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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생활 또한 얼마나 숭엄한가
2015년 02월 06일 11시 14분  조회:1407  추천:0  작성자: 말(話)

고 은 시인

[고은의 편지2] 사소한 생활 또한 얼마나 숭엄한가

일조(一潮)에게.

 한갓 악몽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린 시절 한밤중 악몽에서 깨어나 아 꿈이었구나 하고 오그라든 가슴 쓸어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

 그런데 어제오늘의 우리에게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네. 수레바퀴는 진창에 처박혀버렸네. 꽉 막힌 현실이 우리 현실이네. 어제의 쓰레기만이 되풀이 들썩이고 있네. 번드르르한 미래학은 허황한 미래를 횡설수설하다가 말고 있네.

 밤낮의 하루하루가 쌓이면 그것을 세월이라 했지. 그 세월을 예로부터 흐르는 물이라 해왔지. 바로 이런 흐르는 물이 꽉 막히고 만 것이네.

 나는 너의 성벽이고 너는 나의 해자(垓字)이고 그 해자 물속의 독사이거나 맨땅 해자 안의 주린 호랑이가 되었네. 이것이 악몽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저 태양계가 편성된 뒤로 우리가 살아오는 세상에는 단 한 번도 막힌 적 없는 낮과 밤이 흐르고 흐르는 세월 45억 년을 지나왔으니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네.

 막히지 않는 것, 닫혀버린 나만의 세상은 세상이 아닌 상태로 이 우주 광대무변의 소통은 하루도 어긴 적 없을 것이네.

 그 누가 이 유구한 밤낮을 거스르겠는가. 그 무엇이 이 흐르는 세월의 원리를 제멋대로 바꾸겠는가.

 태양의 불행은 정작 태양에는 이런 하루의 낮과 밤이 없다는 것이네. 하루 속의 한 쌍의 밤낮이 번갈아 가며 마침내 그 하루를 완성하는 운행의 오묘한 명암은 그것을 주재하는 태양에는 없는 일이네.

 저 200만 년 전부터 이 지상의 삶을 영위해 온 태고 인류는 이토록 진귀한 하루하루로 낮에는 눈 뜨고 밤에는 눈을 감는 방식으로 쌓아왔네.

 180만 년 전에는 그동안 머물렀던 고향을 떠나서 이곳저곳의 낯선 내일들을 펼쳐왔네. 해 뜨는 아침과 해 지는 밤은 그 시간 속의 운명에 대한 숙명이었네.

 오로지 이 밤과 낮으로 인류 사는 바람으로 산을 넘고 물로 벌판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네. 뒷날 ‘존재’라는 정(靜) 개념보다 ‘행(行)’ 또는 ‘제행(諸行)’이라는 동(動) 개념이 훨씬 더 실감을 낳았던 이유이기도 하겠네.

 항성인 태양이 가지지 못한 밤낮을 그 행성인 지구가 가진 이 태양계의 공전 자전의 축복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네.

 만약 이 세상이 환한 대낮만이면 어쩔 것인가. 그 반대라면 어쩔 것인가.

 이런 밤낮의 일상이야말로 인간에게 삶의 율동을 부여한 것 아닌가. 해가 내 목숨과 삶을 낳았다면 달은 내 마음을 낳아준 것 아니겠는가. 일월상조(日月相照) 그 아래에서 내 몸에는 넋이 들고 얼이 박히지 않았겠는가.

 한곳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뿌리내린 풀이나 나무는 바람의 덕택으로 그 내음을 퍼뜨려 벌·나비를 부르고 그 씨앗을 먼 곳에 날려보내네. 저 심심삼천 골짝의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의 띠가 흘러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그 긴 행로를 누가 차단한단 말인가.

 아득한 어느 시절이었네. 중앙아시아 어디쯤에서 인류의 한 갈래로 떠나고 떠나는 몇 백 세대로 해 뜨는 지평선 이쪽 부여 땅에 이르렀을 때 그 편력(遍歷)의 영광으로 태양 숭배의 자손이 되고 말았네. 그 태양족의 후예가 우리 아닌가.

 이런 역정이 바로 흐르는 삶의 사명을 다하는 것 아닌가.

