:0  작성자: 박문봉

조선민족당사인물 추적1 

 

코민테른 대표로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 설립을 시도한 박진순

 

1)중국의 ‘공산주의 정당’을 설립하기 위해 파견된 첫 코민테른 대표

 

10월 사회주의혁명 승리 이후 쏘베트정권은 제국주의의 봉쇄와 포위를 돌파하고자 동방에서 지지 세력을 찾았고, 레닌이 창도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로씨아공산당(볼세비키)은 동방의 식민지 반식민지 민족들의 해방운동에 눈길을 돌렸다. 이리하여 조선민족의 첫 공산주의자로 하바롭스크시 쏘베트집행위원회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인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Alexandra Petrovna Kim)이 조선민족의 혁명가들 속에 나타나며, 그녀의 주선 하에 1918년 4월 리동휘 등의 주도로 동양에서 첫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이 창립된다.  

 

코민테른은 중국혁명의 새로운 진전에 특별히 주목하고 선후로 여러 차례 밀사를 파견하여 중국에서 공산당의 건설을 시도했다. 중국으로 파견된 이들 코민테른 대표들 가운데는 조선민족의 초기 공산주의자들도 들어 있었는데 이들은 한편으로는 코민테른이 중국 초기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는데 교량역할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민족의 해방운동을 중국혁명가들과의 련대 속에서 완수할 타산 하에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교왕(交往)을 적극 시도했다. 이리하여 조선민족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에서 공산당이 정당으로 정식 창립되는 전부터 중국공산주의자들과 교왕하기 시작하는데 박진순은 첫 인물로 꼽힌다. 

 

레닌의 주장에 따라 1919년 3월에 출범한 코민테른의 중요한 의의는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 혁명가와 무산계급이 없거나 거의 없는 국가의 혁명적 대중을 련합시키고, 동방 각 식민지 국가의 피압박 대중을 련합시키는 데”있었다.1920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 레닌은 이 점에 대해 ‟국제 프롤레타리아운동으로부터 볼 때 현 시기 각 국 공산당의 주요 과업은 분산적인 공산주의 력량을 단합시키고 매 나라에서 공산당(혹은 이미 있는 정당을 강화하거나 혁신하는 것)을 창건하여 백배로 사업을 강화하며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국가정권을 취득하기 위해 준비하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독재형식의 정권을 취득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더욱 분명하게 제기하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사업을 추동하고 지원하였다. 기실 레닌이 지적한 코민테른은 ‟매 나라에서 통일된 공산당을 창건하기 위해”노력하는 하나의 구성부분이였다. 이에 대해 코민테른과 중국의 관련 연구자는 일찍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자기의 지부를 건립하여 중국혁명과 세계혁명을 련결시켜 코민테른의 중국혁명에 대한 지도권을 실현하고저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박진순의 이름은 지난 세기 90년대 이전의 중국공산당 당사 관련 연구나 보고서에서도 개별적으로 제기는 되였었다. 하지만 기술내용이 대부분 매우 추상적이였고 근거로 사용한 사료도 매우 설득력이 약했다.  

 

리단양은 중국학자로서 처음으로 1919년 중국에 와 공산주의(사회주의)자들의 정당설립을 도운 박진순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고찰하였다. 리단양은 자기의 론문에서 1919년 11월, 코민테른집행위원이며 한인사회당의 주요 지도자인 박진순이 코민테른의 활동경비를 지니고 상해에 와 학생구국회성원이였으며 중화공업협회 상무리사로 있는 황개민(黄介民)과 전국학생련합회 지도인물인 요작빈(姚作宾)을 지원하여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대동당(大同党)을 조직하였는데, 이 당은 1920년에는 코민테른 극동서기처에서 조직하고 추진한 극동사회주의동맹에 참가하였고 1922년에는 대표를 파견하여 쏘베트로씨아에서 개최된 극동 각 국 공산당과 혁명당 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는 갓 설립된 코민테른이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설립을 위한 한차례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민족의 반일민족운동은 새로운 발전 기회를 맞이하였다. 볼셰비키의 지원으로 1919년 4월 25일 한인사회당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당대표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박진순 등을 당의 대표로 모쓰크바에 파견하여 쏘베트 로씨아(Soviet Russia)와 교섭하게 하였다. 박진순일행은 같은 해 가을에 모쓰크바에 도착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 갓 설립된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 한인사회당의 상황을 회보하고 당 구성원들의 명단을 제출하였다. 코민테른집행위원회는 한인사회당을 코민테른의 한 개 지부로 등기, 승인하였고 박진순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성원으로 되였다.  

