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포럼칼럼
1. 중국조선족은 누구인가?
13억을 헤아리는 중화민족이라는 망망한 대해속에서 한방울의 물이나 다름없는 조선족은 구경 누구인가? 1986년 중국조선족 력사학계의 권위인사들이 공동집필한『조선족략사』에서는 조선족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있다.
우리 나라의 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다정한 이웃나라 인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온 위대한 민족이다. ……1845년 이후에 두 나라 정부의 봉금정책이 완화되면서 강을 건너와 사사로이 땅을 개 간하는 사람이 급속히 증가되였으며 따라서 조선변강의 백성들이 대량적으로 우리 나라 동북에 이주하여 정착하게되였다.
중국의 조선족을 19세기 중엽부터의 순이주민으로 간주하고있는 이 론법은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맞지 않는다. 조선족의 월강이주력사는 19세기 중엽부터인것이 아니라 시간을 훨씬 소급하여 내려갈수 있다. 리조시기 동지중추원사 양성지(同知中樞院事 梁城之)가 1464년에 국왕한테 올린 상소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신이『료동지(遼東志)』를 보니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인 은 홍무년간(洪武年間)에 3만여인이요. 영락(永樂)때 미쳐서는 4만 여인이다. 오늘 료동에서 사는 고려인은 열에 셋이며 서로는 료양 (遼陽), 동으로는 개주(開州), 남으로는 해개제주(海盖諸州)에 이르 기까지 분포되여있다.(朝鮮李朝世祖實錄 卷 34)
『료동지』는 영락 16년(1418) 명성조(明成祖)의 “천하의 군현지서를 만들어 올리라”는 어명을 받들어 한것이니 조선인은 적어도 영락10년(1412) 이전에 벌써 료동인구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조선인의 이같은 인구의 래원은 원, 명의 폭력강제수단에 의해 잡혀온 포로와 리조의 부패통치, 편벽한 서북변강의 환경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수 없게 된 변민들이 스스로 살길을 찾아 이주한것이다. 이같은 력사의 이주흔적을 오늘 우리는 료녕성 개현 박가구, 본계현 박보촌, 봉성현 북산촌과 서가보, 길림성 서란현 박가툰 등지에서 찾아볼수 있다.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이러한 시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여야 할 줄로 안다. 중국의 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온 이주민으로서 선조의 정기를 발굴하고 창발하여 력사의 맥을 이어가는 위대한 민족이다. 비록 본토에 남은 유민들은 벌써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였지만 조선반도로 넘아간 고구려, 발해민들은 순수한 우리의 민족으로 대를 이어왔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선조의 피와 정기를 받지 않았다고 부정할 리유는 추호도 없다. 고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는 장장 2천여년동안 조선족 선조들은 광활한 동북땅을 개척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부여의 고조선 유적, 환인, 집안 등의 고구려유적, 녕안현의 발해촌, 돈화, 화룡, 훈춘의 발해유적들에서는 력사의 거창한 맥박이 박동치고있다.
따라서 1895년 조•중간의 봉금정책 이후를 조선족의 순이민기로 잡고있는 『조선족략사』는 중국조선족의 성질을 규명함에 있어서 력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기를 도외시하고있는것이다. 민족의 력사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창조하는 거울이며 민족정기는 민족자부심과 민족의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 어떤 민족이든지 민족의 객관적 요소보다도 더욱 중요한것은 민족자부심과 자각이다. 만약 그것을 잃는다면 민족의 단합과 발전은 운운할 나위가 없다.
2. 중국조선족은 동화되는가?
민족구성요소중 가장 중요한것은 국토와 주권이다. 만일 국토와 주권을 잃게 되면 기타의 경제, 문화, 언어, 문자가 유린당하고 민족정기를 발동할수 없게 된다. 반대로 국토와 주권을 얻게 된다면 잇따라 경제, 문화와 언어문자가 수립될수 있어서 민족정기를 떨치게 되는것이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2천년간 우리의 선조들은 광활한 국토와 주권을 가졌으므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하지만 667년 라당련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고 926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된 이후 국토와 주권을 잃은 백제, 고구려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갔다. 인신의 자유를 잃은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청나라시기 조선의 포로를 매매하던 정경으로 미루어 가히 추측할수 있다.
이같이 인신의 자유가 없는 노예로 된 포로들은 부득불 동화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당서•고려전(舊唐書•高麗傳)』에 의하면 광활지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의 포로중 일부는 그후 료동으로 도로 나왔지만 절대 다수는 중원과 서북일대에서 분산되여 한족(漢族) 또는 기타 민족과 잡거하고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였다고 씌여있다.
발해는 문화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는바 멸망된 이후에는 여전히 한개 민족으로서 그후의 금, 료에서 활동하였으며, 원조에 가서야 비로소 력사상에서 흔적을 감추었다. 그들은 동화되지 않기 위하여 발해인 내부의 대가들사이에서 통혼하는 습속을 보존하여 발해인 내부혼인을 견지하는것으로써 타민족의 속성침투를 방지하였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를 꽃피울수 있는 국토가 없고 그것을 담보하는 주권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방법이든지 통할 수가 없다.
명청시기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조선민족 후예들도 오늘날 호적엔 조선족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질상으로는 동화된것이나 다를바 없다. 어떤 학자들은 개현 박가구, 본계현 박보촌, 서란현 박가툰 등지의 박씨들을 동화되지 않은것으로 보는 폐단도 있지만 그것은 그릇된 관점이다. 아래서 간단히 분석해보자.