 대기 속의 바람도 한곳에서 썩어진 적 없지. 바람이라는 뜻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기체의 현상에 있지 않는가. 저 바닷가의 조석(潮汐)은 바다로부터 강 쪽으로, 강 쪽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지구와 달 사이의 가운(氣運) 놀이 아닌가. 저녁 밀물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아침 썰물은 얼마나 적나라한가.

 이런 연안의 조류 놀이와는 달리 휑한 난바다 해류 또한 한군데서 훌쩍이지 않고 먼 곳의 미지를 향해서 정처 없는 발길로 떠나지 않던가.

 한 해류가 지구상의 여러 대양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다가 처음의 해역에 돌아오는 그 커다란 한 바퀴에는 2만 년의 밤낮이 채워진다네.

 인간의 역사 단위로 근대사 시대 구분 따위에는 어림없는 1000만 년으로 삼는 장기지속사관이 있고 이것조차 뛰어넘어 1만 년을 한 거시역사관으로 설정한 파천황(破天荒)의 초연사관도 있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시간 경률 이상으로 이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제 무대로 삼아 2만 년 세월의 순환을 한 단위로 삼는 해류에 대해서 인간 사회의 숨찬 시간 분화(分化)는 시간 속의 살벌한 간극을 만들어내는 빌미일 것이네.

 내가 좋아하는 지난 시대 노르웨이의 한 시인은 제 나라를 박차고 나와 인도양 태평양의 적도 위 해류 전환점까지 떠돈 적이 있었네. 나 또한 동중국해 가을 흑조에 반해서 제주도 3년을 보냈네. 자네의 호(<53F7>)를 일조(一潮)라고 부르는 사연에는 한 인간의 전말(顚末)이 2만 년 해류의 일생으로 된 그 운명의 시공(時空)에 드리워진 바 아닌가.

 삼척동자라도 지구 대부분이 바다로 채워진 것은 다 알고 있네. 이 바다 5대양에 비할 바 아닌 6대주라는 땅덩어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솟아오른 융기가 지구 위의 육지 아닌가. 그래서 지구를 수구(水球)라고 고쳐 부르자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바다의 해류 순환만이 아니겠지. 한반도 백두대간 어느 분수령 밑 한 방울의 물로 시작한 시내 개울이 냇물로 나아가고 위 강 아래 강 거쳐 바다에 이르는 그 행방은 바다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 수면의 증발로 기체로 솟아올라 구름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 구름의 어느 밤에 눈이 되고 어느 한낮에 비가 되어 지상을 적시지 않는가.

 실로 이 무궁한 순환 유전의 공간 속에서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틀이 진행되고 이 시간의 운행 속에서 찰나와 영겁의 공간이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로병사로의 궤적을 그리고 있네.

 이러저러한 삶의 기초 환경으로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야생에 대해서 얼마나 더 나은 가치의 단계인가를 회의할 의무도 나날이 강렬하다네.

 인간에게는 천당 극락도 아틀란티스도 무릉도원도 선계(仙界)도 저 캄파넬라 ‘태양의 도시’도 유토피아도 한 특정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네.

 현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질곡을 탈출하는 망명의 장소가 바로 이상향이라는 1차원 내지 3차원의 지정된 공간이고 만 것이네. 그 공간은 첫째 이동의 자유가 끝난 곳이고 특별한 기획의 환경이고 자아 의지가 무효인 정지된 상태이기도 하네.

 이런 유토피아 고정설에 대해서 가령 푸코는 ‘헤테로피아’라는 장소가 전도된 과정 자체로 유토피아 융통성을 내보이기도 하고 있네.

 나는 인간의 꿈속에 담긴 이상세계란 밤에는 자는 집이 있고 낮에는 일할 곳이 있는 생존의 기본에서 시작한다고 믿네. 유토피아 하강설(下降說)이 곧 이것이네.

 흐르는 행복과 흐르는 진리야말로 옛 조상의 유전자로 흘러오는 인류사의 꿈 아닌가. 자아나 국가라는 구성은 이 세계사의 미래와 우주의 불가사의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티겠는가. 오히려 전근대나 근대를 따질 까닭 없이 인간 각자의 사소한 생활과 세계의 자연성 개연성이 얼마나 숭엄한가를 문득 깨닫게 되네.