 

한인사회당 창건에 참가하기 전 박진순은 1897년 로씨아 연해주 올긴스크 니콜라예프카 마을에서 태여나 상급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민족학교에서 교사로 있었고 1915년 조선민족 혁명단체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 가담하였다. 1917년 로씨아 혁명 이후 로씨아 연해주 지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조선인회 비서, 조선인병사동맹 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박진순 등의 노력으로 코민테른의 소속 지부로 된 한인사회당은 1919년부터 이미 공산주의정당으로 인정받았으며 이 한인사회당은 조선민족의 력사상 첫 공산당조직이였으며 동시에 근대 동아시아 력사에 있어서도 첫 공산당조직으로 되였다. 동아시아 범위 내에서 첫 공산주의정당으로서 된 한인사회당은 1921년 중국공산당의 창립과 1922년 일본공산당의 창립과정에 모두 홀시할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1919년 8월 5일, 박진순은 코민테른의 파견을 받아 모쓰크바로부터 중국에 오게 되였으며 같은 해 11월 초순에 상해에 도착했다. 비록 박진순이 코민테른에서 얻은 선전활동비용을 로씨아 극동지역을 지날 때 당해 9월 이르쿠츠크에서 설립한 전로(全露)한인공산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도 함)의 김철훈 등 다른 한 갈래 조선민족 공산주의 세력에 탈취당하였지만 박진순이 중국에 와 코민테른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것은 필경 박진순은 갓 출범한 코민테른이 중국에서 다른 한 공산주의 정당을 창립하기 위해 파견한 첫 대표이기 때문이며 또 코민테른과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련계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상해에서 설립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리동휘가 같은 해 9월에 상해에 와 국무총리 직을 맡았고, 그가 한인사회당의 당수를 맡고 있기에 한인사회당 총부도 함께 상해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5·4운동의 세례를 겪은 중국의 선진분자들이 쏘베트 로씨아에 대해 가일층 료해하고 접촉하며 중국에서 코민테른에 속하는 정당설립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박진순의 중국행에 대해 황려(黄黎)도 1919년 가을 ‘고려인 바크징춘(巴克京春)’ 즉 박진순이 코민테른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왔다고 하면서 박진순이 중국에 온 주요한 사명은 한인사회당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며, 겸해서 쏘베트로씨아에 대한 중국 선진분자들의 료해를 돕고 코민테른에 속한 정당을 세우기 위해서였다고 하였다. 

 

2) 극동을 대표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활약

 

박진순이 상해에 도착한 시간은 1919년 11월 초순이였다. 박진순은 리동휘에 의해 다시 모쓰크바로 향하는데 그 때가 당해 11월 중순이다. 박진순이 상해에 있은 시간은 보름이 채 되지 못한다.  

 

박진순은 1920년 1월 중순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교섭을 진행하여 한인사회당이 조선민족을 대표한 유일한 공산주의 정당이며 따라서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는데 성공한다. 이리하여 같은 해 7월 19일부터 8월 6일 까지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 박진순은 한인사회당의 대표로 대회 기간 동안 의결권을 가진 정식 대의원 자격으로 당대표대회에 참석하며 한인사회당은 당시 동아시아 민족들 중 투표권을 가진 유일한 정당으로 되였다. 나아가 박진순은 민족과 식민지 분회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대회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그는 ‘민족 문제 식민지 문제’분과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그는 연설에서 일본을 제외한 극동지구는 모두 봉건 혹은 반봉건사회단계에 처해 있는 만큼 혁명의 첫 단계의 성격은 자산계급민주혁명이라고 규정하였으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을 해방하는 사회혁명을 하는데 진력해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우리는 극동혁명의 최초 단계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민족주의적 인텔리겐치아(지적 로동에 종사하는 사회계층)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현재 그 다음 단계를 위하여 우리의 힘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봉건체제에 예속된 농민 대중을 해방하여 가능한 한 조속히 아시아의 농민-사회혁명을 위한 세력을 조직해야 한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산업프롤레타리아는 조속한 공산(주의)혁명에 대한 큰 희망을 품기에는 너무나 취약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일대혈전의 당면 문제를 리해하게 된다면 농민혁명이 성공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전위인 로씨아의 프롤레타리아는 빈농과 중농층을 가지 편에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3년간의 전 세계 부르주아지의 필사적이고 극렬한 공세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런 공산주의리론수양을 갖춘 특히 극동지구의 혁명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당시 조선민족 공산주의자 내부는 물론 전반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매우 드문 비범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리단양은 자기의 론문에서 이 연설에 대해 로버트 스칼라피노‧리정식의《한국공산주의 운동사》를 인용, 어떤 학자는 ‘모택동주의의 원천(毛泽东主义的源泉)’이라고까지 평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박진순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중국에서 초기 공산당 창립사업을 도울 대표로 임명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코민테른의 26인 집행위원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면서 극동을 대표하는 위원이 된다. 박진순의 상술한 적극적인 교섭과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의 활약은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그와 그 대표로 있는 한인사회당에 대한 신임과 지원을 크게 증가시켰다. 코민테른은 박진순 등을 통해 리동휘 및 한인사회당에 60만 루블이라는 거액의 활동경비를 제공한 것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후에 리동휘는 이 거액의 활동경비를 통제하고는 대한민국림시정부 내의 기타 세력과 분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1922년 1월 국무총리직 까지 사직하여 대한민국정부의 제1호 동문명령으로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다른 한 방면으로 이 거액의 활동경비는 당시 리동휘 및 그 세력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반영하기도 했다. 