혼인례의 방면; 이 세 박씨촌 한족 녀인들은 모두 종발이였으나 박씨 녀인들은 종래로 천족이었다. 서란현 박씨집에 시집온 70세의 한족 할머니는 박씨집에서 동지날에 오그랑팥죽을 먹었다고 했다. 이 세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개고기도 즐겨 먹는다. 그런데 지금 박씨들은 오그랑팥죽이 아니라 교즈를 먹고있다. 그리고 한족들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것이 아니며 지금 박씨들이 개고기를 먹는 방법도 우리 조선족과 틀리다.
또한 박보촌의 박씨들은 삼일장을 고수하고있다. 해방전까지 장례축문의 첫 구절이“당나라 백만인마가 침입하매 개소문이 그것을 격퇴하매……”로 되여있다. 하지만 오늘의 박씨들은 복장이 한족과 다름 없고 “당나라 백만대군이 입침하여 개소문이 이를 격퇴하여……”도 쓰지를 않는다.
그런데 왜 한족으로 되여있던 호적을 조선족으로 고쳤는가? 1989년 7월 개현 박가구에 가서 취재하던 중 필자는 그들의 의식속에서 한가닥 민족의 정기를 보았다. 그들은 해방전부터 줄곧 한족이나 만족으로 호적을 올렸는데 개혁개방이 되면서 자기들의 원 모습을 찾을 욕망이 일어났던것이다. 조상의 피도 속이지 않고 또 소수민족으로서 우대도 받게 되니 그야말로 일거량등이였던것이다.
이미 동화된 고대의 조선족과 현실의 박씨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아래와 같은 동화법칙을 도출할수가 있다. 첫째, 국토와 자주권이 없는 민족은 필연코 동화된다. 둘째, 민족의 구성요소중 경제, 문화의 동화보다 언어와 풍속습관의 동화가 늦다. 셋째, 민족동화에서 최후의 보루는 관념동화이다. 박씨, 문씨, 서씨들은 이미 언어, 문자, 경제, 문화 등에서 완전히 동화되였고 풍속습관도 거의 몽땅 동화되였지만 관념상에선 아직도 동화되지 않고있다. 관념이란 곧바로 민족정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화민국시기 개현의 박가구에서 사는 한족 형씨(邢氏)들이 마을 이름을‘형가구’로 고치려고 했을 때, 박씨들은 한결같이 일어나 관부에까지 찾아가서 고발하여 끝내 마을이름을 지켜왔던것이다. 이미 완전히 동화된것이나 다름없는 박, 문, 서씨들이 10여년 전에 갑자기 조선족으로 등록한 사실도 관념동화의 어려움을 말해주고있다. 관념상 그들은 미처 동화가 되지 않고있다고는 해도 조선족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를 잃었으므로 사실상 온전한 민족이 아니다. “비록 민족이라는 껍질과 생명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한무더기의 시체나 고기덩어리에 지나지 않는것이다.”(박성수,『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16∼17쪽)
3. 동화와 반동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수천년간 력대 중국정부는 약소민족에 대하여 무지하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해왔다. 조선민족도 례외가 아니였던바 백제와 고구려, 발해가 멸망된 후의 민족사는 피눈물로 얼룩져있다.
『구상서•고려전』에 보면 당나라가 료동을‘정복’한 후 관내 한족이 동북으로 천입한 것이 아니라 료동의 원주민들을 중원지구로 강제로 이주시켰던것이다. 포로된 임금과 왕자 등 귀족들은 중원으로 끌려간 후 외계와 단절된 련금생활을 해야 했고 기타는 마소같이 노예로 팔려갔다. 그들은 뿌리뽑힌 나무가 사막에 던져진 격으로 원래의 자기모습을 점차 빼앗기고 한족으로 변화되여갔다. 이같이 폭력에 의한 야만적인 강제동화는 온화한 문화적 동화정책에 비해서 동화시간을 대폭 줄일 수는 있을망정 더욱 거세찬 반항의 물결을 일으킬뿐이였다.
고구려와 발해민들은 반동화책략을 써왔던바 적극적인 방책과 소극적인 방책으로 갈라볼수 있다. 적극적인 반동화책략이란 잃었던 강토를 되찾아 다시 주권을 세움으로써 민족 자체발전의 원 토대를 수복하는것이다. 소극적인 반동화책략은 민족발전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혈연연장으로 자기를 보존해가는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멸망된 발해인들이 발해인 내부의 통혼으로 타민족 속성의 침투를 방지하려고 시도했던것을 례로 들수 있다.
근대로부터 오늘까지 동화와 반동화투쟁은 세단계로 크게 나누어볼수가 있다.
첫째 단계; 청정부의 강압적 동화이다. 19세기 말엽 두만강, 압록강 이북지대로 조선민족들이 대량 월강하게 되자 청정부는 토지소유권 박탈로 강제동화를 시도했다. 그 구체적 수단은 치발역복(稚髮易服)이다. 당시 조선족들은 치발역복에 대하여 두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한부류는 민족의 절개를 지키고 끝까지 반항한 사람들로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 연고로 피땀으로 개간한 땅을 점산호한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되여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해오지 않을수 없었다. 다른 부류는 솔선수범하여 치발역복하고 귀화입적하였다. 이부류는 또 다른 성질의 두가지 인물로 나뉜다. 화룡현 리영춘(李永春)은 치발역복 귀화입적하고 한족의 양아들이 됨으로써 대지주가 되여 같은 민족의 피를 짜먹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이부류는 민족 반역자로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헌 발싸개처럼 집어던진 자들이다. 하지만 양정학당의 창시자인 리동춘(李東春)과 같은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들은 반일구국의 책략으로 치발역복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조선민족이 귀화입적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생업을 유지하는것으로써 간도땅을 반일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려고 했던것이다. 당시 일제의 침략마수가 조선에 뻗쳤고 또 만주로 뻗쳐오는 시급한 상황에서 리동춘 등 계몽의사들의 귀화입적 방침은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둘째 단계; 일제의 강압적 노화교육이다. 1932년 일제는 만주국을 세우고 식민지노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9월 일제는『만주국교육방안』에서“재만조선인은 국제적 훈련이 결핍되고 도덕수양이 부족하다. 새로운 국가를 건립한 후 일본과 우리 국민지간의 융합은 상당히 어렵다. 조선민족은 새 국가를 건립한 후 일본과 우리 국민지간의 융합은 상당히 어렵다. 조선민족은 새 국가의 우환이 될것이다.”“조선인의 교육에 대해서는 동화의 방침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를 만주국에서 담임하는것이 상책이다.”“간도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학교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어용도구였고 치안에 혼란을 조성하였으므로 엄격히 취제 또는 폐교시켜야 한다.”(『만주국교육방안』,재만조선인 교육개선안, 141∼166쪽)라고 하였다.
