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12일 서울 서초동 능인선원에 있는 죽음 체험 수련장 ‘지구별여행자’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유서, 묘비명, 자서전을 쓴 후 입관 직전의 모습. 맨 끝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가 서 있다. |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나는 지금 죽음 체험 수련 중이다. 지난 5월 12일 죽음체험수련원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대표 김기호)가 진행하는 행사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지구별여행자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능인선원 내 방 한 칸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체험 참석자는 50~6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 두 명과 30대 후반 부부도 있었다. 자서전 쓰기, 죽음 명상, 유언장 쓰기, 묘비명 쓰기, 입관 체험 등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4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지구별여행자는 매달 한 번씩 죽음 체험 수련을 한다. 개별 신청자도 있고, 기업이나 관공서 등 단체 체험도 한다. 2002년부터 총 1만5000명이 죽음 체험을 거쳤다고 했다.
내가 취재를 위한 체험을 한 이날, 미국의 인터넷 매체 VICE라는 곳에서 촬영단이 찾아왔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입관 체험 문화는 한국에만 있어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신기해 한다. CNN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자신이 촬영되길 원치 않는 참가자는 미리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최대한 죽음 체험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오후 4시50분. 조용한 음악과 함께 자서전 쓰기가 시작됐다. 출생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과 출산, 회사 입퇴사 등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는 시간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력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 여백을 한 자 한 자 채워 가며 내 인생을 슬라이드처럼 돌려본다. 두 번째 자서전 양식이 놓여 있다.
‘내 인생의 3대 뉴스는?’
‘이번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번 삶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만약 나에게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은?’
수련도우미이자 자원봉사자 하지원(여·50대)씨가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2년 전 이맘때 임종 체험을 했다고 한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동기 때문에 자살시도를 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1차 시도에 실패한 후 이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한번 죽어 보십시오” 하고 죽음 체험을 권유했다. 하씨는 죽음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고 죽으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죽음 체험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간호학을 공부한 그는 전공을 살려 뒤늦게 웰다잉 프로그램 보조강사로 일하는 중이다.
오후 5시30분. 김기호 대표의 강연이 시작됐다. 일명 죽음학 강의. 그는 “죽음도 하나의 여행상품”이라고 했다. 우주적 존재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 체험을 ‘지구별 여행’이라고 불렀다. 그는 100장이 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넘겨가며 차분히 강연을 이어갔다. 동영상과 애니메이션, 사진과 통계 자료를 활용한 강연은 흥미로웠다. 강연의 요지는 “2차원에 사는 개미들에게 3차원에 사는 우리의 존재가 안 보이듯, 죽음은 현실의 너머에 있고 죽음 체험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 여행과 같다”는 것이다.
오후 6시30분. 수의를 갈아입는다. “수의는 아래부터 입으십시오.” 금색 보자기를 풀어 수의를 보자 죽음 체험을 한다는 게 실감난다. 태어나 처음 만져보는 수의를 내가 직접 입는 기분, 묘하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다. 죽은자는 갖고 갈 게 없다. 양쪽 발목을 묶고, 허리까지 꽁꽁 동여맸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참석자들에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 주고 형광등을 끈다. 나의 부고 일지, 유언장, 묘비명을 쓰라고 했다. 하나씩 써 나갔다.
속으로 ‘진짜 유언장도 아니고, 가상 체험인데 설마 99%가 울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나의 부고 일지를 먼저 쓴다. ‘나는 오늘 (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 )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나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 )일 것이다.’ 이어서 유언장을 쓴다. 내 앞에는 편지지 두 장이 놓여 있다. ‘진짜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상상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이 하나둘 스친다.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여행지들이 좌르르 떠오른다.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담담하게 시작한 유언장 반 장이 채워지면서 점점 감정이입이 돼 간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에게 이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코끝이 시큰해진다.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참으려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흐른다. 도우미가 조용히 다가와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놓고 간다. 어느새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다.