 

1921년 5월, 리동휘가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대회를 소집하고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력사적으로 상해고려공산당으로 칭함)하였는데 이는 박진순 등을 통해 코민테른의 상술한 지원을 얻은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번 고려공산당대표대회에서 통과한 ‘고려공산당선언’에서는 ‟세계 무산자로서의 제1차 대회실험과 교훈은 로씨아 프롤레타리아 10월 혁명에 이외의 기대와 충심으로 되는 축복을 주었을 뿐 아니라 중국 프롤레타리아 혁명단체의 활약과 최근 일본사회주의 동맹의 탄생 및 공산당의 순산에 깊은 신뢰를 보냈다.”고 제기하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조직건설을 지지하고 협조하는 노력은 당시 코민테른이 동아시아의 첫 공산당조직인 한인사회당 및 후의 고려공산당에 부여한 하나의 과업이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시 조선민족공산주의자들의 하나의 자각적인 사명이였던 것이다. 

 

일본학자 이시카와 요시히로(石川禎浩)의 연구에 따르면 박진순은 1920년 말에 재차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코민테른집행위윈회 극동대표위원으로 당연이 중국사람을 대상으로 한 공산주의 조직의 발전에도 진력할 수밖에 없었으며”또 ‟확실히 중국 지식분자들과 특별한 관계가 없기에 의심할 여지없이 대한민국 상해 림시정부 내의 공산주의 성원인 상해 거주 조선민족들의 인맥을 통해 중국공산주의자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박진순은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리동휘 등의 루트를 통해 중화공업협회총간사인 황개민 등 사람들이 조직한 ‘대동당(大同党)’의 창당활동을 지원했던 것이다.” 당시 이 과정에 참여했던 려운행은 리동휘가 황개민에게 2만원의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 자금은 리동휘가 박진순 등이 획득한 코민테른의 자금에서 온 것임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황개민(黄介民, 1883一 1956)은 본명이 황각(黄觉)이고 강서 청강(清江) 사람이다. 일찍 동맹회에 참가했고 강서에서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류학했으며 1915년 7월 진기룡(陈其尤), 왕희천(王希天) 등 중국류학생 및 신익희(申翼熙), 조서앙(赵素昂) 등 일본 조선민족류학생들과 함께 일본에서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义)를 표방한 ‘신아동맹당’을 결성했다. 1917년 결성한 대동당은 이 신아동맹당과 사상 면에서나 조직 면에서 모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일본령사관 계통의 외사경찰의 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대동당의 당원은 중국본토사람과 대만사람 밖에도 인도사람, 조선사람, 월남사람 들을 망라하고 있었는데 30명 좌우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류학하고 또 중국공산당의 조기 활동에 참가한 시존통(施存统)은 1921년 12월 일본경찰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 “상해에는 공산당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진독수 등이 신봉하는 순수한 맑스주의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황개민 등이 결성한 대동당인데 맑스주의를 신봉하였을 뿐더러 무정부주의도 신봉하였다”고 증언했다. 후에 코민테른이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의 창건사업을 협조한 보이틴스키(维经斯基, Gr e g o y r Vi o t i n s k y , 又译魏金斯基 )도 쏘베트로씨아(볼셰비키) 극동조직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대동당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정당 성격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1921년 5월 대동당의 대표 요작빈은 박진순, 리동휘와 함께 상해를 떠나 모쓰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제3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는 박진순 및 리동휘 등이 당시 ‘중국공산당’이라 불렸던 대동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때문에 박진순의 두 차례 상해행은 ‟쏘베트로씨아와 코민테른의 그 단계에서 극동전략의 한차례 성공이였으며 레닌의 민족식민지리론의 중국에서의 조기 응용의 하나의 모델이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 차례 무산된 시도’였다고 평가를 하고 있는데 이는 형평성에 어긋난다. 