일제는 이같은 식민지노화교육 방침에 좇아 조선인 반일사립학교를 강제로 합병, 개편, 폐교시켰으며 반일애국사상이 있는 조선인 사립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에 대하여 엄격한 심사와 면직, 체포, 감금, 학살 등 야만적인 진압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전 동북에 조선인 학교가 도합 710개나 있던것이 1932년에 이르러서는 377개로 감소되였다. 길림성 조선인 사립학교도 308개(종교단체에서 꾸린 사립학교도 포함)였던데에서 1935년에는 231개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보통학교는 많이 늘어났는바 길림성에서 일제가 경영한 조선인 보통학교는 만주사변 전 45개로부터 1936년에는 76개였다.그리고 조선인 학교에서 조선력사교수를 폐지하고, 태극기를 걸지 못했고 조선애국가를 부르지 못했으며 일본어를 국어로 삼게 했다.
세번째 단계; 문화혁명시기 민족말살정책이다. 이시기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강압적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사회주의나라에 무슨 민족의 불평등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민족문제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민족문제의 실질은 계급투쟁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시기는 민족이 융합되는 시기라는 관점을 내들고 소수민족한테 인위적이고 강박적인 융합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은 기타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민족의 언어, 문자, 교육, 문화, 풍속, 습관 등 제분야에서 독립성과 특수성이 무시당하고 한족과 똑같은 통일성, 공통성만 강조하게 하였다. 일단 누가 상대적 독립성을 이야기하면 ‘지방민족주의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였다.
(1) 정치방면; 1966년 주신(모택동의 조카 모원신의 가명)이 오면서부터 연변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는 권력쟁탈을 위해 조선족의 대표인물 주덕해를 ‘대반역자’,‘간첩’등으로 잡았고 층층에서“크고 작은 주덕해”를 타도했으며 무장소동이라는 억울한 사건을 조작하여 연변에서 전면적인 내전을 도발하였다. 당시 조선족은 국외와 사회관계가 있다면 무조건 ‘간첩’으로 잡혔는데 연변에서만도 수천명 간부와 군중이 생명을 잃었고 불구자로 되였으며, 수만명이 련루되여 심사를 당했다.
(2) 경제 방면; 1967년과 1968년은 문화대혁명중 내란이 가장 심한 시기였고 전국적으로 국민경제가 가장 큰 파괴를 당한 시기였다. 조선민족경제도 이 두해사이에 아주 심한 파괴를 당했다. 공•농업생산 총액은 1966년에 비해 1967년에는 6.3%, 1968년에는 그 전해보다 9.4%내려가고, 재정수입은 14.6%, 10.5%내려갔다. 종업원 평균로임은 감소되였는바 1968년이 1967년보다 3.9% 내려갔다.
(3) 언어 방면; 그들은 소수민족언어는 “쓸데없는것”이며 “까마귀소리 같다”라고 하면서‘조선어무용론’을 극력 고취하였다. 그 결과 사회상에서 조선어의 지위가 여지없이 떨어졌고, 연변의 통용어가 되지 못한것은 물론이고 회의에서도 통역이 없었고 문건을 내려보내도 역문이 없었다. 번역기구가 취소되고 조선어문연구기구도 없어졌다. 조선문 잡지는 거의 다 폐간되였으며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원고를 한문(漢文)으로 심의, 결정한다는 규정을 지은 다음부터는 원래의 조선말 신문과 방송이 번역신문, 번역방송으로 되였다. 심지어 도서관에서는 조선문도서를 없애려고까지 했다. 조선어를 혁명해야 한다는 구호밑에 한어는 조선어를 발전시키는 주요한 원천이므로 조선어를 한어와 같게 하는 방향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조선어의 력사적 계승성을 무시하고 조선어발전의 내재적 합법칙성을 위반하면서 한어단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엄중했다. 동시에 한어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도시와 향진(鄕鎭) 등 조건이 허락되는 곳에서는 될수록 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냈다.
(4) 교육 방면; 그들은 민족교육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조선민족의 고급인재를 양성하는것을 취지로 하는 연변대학에 으뜸가는 목표를 두었다. 그들은“민족분렬주의를 실시하는 검은 거점”이라고 하면서 연변대학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교원과 학생의 민족비례를 뜯어고쳤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대학 학생의 민족비례는 조선족이 80%이고 한족과 기타 민족이 20% 좌우였으나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정반대로 되였다. 그리고 민족대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학과목을 취소하였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는‘중국조선족력사’,‘조선근대사’등 학과목이 설치되였으나 이때는 취소되였다. 그리고 조선어 전공학과의 주요한 취지는 조선족 중학교의 어문교원을 양성하는것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조선어 전공학과의 28명 입학생 중 조선족이 11명이였고 한족이 17명이였다. 한족이 조선어 전공학과에 들어오는것은 양성취지에도 맞지 않거니와, 조선어를 모르는 한족이 조선어전공학과에 와서 근근히 몇해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족 중학교에 가서 조선어를 가르칠수 없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였다. 한족학생이 부쩍 늘어나는 바람에 조선어 전공학과에서는 부득불 교수를 한어로 하였으며 심지어 현대조선어도 한어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반면에 한어 전공학과를 중지시키는 통에 조선족 중학교의 한어교원의 원천이 거의 근절되였다.