오후 7시30분. 입관할 시간이다. 산 중턱에 내가 들어갈 관이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를 따라 500미터 정도의 숲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영혼의 거리는 3미터입니다. 앞사람과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나의 묘비명과 유언장을 들고 산으로 향한다. 어느새 어둑신하다. 서쪽하늘에 주황빛 노을이 서려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빌딩의 조명이 하나둘 켜진다. 바람이 차다. 싸한 공기가 감싸면서 오한이 느껴진다. 내 관 앞에 섰다. 관 속에 들어갔다. 도우미 두 명이 다가와 흰 천으로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관 뚜껑을 덮는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쾅! 쾅! 쾅!” 관 뚜껑 위에 망치질을 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이따금 김기호 대표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1.14㎡(약 0.35평)의 공간에 누워, 나는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을 이렇게 먼저 가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20분? 30분? 시간 개념이 무화됐다. 누군가 꺼내 주지 않으면 나는 관에서 나갈 수도 없다.
“자 이제, 당신은 다시 태어날 시간입니다.”
관 뚜껑이 열린다. 먼발치 도시의 조명에 눈이 부시다. 일어나 앉는다. 봄밤 바람이 피부에 확 닿았다. 새롭다. 바람에 풀꽃들이 한들거리는 것도 새삼스럽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먼 여행을 다녀왔다.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8
죽음 배우는 사회
죽음책 쏟아지고 죽음체험 해보고 웰다잉 강사 키우고 죽음준비학교 만들고…
‘웰다잉(Well-dying·아름다운 마무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웰다잉 칼럼니스트’라는 신종 직업도 생겼고, 복지재단들은 웰다잉 전문강사를 적극 육성 중이다. 전국 복지관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죽음준비학교’를 부지런히 연다. 정부 역시 ‘웰다잉’에 무게를 두고 각종 정책에 이를 반영하는 추세다. 지난해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인문한국지원사업단(HK)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것으로,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향후 10년간 매년 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또한 지난해 초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을 창립, 존엄사와 임상실험 등 생명을 둘러싼 첨예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왜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일까. 오진탁 생사학연구소장은 “삶의 질(웰빙) 문제를 넘어 죽음의 질(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회 지도층의 자살이 늘고, 학교폭력이나 왕따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도 죽음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요소”라고 밝혔다.
웰다잉은 노인이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웰다잉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현상학적·인식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로,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부류다. 또 한 부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등 인생의 마지막 길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들이다.
먼저 전자를 보자. 이들에게 죽음 공부는 ‘삶 공부’와 동의어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고 임종체험 등을 통해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사는 것이 목표다. 죽음체험수련원인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과거에는 자살을 시도했거나 죽음이 머지않은 노인 등 물리적인 죽음과 가까운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20대도 찾아오고 30대 젊은 부부도 많이 온다. 기업 등 단체 체험 역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삼성전자 서비스, 한화생명, JTBC 등의 기업체로 찾아가 죽음 체험 교육을 했다. 임종 체험자가 남긴 소감문을 몇 개 보자.
“삶은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을 100년, 1000년 살 것같이 집착하면서 산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심하면서 겸손하게 살겠습니다.”(정희영·57)
“방향성 없는 ‘성공’에 집착하던 내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죽음을 경험하신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장소현·22)
한국죽음학회의 성격도 비슷하다. 명칭과는 달리 연구자 중심이나 학술적인 단체가 아니다.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장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자”는 게 목표다. 2005년 창립 당시 최준식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음부터 배워라.”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는 ‘한국죽음학회’ 사무실은 현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대표 손명세·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사무소로 쓰고 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식물인간이나 질병의 말기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두는 의향서다. 병원에 입원해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달지 않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겠다는 사람들이 의식이 건강할 때 미리 작성해 두는 것이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름: )는 명료한 정신 상태에서 직접 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진단과 치료에 대하여 나 스스로의 의사 표시가 불가능해질 때 담당 의료진과 가족들이 이 사전의료의향서에 기록된 나의 뜻을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실천모임은 3년 전 민간단체로 출범했는데, 지금까지 1만명 정도가 이 의향서를 작성했다. 사무실(02-2281-2670)에 전화하면 우편으로 의향서 서식을 무료로 보내준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후 ‘사전의료의향서’와 동봉된 두 장의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확인증’ 역시 본인이 보관한다. 8000명까지는 실천모임 사무소에서 보관했지만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가 있어 더 이상 보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전의료의향서 자체는 법적 효력이 없으나 판례법상 효력을 갖는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위급한 병으로 입원할 경우 병원에 의무기록과 함께 첨부하면 중대 자료가 될 수 있다.