 

3)일본공산당의 설립에 간여

 

박진순은 1920년 말 상해 행에서는 또 일본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를 만나 그와 함께 일본공산당의 설립 문제도 깊이 연구하였다. 이어서 1921년 5월에는 ‘일본공산당잠정집행위원회’에서 파견한 곤도 에이조(近藤荣藏)를 회견하고 일본공산당을 설립할 데 대하여 상의하고 경비지원을 주기도 하였다. 

 

곤도 에이조의 회고에 따르면 박진순은 공산주의리론에 대해 매우 박식했으며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서도 상당하게 료해하고 있었다. 당시 곤도 에이조는 박진순에게 일본공산당의 조직건설 계획초안을 제출하면서 코민테른에서 매월 2만 엔의 경비를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박진순 등은 상술한 계획서를 동의하는 한편 우선적으로 6,500엔의 경비를 지원하였다. 1921년 8월 21일 곤도 에이조, 사회주의자 타카츠 세이도(高津正道) 등이 결성한 소위 ‘효민(晓民)일본공산당’(도쿄공산당이라고 함)은 박진순 등이 코민테른을 대표하여 ‘일본공산당잠정집행위원회’의 상술한 지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효민공산당은 후에 1922년 2월 7일 동경에서 설립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첫 일본공산당의 주요한 성원으로 되였다.바로 박진순이 제2차로 상해에 와 머무는 기간인 1920년 12월 중순 상해에서 중국, 일본, 조선의 대표가 참가한 극동사회주의 련합회의가 있었는데 회의에서는 동아시아 3국이 공산주의선전을 확대하여 공산당을 건립할 과업에 대하여 분명하게 요구하였으며 코민테른에서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중국에 중앙국을 세워 세계 무산계급과 련락을 취하는데 편리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번 회의의 내용과 결정사항을 놓고 볼 때 박진순이 두 번째로 상해에 온 사명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박진순이 1920년 9월 ‘코민테른 재외 전권위원’이라는 직위와 함께 ‘동양공산당’, 즉 동아시아 혁명의 중앙기관을 결성하는 과업을 갖고 모쓰크바를 떠나 재차 상해로 왔기 때문이다.  

 

빌렌스키가 코민테른 제2차 대회기간 동안 ‘코민테른 동아비서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해줄 것을 당중앙과 코민테른에 요청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러한 사명과 과업은 박진순에게 돌아가고 만 것이다. 박진순은 상해에 돌아오자마자 코민테른의 극동전권위원으로서 상해에 ‘동양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한 중‧한‧일 3국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시기의 박진순에 대해 상해회합에 참가한 곤도 에이조는 후에 자기의 기록을 남겼다. 1921년 4월 상해로 간 곤도는 “13명으로 구성된 집단을 만났는데”… “이 집단의 지도자는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박진순인 듯”했다. 곤도는 박진순을 가리켜 “상해 회합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이라고 했으며 “마음으로부터의 포옹으로 나를 껴안은”50대 중반의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곤도의 묘사에 의하면 박진순은 ‘위엄 있는 인물’이였으며 그의 아름다운 로씨아인 부인은 남편한테서 류창한 로씨아어로 회의의 골자를 전해 듣고 기록했다고 회고했다.   

 

4) 북경에서 리대소를 만나다

 

1921년, 중국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박진순은 이 시기 북경에서도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21년 8월 16일부터 조선민족독립운동가들이 북경군사통일회의 제2차 회의를 개최하려고 계획할 때 박진순도 함께 하는데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그것은 그가“쏘베트로씨아 정부로부터 선전비로 받은 자금과 관련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가“상해로 들어가지 전 도중에 김립과 만나 1921년 7월 북경에서 유린(Yurin)을 방문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한 일제자료에 근거하여 정리한 한국사료집에 따르면“1921년 11월 경 쏘베트에 있는 박진순, 한형권 등 선전원 3명이 북경에 와서 박용만 일파 40명 신채호 등과 북경 성내 동사패(东四牌)7조(条)호동(胡同) 27호의 한교(韩侨)구락부에서 만났다”고 한다. 1921년 초 결성된 북경한교구락부가 유명한 조선민족 북경거주 독립운동가들의 단체였음을 고려할 때 박진순은 당시 북경에서도 코민테른과 조선민족공산주의자를 망라한 반일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 교량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박진순은 한형권(韩馨权) 등 선전원과 함께 리대소 등 북경대학의 중국공산주의자들과도 교왕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일본인 오오스기 사까에와 곤도 에이조, 그리고 조선민족학자 박창욱도 1920년 초 박진순, 리동휘 등이 북경과 상해에서 리대소, 진독수를 만났으며 그들과 함께 동방 각국에서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전개할 데 관하여 론의하였다고 적고 있다.  