문화대혁명 전 전국 조선족교육에서는 단일민족학교 형식을 보통교육학교 운영의 중요한 형식으로 삼았으며 민족이 잡거하고 학생수가 적어서 단일민족학교를 꾸릴수 없는 곳에서만 민족련합학교를 꾸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단일민족학교 형식이 ‘지방민족주의’를 조장시키는 형식이라고 했다. 그 대신 민족련합학교 형식을 민족의 ‘융합’을 추진하는것으로 보았다. 1965년 훈춘에는 민족련합학교가 6개소였으나 1975년에는 17개소였고, 돈화는 조선족중•소학교 45%가 한족학교에 병합되였으며, 23%의 조선족 소학교가 없어졌다. 기타 지구도 이와 같은 상황이였다.
한편 학교에서는 조선어문교육이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교수시간도 줄어들었다. 10년제 학교의 과정안에 보면 중•소학교의 조선어 교수시간이 소학교는 1,060교시, 중학교 540교시로서 문화대혁명 전보다 1,000여시간 적어졌다. 교수내용과 교수방법으로 보면 조선어 교수요강은 한족학교 교수요강을 수정하여 리용한것이였고 조선어교과서는 한어작품 번역교재였다.
조선족학교의 간부와 교원대오는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파괴당했다. <<반역자>>, <<간첩>>, <<민족분열주의분자>> 등으로 비판투쟁을 받은 사람은 부지기수인데, 연변대학에서 <<간첩>>으로 된 사람은 29명이나 되며 그에 련루된 사람은 무려 80여명이다. 연길현 제5중학교(현재 조양천 제1중학교)의 교원과 종업원은 76명이였는데 여러가지 루명을 쓰고 투쟁을 받은 사람은 연인수로 무려 45명이였다. 그들은 <<지식이 많을수록 반동이다>>라는 사상의식을 극구 선양하면서 <<머리에 뿌리가 나고 몸에 가시가 돋친>>, <<문화가 없는 로동자>>를 배양했다. 그러한 수요에 따라 어문(조선어도 포함)에서 모주석 저작을 기본교과서로 하였다. 고급중학교에서는 『모택동저작선』, 소학교에서는 『모주석어록』을 기본교과서로 하였다. 물리교과서는 뜨락또르, 디젤유발동기, 양수기 등이 주요한 내용이였고 , 화학은 농업화학, 토양개량, 수학에는 부기와 측량, 조선어는 대비판문장, 소평론, 사상총화 등이였다.
(5) 풍속•습관방면; 문화대혁명시기 모든 전통관념과 결렬하고 사회주의의 새로운 풍속•습관을 수립한다는 기치아래 모든것을 파괴하였다. 문화대혁명전 조선족마을에선 예전의 조선풍속에 따라 관혼상제를 지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의관으로부터 결혼, 생일, 회갑, 장례 지어는 상두막까지 불을 맞아 죽어서까지도 전통을 지킬 수 없었다. 한복이나 치마저고리는 반동적인것으로 되였고 누런 군복이여야 혁명적인것이였다. 결혼 때는 례단으로 『모태동선집』과 호미나 곡괭이가 오갔고, 혁명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였으므로 결혼날 아침까지도 일밭에 나갔다 왔다. 족보를 불사르고 혈육관계까지도 계급관계로 대체되였다.
총적으로 이시기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풍속습관 등 제분야는 뿌리뽑히다시피 되였다. 그런데 가슴 아픈것은 조선족자신이 자각적으로 이런 악과를 빚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국제주의 혁명자의 자태로 자기의 민족적인것을 버리고 자각적으로 동화되였던것이다. 이시기에 투쟁비판을 받은 조선족간부와 군중들은 적지 않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민족절개를 굽히지 않고 자살로써 절개를 지켰다.
4. 중국조선족의 찌든 모습
오랜 력사의 비바람속에서 오늘까지 간신히 지쳐온 중국조선족은 찌든 모습으로 양상되고있다.
첫째 인구문제; 조선족 인구는 1964년의 133만 9,569명으로부터 1990년의 192만 574명에 이르게 된 사실로 보아 중국의 기타 민족의 인구장성속도보다 훨씬 굼뜨다. 1982년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64년부터 조선족인구 발전속도는 겨우 31.77%로서 전국인구의 평균장성속도(45.24%)에 비해 13.47%가 적고, 한족(43.82%), 전국 각 소수민족인구의 평균장성속도(68.24%)에 비해 각각 12.05%, 36.47%가 적다.
조선족 인구의 년평균 장성속도도 전국에서 제일 낮다. 1964년부터 1982년까지 매년 평균증장속도는 겨우 1.5%로서 전국인구의 년평균 증장속도(2.1%)에 비해 0.6% 낮고 전국 소수민족인구의 년평균 증장속도(2.9%)에 비해 1.4%, 한족(2.0%)보다 0.5%낮다.
앞으로 조선족 인구의 증장은 계속 하강선을 그을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조선족의 년령구조에서 중위수가 비교적 높고 소년아동계수(1982년 조선족인구의 28.36%)가 낮으며 로년계수가 높은데다 조선족 인구의 문화구성이 비교적 높기때문이다. 년평균 증장속도를 1.5%로 계산한다면 2000년에는 조선족 인구가 230만 7천여명으로서 겨우 30.7% 증장될것이다. (이 론문을 쓸 당시보다 10년이 지난 오늘 오히려 조선족인구는 증장폭을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증장을 보여서 2백만을 초과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982년 전국 각 민족 의 2000년의 인구예측은 다음 도표와 같다.