 자네와 함께 현실을 놓지 않는 신념과 현실을 넘어서는 신념을 오래오래 나누고 싶네. 그리운 일조, 어째서 우리 당대는 금석(金石)에 아로새겨둘 의미를 찾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고은 시인

 한갓 악몽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린 시절 한밤중 악몽에서 깨어나 아 꿈이었구나 하고 오그라든 가슴 쓸어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

 그런데 어제오늘의 우리에게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네. 수레바퀴는 진창에 처박혀버렸네. 꽉 막힌 현실이 우리 현실이네. 어제의 쓰레기만이 되풀이 들썩이고 있네. 번드르르한 미래학은 허황한 미래를 횡설수설하다가 말고 있네.

 밤낮의 하루하루가 쌓이면 그것을 세월이라 했지. 그 세월을 예로부터 흐르는 물이라 해왔지. 바로 이런 흐르는 물이 꽉 막히고 만 것이네.

 나는 너의 성벽이고 너는 나의 해자(垓字)이고 그 해자 물속의 독사이거나 맨땅 해자 안의 주린 호랑이가 되었네. 이것이 악몽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저 태양계가 편성된 뒤로 우리가 살아오는 세상에는 단 한 번도 막힌 적 없는 낮과 밤이 흐르고 흐르는 세월 45억 년을 지나왔으니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네.

 막히지 않는 것, 닫혀버린 나만의 세상은 세상이 아닌 상태로 이 우주 광대무변의 소통은 하루도 어긴 적 없을 것이네.

 그 누가 이 유구한 밤낮을 거스르겠는가. 그 무엇이 이 흐르는 세월의 원리를 제멋대로 바꾸겠는가.

 태양의 불행은 정작 태양에는 이런 하루의 낮과 밤이 없다는 것이네. 하루 속의 한 쌍의 밤낮이 번갈아 가며 마침내 그 하루를 완성하는 운행의 오묘한 명암은 그것을 주재하는 태양에는 없는 일이네.

 저 200만 년 전부터 이 지상의 삶을 영위해 온 태고 인류는 이토록 진귀한 하루하루로 낮에는 눈 뜨고 밤에는 눈을 감는 방식으로 쌓아왔네.

 180만 년 전에는 그동안 머물렀던 고향을 떠나서 이곳저곳의 낯선 내일들을 펼쳐왔네. 해 뜨는 아침과 해 지는 밤은 그 시간 속의 운명에 대한 숙명이었네.

 오로지 이 밤과 낮으로 인류 사는 바람으로 산을 넘고 물로 벌판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네. 뒷날 ‘존재’라는 정(靜) 개념보다 ‘행(行)’ 또는 ‘제행(諸行)’이라는 동(動) 개념이 훨씬 더 실감을 낳았던 이유이기도 하겠네.

 항성인 태양이 가지지 못한 밤낮을 그 행성인 지구가 가진 이 태양계의 공전 자전의 축복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네.

 만약 이 세상이 환한 대낮만이면 어쩔 것인가. 그 반대라면 어쩔 것인가.

 이런 밤낮의 일상이야말로 인간에게 삶의 율동을 부여한 것 아닌가. 해가 내 목숨과 삶을 낳았다면 달은 내 마음을 낳아준 것 아니겠는가. 일월상조(日月相照) 그 아래에서 내 몸에는 넋이 들고 얼이 박히지 않았겠는가.

 한곳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뿌리내린 풀이나 나무는 바람의 덕택으로 그 내음을 퍼뜨려 벌·나비를 부르고 그 씨앗을 먼 곳에 날려보내네. 저 심심삼천 골짝의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의 띠가 흘러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그 긴 행로를 누가 차단한단 말인가.

 아득한 어느 시절이었네. 중앙아시아 어디쯤에서 인류의 한 갈래로 떠나고 떠나는 몇 백 세대로 해 뜨는 지평선 이쪽 부여 땅에 이르렀을 때 그 편력(遍歷)의 영광으로 태양 숭배의 자손이 되고 말았네. 그 태양족의 후예가 우리 아닌가.

 이런 역정이 바로 흐르는 삶의 사명을 다하는 것 아닌가.

 대기 속의 바람도 한곳에서 썩어진 적 없지. 바람이라는 뜻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기체의 현상에 있지 않는가. 저 바닷가의 조석(潮汐)은 바다로부터 강 쪽으로, 강 쪽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지구와 달 사이의 가운(氣運) 놀이 아닌가. 저녁 밀물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아침 썰물은 얼마나 적나라한가.