 

코민테른 밀사인 박진순이 북경에서도 중국의 초기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만남의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까지 알려지는 자료가 없다. 특히 중문자료에서는 거의 한 마디도 찾아볼 수가 없다. 

 

5) 순탄치 않은 사회주의혁명 활동  

 

2015년 9월 한국어로 번역된 로씨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의 자료 ‘로씨아문서번역집 20~25권 목차’에 따르면 박진순은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기간에 아래와 같은 문서를 남기기도 했다.

 

 

〈박진순이 리동휘와의 대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레닌에게 보내는 서신〉

〈박진순이 카라한에게 보내는 보고서〉

〈박진순이 지노비예프 동무에게 보내는 서신〉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전권대표 박진순이 한인사회당 건설과 당 강령 및 과제에 관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 

〈박진순이 로씨아연방공화국 부(副)외무인민위원부 카라한과 코민테른에 보내는 전문〉 

〈박진순이 기수 행 사업, 보조금 지출에 관해 치체린에게 보낸 보고서〉 

〈박진순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에 보낸 사파로프에 대한 비판문〉 

〈로씨아연방공화국 외무인민위원부 부(副) 전권위원 가폰이 박진순과 조선의 사업에 대해 로씨아볼세비키공산당 씨베리아뷰로로 보내는 전문〉 

〈슈먀츠키가 박진순의 상하이 활동에 대해 치체린, 두홉스키, 트릴리세르에게 보낸 전문〉

〈박진순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조선위원회에 보내는 보고〉

〈박진순이 “천도교”에 대한 립장에 관하여 쓰딸린과 부하린, 쿠시넨, 페트로프에게 보낸 서신〉

〈박진순이 자신을 전 련방볼쉐비키공산당 당원으로 전입시켜 달라는 요청을 담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방비서국에 제출한 신고서〉

  

이런 문서들은 당시 박진순의 위상과 혁명 활동상황을 다른 한 차원에서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박진순, 그러나 그 후 그가 코민테른과 중국 상해와 북경 등을 오가면서 전개한 사회주의혁명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1922년 4월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의 분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박진순에게 3개월의 시한부 활동 금지 조치를 내렸다. 여러 리유로 근신 기간이 길어지자 박진순은 1922년부터 1925년 6월까지 모쓰크바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였다. 모쓰크바 대학에 재학하면서 동방로력자공산대학, 국제사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며 유물사관 과목을 가르쳤다. 1925년 여름 로씨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의 권유에 따라 중국 동북 북간도의 당 학교와 신문 편집 사업에 관여하였다. 1925년 10월 천도교 산하 단체인 조선농민사의 농민인터내셔널 가입을 위한 해외 대표로 선정되였다. 1926년 초 조선농민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로씨아 모쓰크바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다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보고자 자격으로 일했다. 박진순은 1929년 중국 동북의 간도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기관지 《볼셰비키》의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1936년 로씨아 모쓰크바에 있는 외국인로동자출판사 조선과에서 교정인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테러 단체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여 쏘련 최고재판소 군협의회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1938년 3월 19일 총살되였다. 1956년 7월 18일 쏘련 최고회의 군협의회 결정으로 복권되였다.

 

주: 

 

向青, 《共产国际和中国革命关系的历史概述》, 광동인민출판사, 1983; 

왕약비, 《关于大革命时期的中国共产党》, 《근대사연구》1981년 제1기; 

리단양, 《朝鲜人‟巴克京春”来华组党述论》, 《근대사연구》1992년 제4기; 

중국사회과학원근대사연구소 번역실 번역,《共产国际有关中国革命的文献资料(1919一1928)》제1집,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81; 

黄黎, 〈共产国际、俄共(布)与中国早期革命者之间的联系〉, 《中国浦东干部学院学报》2011.11, 제5권 제6기; 宋成有, 《新编日本近代史》, 북경대학출판사, 2006.12 등 중문자료를 위주로 김수영, 〈보이틴스키와 초기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 《중국근현대사연구》제36집, 2007.12 등 한국자료도 보충자료로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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