전국 각 민족 2000년도 인구 예측표
년도 1964 1982 1990 2000 비례(%)
--------------------------------------------------------
전국 691.220,104 100,391,400 112.3799,513 145.934,900 145.9
--------------------------------------------------------
한족 651.296,000 936.675,000 1042.482,187 1337,806,000 142.8
--------------------------------------------------------
조선족 1.340,000 1.765,000 1.920,597 2.307,000 130.7
-------------------------------------------------------
좡족 8.386,000 13.383,000 14.593,330 21.243,000 159.9
--------------------------------------------------------
회족 4.473,000 7.228,000 8.602,978 11.676,000 161.5
-------------------------------------------------------
투쟈족 525,000 2.837,000 5.704,223 15.265,000 538.1
-------------------------------------------------------
몽골족 1.966,000 3.411,000 4.806,849 5.909,000 173.2
-------------------------------------------------------
묘족 2.782,000 5.021,000 7.398,035 9.007,000 199.4
--------------------------------------------------------
인구과잉으로 세계가 아우성치고있는 오늘날 조선족 인구의 장성속도가 더딘것은 물론 좋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의 자체발전에는 아주 불리한 인소이다. 연변의 2000년의 총인구는 287만, 1,874명으로 예산되는데, 그중 조선족 인구는 107만 3,673명 정도이고 한족과 기타 민족은 180만 8,200명이다. 이제 8년 후에는 조선족의 비례가 39.5%에서 37.4%로 하강될 것이다. 이런 속도로 줄어든다면 조만간에 연변의 조선족도 기타 잡거지구의 조선족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것임을 자명한 일이다.
둘째 경제문제; 경제문제는 민족발전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요 몇년래 연변과 기타 지구의 조선족경제는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통계사업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래에 부득불 1982년의 통계자료를 따를 수밖에 없다.
①조선족의 재업(在業)인구는 91만 8,673명으로서 총인구의 52.07%인데 이는 전국의 재업인구(51.94%)와 전국 각 소수민족재업인구(49.21%)에 비하면 0.10%, 2.83% 높으며 한족의 평균수평(52.14%)과는 0.10%낮다.
조선족의 부재업(不在業)인구는 34만 5,846명으로서 총인구의 19.6%이고 그중 재학생이 8만 3,937명, 가무종사가 15만 1,375명, 승학대기 학생수가 4,027명, 국가통일배치를 기다리는 수가 564명, 취업대기인원이 1만 2,908명, 리직•퇴직인원이 3만 259명, 기타가 6만 2,777명이다.
재학생이 점하는 비중(24.27%)은 전국(18.16%), 각 소수민족(18.84%)과 비교할 때 각각 6.11%, 5.43% 높다. 가무종사인원(43.77%)은 전국(55.21%), 각 소수민족(55.65%)에 비하면 각각 11.44%, 11.88%가 낮다. 승학을 기다리는 수(1.16%)는 전국(0.10%), 각 소수민족(1.14%)에 비해 각각 1.06%, 0.02%가 높다. 국가배치를 기다리는 수(0.16%)는 전국(0..08%), 각 소수민족(0.11%)과 비교하면 각각 0.08%, 0.05가 높다. 취업대기인원(3.73%)은 전국(2.34%), 각 소수민족 (2.03%)에 비해 각각 1.39, 1.70% 높다. 퇴직인원(8.75%)은 전국 (7.92%), 각 소수민족(4.37%)에 비해 각각 0.83%, 4.38% 높다.
②조선족이 각 항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조선족 총인구와의 비례)은 전국,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의 평균수평보다 높다. 농업, 림업, 목축업,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54만 8,340명(59.69%)으로서, 전국(73.66%), 한족(72.89%), 소수민족(85.13%)과 비기면 각각 13.97%, 13.20%, 25.44% 낮다. 이는 조선족 집거구에서의 농업로동생산력이 제고되여 농촌의 일부 잉여로동력이 제2산업, 제3산업으로 전이하였음을 의미한다. 전력, 석탄가스, 수도물생산과 공급에 종사하는 사람이 4,334명(0.47%)이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5만 8,744명(17.28%), 지질탐사 등에 1,841명(0.20%), 건축업에 1만 8,032명(1.96%), 교통운수•우전통신업에 1만 9,108명(2.08%) 상업•음식업•물질판매 등에 4만 7,841명(5.21%), 주택관리•공용사업관리와 복무업에 6,048명(0.66%), 체육과 사회복리사업에 1만 5,744명(1.71%), 교육•문화•예술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4만 3,048명(4.69%), 과학연구와 종합기술복무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589명(0.39%), 금융보험에 3,882명(0.42%), 국가기관•정당과 군중단체에 2만 2,637명(2.50%), 기타 행업에 546명(0.06%)이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 재업인구의 비중은 17.78%로서 전국(11.83%), 한족(12.30%), 소수민족(4.80%)의 평균수평에 대면 각각 5.95%, 5.48%, 12.98% 높다. 이는 연변의 민족공업에 일정한 발전이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전국과 한족, 소수민족의 평균수평과 비교할 때 조선족은 물질생산부문에의 종사보다 비물질생산령역의 인구비중이 비교적 높다. 물질생산부문의 조선족의 재업인구 비중(84.36%)은 전국(94.36%), 소수민족(95.16%)의 평균수평에 비해 각각 10%, 10.80% 낮다. 비물질생산부문 종사인원 (15.64%)은 전국 (5.64%), 소수민족(4.84%) 평균수평보다 각각 10%, 10.80% 높다.