 이런 연안의 조류 놀이와는 달리 휑한 난바다 해류 또한 한군데서 훌쩍이지 않고 먼 곳의 미지를 향해서 정처 없는 발길로 떠나지 않던가.

 한 해류가 지구상의 여러 대양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다가 처음의 해역에 돌아오는 그 커다란 한 바퀴에는 2만 년의 밤낮이 채워진다네.

 인간의 역사 단위로 근대사 시대 구분 따위에는 어림없는 1000만 년으로 삼는 장기지속사관이 있고 이것조차 뛰어넘어 1만 년을 한 거시역사관으로 설정한 파천황(破天荒)의 초연사관도 있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시간 경률 이상으로 이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제 무대로 삼아 2만 년 세월의 순환을 한 단위로 삼는 해류에 대해서 인간 사회의 숨찬 시간 분화(分化)는 시간 속의 살벌한 간극을 만들어내는 빌미일 것이네.

 내가 좋아하는 지난 시대 노르웨이의 한 시인은 제 나라를 박차고 나와 인도양 태평양의 적도 위 해류 전환점까지 떠돈 적이 있었네. 나 또한 동중국해 가을 흑조에 반해서 제주도 3년을 보냈네. 자네의 호(<53F7>)를 일조(一潮)라고 부르는 사연에는 한 인간의 전말(顚末)이 2만 년 해류의 일생으로 된 그 운명의 시공(時空)에 드리워진 바 아닌가.

 삼척동자라도 지구 대부분이 바다로 채워진 것은 다 알고 있네. 이 바다 5대양에 비할 바 아닌 6대주라는 땅덩어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솟아오른 융기가 지구 위의 육지 아닌가. 그래서 지구를 수구(水球)라고 고쳐 부르자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바다의 해류 순환만이 아니겠지. 한반도 백두대간 어느 분수령 밑 한 방울의 물로 시작한 시내 개울이 냇물로 나아가고 위 강 아래 강 거쳐 바다에 이르는 그 행방은 바다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 수면의 증발로 기체로 솟아올라 구름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 구름의 어느 밤에 눈이 되고 어느 한낮에 비가 되어 지상을 적시지 않는가.

 실로 이 무궁한 순환 유전의 공간 속에서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틀이 진행되고 이 시간의 운행 속에서 찰나와 영겁의 공간이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로병사로의 궤적을 그리고 있네.

 이러저러한 삶의 기초 환경으로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야생에 대해서 얼마나 더 나은 가치의 단계인가를 회의할 의무도 나날이 강렬하다네.

 인간에게는 천당 극락도 아틀란티스도 무릉도원도 선계(仙界)도 저 캄파넬라 ‘태양의 도시’도 유토피아도 한 특정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네.

 현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질곡을 탈출하는 망명의 장소가 바로 이상향이라는 1차원 내지 3차원의 지정된 공간이고 만 것이네. 그 공간은 첫째 이동의 자유가 끝난 곳이고 특별한 기획의 환경이고 자아 의지가 무효인 정지된 상태이기도 하네.

 이런 유토피아 고정설에 대해서 가령 푸코는 ‘헤테로피아’라는 장소가 전도된 과정 자체로 유토피아 융통성을 내보이기도 하고 있네.

 나는 인간의 꿈속에 담긴 이상세계란 밤에는 자는 집이 있고 낮에는 일할 곳이 있는 생존의 기본에서 시작한다고 믿네. 유토피아 하강설(下降說)이 곧 이것이네.

 흐르는 행복과 흐르는 진리야말로 옛 조상의 유전자로 흘러오는 인류사의 꿈 아닌가. 자아나 국가라는 구성은 이 세계사의 미래와 우주의 불가사의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티겠는가. 오히려 전근대나 근대를 따질 까닭 없이 인간 각자의 사소한 생활과 세계의 자연성 개연성이 얼마나 숭엄한가를 문득 깨닫게 되네.

 자네와 함께 현실을 놓지 않는 신념과 현실을 넘어서는 신념을 오래오래 나누고 싶네. 그리운 일조, 어째서 우리 당대는 금석(金石)에 아로새겨둘 의미를 찾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2015.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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