셋째 언어문제; <<연변조선족자치주 자치조례>>와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어문사업조례>>에는 조선어와 조선문이 연변지역에서 위주로 되는 언어문자라고 규정하고있다.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은 <<조례>>를 좇을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 연변의 농촌, 조선족 중•소학교, 신문사, 출판사, 잡지사, 방송국, 텔레비죤방송국, 문학예술단체, 조선학연구실체 등 분야에서는 조선족이 다수를 차지하고있는 까닭에 조선어와 조선문을 널리 쓰고있지만 조선족과 한족이 섞여있거나 조선족이 얼마되지 않는 국가기관, 공장, 광산, 상점, 림업 등 분야에서는 조선어와 조선문을 쓸 상황이 못된다. 연변지역의 많은 공장, 기업소의 사무용어와 일상대화는 일반적으로 한어로 되여있다. 그 까닭은 각 업종의 사무용어, 기술전문용어, 기계와 도구 이름 등이 거의 다 한어로 통용되기때문이며 같이 일하는 타민족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편리하기때문이다. 그리고 회의, 연설, 공문전달을 할 때면 한문으로 되여있어서 그것을 일일이 조선말로 번역하자면 많은 인력과 물력 그리고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시끄러움을 느끼기가 십상이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한어를 알아들을수 있으므로 한어를 쓰는것을 오히려 간편하다고 느낀다. 그래서<<조례>>는 한켠에 밀어놓고 한어를 쓰는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언어사용에서의 동화현상은 날따라 짙어가고있다. 길림성 반석현 반석진 조선족의 언어사용실태를 례로 들어보자. 104명의 중학생을 조사했는데 그중 한어와 조선어를 겸용하는 학생이 88명, 조선어를 모르는 학생이 16명이다. 소학생 426명 중 193명이 언어를 겸용하고 223명이 조선어를 모른다. 26∼35세까지의 34명 중 33명이 겸용하고 1명이 조선어를 모르며 18∼25세의 70명 중 53명이 겸용하고 17명이 조선어를 모른다.
이상의 조사결과로부터 언어동화현상은 나이가 어릴수록 심화되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런 젊은 세대들은 연변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수 있다.
조선말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어의 충격을 받아 조선어사용에 혼란이 조성되여있다. 그런데다가 연변지방 사투리, 방언, 오역된 한자어휘 등 그외 한자어휘까지 뒤섞여있으므로 <<연변조선말>>이 생겨났다. 조선족의 조선어 사용실태를 아래의 몇가지로 나누어볼수가 있다.
① 구두어에서의 한자어휘 람용:<<碑酒>>, <<信息>>, <<電視>> 등의 한어어휘들은 구두어에서 기본어휘처럼 쓰이므로 <<맥주>>, <<정보>>, <<털레비죤>> 등 우리의 말을 쓸 경우 어색한 기분을 주거나 의사소통이 안된다.
② 제멋대로의 한어어휘 직역: 공장장을 <<창장(廠長)>>, 로동자를 <<꿍런(工人)>>, 랭동기를 <<삥썅(氷箱)>> 따위로 쓰고있는데 벌써 일반화되여있다.
③ 조선말 문장구조에 한어어휘 차용: 출근을 <<쌍발(上班)>>, 퇴근을 <<싸발(下班)>>, 휴식을 <<쓔시(休息)>> 하는 등등 수두룩하다.
연변의 조선말은 한어화경향으로 번져서 범벅말이 된데다가 방언(주로 함경도 방언)에 지방사투리까지 욱실거려서 말이 아니다. 그 오염정도는 대학교의 교수, 문인들 입에서도 가끔 튀여나올 정도이다. 구두어에서의 한어와 방언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의 서사어와 탈절현상이 심하게 빚어져 조선어규범화표준이 그네타듯 뒤흔들리고 있다.
넷째 교육문제; 중국 조선족교육은 초보적으로 비교적 완정한 보통교육으로부터 대학교육, 기초교육으로부터 전업교육, 학교교육으로부터 업여교육에 이르기까지 민족교육체계가 형성되여있다. 현재 동3성과 내몽골자치구, 하북성의 조선족 잡거지구에 조선족의 중•소학교가 131개소이다. 학생수는 소학생이 10만 5,700명, 중학생이 5만 9,300명으로서 합계 16만 5천여명이며, 교직공은 소학교에 6,345명, 중학교에 5,136명 합계 1만 1,481명이다.
연변지구의 조선족 중•소학교는 도합 547개소로서 소학교가 435개소, 중학교가 112개소이다. 학생수는 소학교에 7만 3,247명이고 중학교에 4만 7,175명 도합 12만 432명이다. 교직공 수는 소학교에 4,691명, 중학교에 4,580명 도합 9,271명이며 승학률은 소학교가 96.4%, 중학교가 56.6%이다.
중국 조선족교육은 비교적 완정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교육발전이 경제발전에 적응되지 못하고있으며 사회발전 및 민족자체발전의 수요에도 적응되지 못하고있다.
① 교육구조 및 학교구성이 불합리하다. 몇년래 중등교육구조의 개혁에 따라 조선족의 직업기술교육은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내지의 선진지구나 같은 지구의 한족 직업기술교육과 대비하면 발전속도가 늦고 기복이 크며 학교질량이 높지 못하다. 동3성 조선족 산재지구에 3개소(각 성에 한개소씩)의 직업학교가 있고 연변지구에 33개소(한족도 포함)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규모가 크지 않고 학생래원이 적으며 어떤 학교는 해산해야 할 상황이다.
② 농촌에서 조선족학교는 지나치게 분산되여있으며 구성이 불합리하고 학교규모가 갈수록 적어 학생래원이 결핍하고 학생들은 제대로 배울수 없다. 이는 인력, 재력, 물력의 과중한 랑비를 조성할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육의 질 제고에 직접 영향을 주고있는데, 조선족 교육위기의 주요한 한방면이다.
③ 소학교와 초급중학교의 교육질량이 하강되고 초급중학교에서의 량극분화와 학생류실 상황이 엄중하다. 1982∼1986년 심양시 조선족학교와 한족학교 학생의 급격률을 보면 한족 소학생이 97.4%, 조선족 소학생이 93.3%이고 한족 초급중학생은 77%, 조선족 초급중학생은 64%이다. 1985년 료녕성 조선족 소학교의 졸업생 승학시험의 평균점수는 78.87점으로서 전성 평균점수보다 2.83점이 낮다. 초급중학교 단계의 량극분화는 날따라 엄중해져 상당한 부분의 학생들이 초급중학교에 올라와서는 학습에 따라가지 못해 중도에서 퇴학한다. 초급중학교생이 만 3년 재교공고률은 적지 않은 농촌이 60%좌우이고 개별적 학교가 50%밖에 안된다. 이는 조선족지구에서 9년제 의무교육을 진정으로 실현하는데 직접 영향을 준다.
④ 조선족 초급, 고급중학생들이 졸업 후 더욱 높은 학교에 가서 계속 학습하거나 학교를 나와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적응성이 낮다. 조선족학생, 특히 연변지구의 조선족학생들은 한어수평이 낮고 읽고 쓰는 능력이 차하므로 중등전문학교나 대학으로 간 후 한어말교수를 받아들이는데 직접 영향을 받는다. 사회로 나간 학생들은 한어수평이 낮은데다 로동기술능력이 결핍하고 취업에서 일련의 제한을 받고있으므로 취업 후에라도 능력을 발휘할수 없다.
⑤ 대학입학률이 날따라 떨어지는 추세이고 각 과목 평균 시험점수가 낮다. 1985년 료녕성 대학입학시험 각 과목성적에서 조선족학생의 평균성적과 급격률은 외국어와 조선어문을 내놓고 기타 과목에서 한족학생보다 평균성적과 급격률이 낮다. 연변지구 조선족학생의 중점대학과 보통대학의 록취률은 몇해째 뚜렷한 하강선을 긋고있는 추세이다. 연변학생의 문과와 리과의 시험과목 평균성적과 급격률도 전성의 평균보다 낮다.
다섯째 풍속•습관문제; 조선족은 아마 모방의 <<대가>>인 듯싶다. 해방 후 40여년간에 조선족들은 남의 것을 과대숭상하고 자기를 천시해왔으므로 민족의 참모습을 스스로 잃었거니와 빼앗겼다. 복장은 물론 집구조, 생활방식, 음식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것을 상실해갔다. 이미 한복은 무대우에서나 볼수 있고 녀성들의 치마저고리는 명절이나 그 어떤 경축행사 때만 볼수 있을뿐이다.
또한 능가선무(能歌善舞)라는 조선족은 오늘날 춤과 노래에서조차 전통을 잃어가고있다. 최봉득씨가 연길시의 중학교 학생(초급중학생 172명. 고급중학생 115명)과 모 대학의 37명 학생과 51명 현임교원, 그리고 농촌학교 민영교원 37명을 대상으로 민의측험을 하였다. 그 결과 <<민족무용을 출 줄 아는가?>>는 물음에 초급중학생 73%, 고급학생 73%, 대학생 54%, 현임교원 26%, 민영고원 54%가 <<모른다>>고 대답했다. 또 <<오락장소에서 독창을 할 경우 조선족노래를 부르겠는가 아니면 타민족의 노래를 부르겠는가?>>라는 물음에는 초급생의 56%, 현임교원 20%, 민영교원 56%가 <<타민족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이상의 통계에서 보다싶이 중국조선족의 문화수용자세가 바르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감지할수 있다. 이는 민족정신의 곤핍과 무지를 설명해주고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민족적 음식문화의 영향보다는 한족 음식문화의 영향을 더 깊게 받고있다. 우선 한국의 음식문화 영향과 자연환경에 제약으로 말미암아 해어보다 육류를 많이 먹고있다. 돼지고기 소모량이 1950년대에는 매인 년평균 4.2kg이였는데, 1984년에 오면 16.24kg으로 증가된것이 그 실례이다. 료리로는 한족료리의 수법을 받아들여 볶음채를 먹기 시작하였고 밀가루음식이 많이 식탁에 오르게 되였다. 명절, 제사 때는 두부전,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등으로 만든 우리 료리가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지만, 총적으로 식생활에서 우리의 음식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있는 추세이다. 볶음채가 김치, 국 등과 함께 부식의 기본으로 되였으며 물만두, 기름튀기 만두 등이 일상음식으로 되면서 젊은 세대들속에서 설기나 증편은 할줄 몰라도 물만두는 누구나 다 빚을수 있을만큼 익숙한것으로 되였다. 조미료도 이전의 생강, 소금, 간장, 후추 등 단순한 몇가지로부터 팔각, 산초, 부추꽃, 고수풀 등 다른 민족이 즐기는 조미료를 도입하여 10여가지로 늘어났다.
이상에서 보다싶이 조선족은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어 한족과 기타 민족의 대해속에서 자기를 잃어가고있다. 순수한 자기의 언어, 자기의 교육체계가 흔들리고있으며 아울러 풍속습관과 음식까지도 동화되여가고있다. 오늘날 조선족의 모습은 동방례의지국, 백의민족의 모습과 멀리 떨어진 찌든 얼굴, 병색이 완연한 살결이다.
5. 중국조선족의 출로
찌든 모습, 병색이 낀 살결을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것은 우리앞에 나선 급선무이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의 출로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병근을 짚어내야 할것이다.
13억 인구를 수용하고있는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쉼없이 가해지는 동화의 충격속에서 조선족이 민족공동체로서의 립체적 자세를 정립하고 참된 삶을 펴나간다는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첩첩한 산, 겹겹한 물을 헤쳐가야만 버드나무 우거지고 백화가 만발한 무릉도원을 볼수 있듯이 피나는 노력의 대가가 없이는 조만간에 자기의 민족적 주체성과 동질성을 잃어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조류를 직시하고 문제점들을 사정없이 파헤치고 갖은 방도를 대여 나아갈 길을 타개해야 할것이다.
우선 타향의식을 버리고 본토의식을 세워야 한다. 중국조선족은 월강이민으로서 조선반도에 대한 사념을 버리지 못하고있다. 이는 동방민족의 사향의식의 표현이다. 연변자치주내의 한 백화점 통계에 의하면 1991년에만 해도 3천원을 넘기는 양복이 매대에 내놓기 바쁘게 20여벌이나 팔렸고 천원좌우의 양복이 55벌이나 팔렸다고 한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연길시의 소비수준은 성내 8개 도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는데 전성 소비지출의 23%의 자리를 차지하고있다고 한다. 오늘날 연길시에 촘촘히 늘어선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무도청 등 오락시설앞에서 아연해지는 해내외 관광객들의 소행에 동감이다. <<조선족은 잘 벌고 돈도 잘 쓴다>>고 소문이 나있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돈이 많다는데 비해 그럴듯한 기업소나 상업실체같은 것을 일떠세운것은 많지 못하다. 먹고 입고 노는 데는 남보다 앞서지만 통이 크게 사업을 벌리는 데는 아주 등한하다. 타향의식은 중국조선족으로 하여금 주인공자태로 삶의 터전을 굳히지 못하게 방해하고있다. 흑룡강성 수화현 조선족들이 근 몇년째 한국 등 외국에서 벌어온 돈은 인민폐로 무려 1억원이 되였는데 실업체 하나 세우지 못하고 거의 다 탕진한 상황이다. 그리고 연변의 돈은 관내 사람들이 벌어간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떤 위험의식도 느끼지 못하고있다. 위험의식이 없고 새 생활에 대한 개척의식이 없는 민족으로 번지고 보면 앞날의 운명은 불보듯 번연한것이 아니겠는가!
력사에 대한 무지와 자기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지비심이 지어 조선민족의 음식문화에 대한 거부까지도 낳고있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중 열에 아홉은 한국음식에 실망하고있다. 중국료리처럼 기름지지 못하다는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되여가고있는 오늘의 한국음식문화가 중국 음식문화에 침투되고있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있다. 1980년대로부터 민족식료품공업이 회복 발전하고, 재래식 음식이 사회화•상품화하면서 전통음식이 울타리를 벗어나 관내에도 진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음식은 짠지, 김치, 국수, 불고기 등이다. 특히 짠지는 연해지구로부터 서북변강에 이르기까지 그 맛과 깨끗함으로 한족음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있다.
오늘 중국조선족의 자세를 바로잡고 주체성을 세우고 조선반도의 민족과 동질성을 영원히 보장하려면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족의 각급 학교 특히 중학교와 소학교는 조선족의 주체적 위상과 동질성을 살려감에 있어서, 또는 그것이 후세에까지 면면히 이어져가게 함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일으키는 분야이다. 하북성 진황도시에는 2백여호밖에 안되는 조선족 마을이 있다. 그들은 완전히 한족의 사면포위에 들어있으면서도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삶을 빛내고있다.
보다싶이 자기의 글과 말을 가르쳐주는 민족학교가 없다면 미래 중국에서의 조선족은 얼마나 가련한 처지에 떨어지겠는가. 그리고 교육내용에서 반드시 조선력사와 중국 조선족력사에 대한 교육을 중요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 지금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중 태반이 력사에 대해 문외한이다(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만 가르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동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말과 글로 된 방송, 털레비죤, 신문, 문학예술 등 언어광장을 보다 폭넓고 보다 훌륭하게 가꾸어야 할것이며 이미 있는 언어지도기관과 언어연구실체를 발전시킬수 있는 보완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선어문사용과 조선어문교육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상시킬수 있다.
이상의 사업을 잘할수 있는 담보는 경제적 뒷받침이다.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모든 신문, 방송, 출판 등 사업은 모두 중국정부의 재정지출로 운영되고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발전중에 있는 나라로서의 국가경제상황은 우리의 요구를 절대 만족시켜줄수 없다. 1980년대 초에만 하더라도 필자가 몸담고있는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에서는 매년 20여종의 문예서적을 출판했는데, 지금은 10여종도 어렵게 되였다. 민족도서 출판량이 대폭 주는 형편에서 중국조선족은 정신적 식량에 굶주리고있다.
경제면에서 조선반도의 지원을 바라지 않을수 없다. 벌써 한국의 경제적 부홍은 중국조선족한테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켰고 아울러 중국내 기타 민족(한족을 포함)의 안목속에서 조선민족의 위치도 훨씬 높여주었다. 대련시 조선족 유치원에는 36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그중 한족이 6명이나 된다. 이는 조선민족의 오늘 중국땅에서의 위치를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중국의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겨레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질민족이다. 그리고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 있는 조선민족 역시 그러하다. 오늘날 시간이 갈수록 좁아지고있는 지구우에서 우리 민족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면서 공동으로 발전해나가는 길이 민족부흥의 길일것이다. 특히 중국조선족으로 보면 이 길만이 유일한 희망의 출로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3 ]
-조선족 출신 주장이나 주석을 배출하는 것이 힘들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공생할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