지난 5월 13일 오후,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을 찾아갔다. 실천모임은 웰다잉에 관심있는 자원봉사자 12~13명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한 대뿐인 전화기에서 쉴 새 없이 벨이 울렸다. 자원봉사자 권창중(69)씨와 틈틈이 대화를 나눴다. 그 역시 아내와 함께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뒀다고 했다. 그는 “병원에서 불필요한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집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으려 한다”고 했다. 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70대로, 작성 이유는 권씨와 비슷하다고 한다. “자식들은 처음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여러 번 설득 끝에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70대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백발 단발에 금테 안경을 쓰고 빨간 립스틱을 곱게 바른 그는 우아했다. 노부부의 사랑과 존엄사를 다룬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사는 장영자(75)씨. “참 고우시다”고 말을 건네자 “우리 바깥양반 아프기 전에는 더 고왔는데”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 집은 전화가 잘 안 돼. 할 때마다 통화 중이야. 그래서 찾아왔어”라고 했다. 그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기로 한 것은 병상에 있는 남편을 보면서다. 그의 남편은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다. 큰 병원 세 곳을 전전하다가 치료 가능성이 희박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저 짓 안 하려고. 딸이 둘인데, 내가 쓰러지면 병원에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어. 병원에 입원하면 살아있는 사람을 너무 고생시켜”라며 “내가 친구들 여러 명한테 바람 넣었어. 나 따라서 이거(사전의료의향서) 쓴 사람 많아”라고 말했다. 그는 “시신기증도 하려고. 잘 살았는데 뭘 더 바라겠어. 아무 여한 없어”라며 자리를 떴다.
전문가들은 ‘웰다잉’을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부터 버리라고 충고한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죽음이 슬프고 두렵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죽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하고, 생사문제연구소 오진탁 소장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오 소장은 “한국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고 지적한다.
김명민과 하지원 주연의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 단적인 예가 나온다. 극중 직업이 장례지도사인 하지원은 바람직한 죽음 문화 정착을 위해 입관체험을 진행하지만 노인들의 거센 항의로 행사가 중단된다. 노인 참가자들은 “나보고 죽어보라는 거냐. 노인네들 모아 놓고 희롱하는 거냐”며 폭언을 해댄다. 기자가 월간조선 근무 당시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04년 호스피스 간호사 최화숙씨가 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발간 직후 독자들의 항의를 종종 받았다. “아름다운 죽음이 말이 되냐? 왜 재수 없게 그런 제목의 책을 냈냐”는 항의였다. 화장장이 들어서면 인근 땅값이 떨어지고, 엘리베이터에 ‘4’ 대신 ‘F’가 적힌 것도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오진탁 소장은 “죽음 준비, 죽음 체험이라는 직접적 표현 대신 ‘웰다잉’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웰빙’의 연장선상에서 ‘웰다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무조건 외면하는 풍조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미국 대부분의 주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은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제도가 허용돼 있고, 일본 역시 1998년부터 사전의료의향서를 존중하기로 결정했지만, 한국은 사전의료의향서에 대한 허용 지침이 없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2009년 김할머니 사건으로 촉발된 존엄사 논쟁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김할머니 사건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가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자녀들이 김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며 소송을 건 사건이다. 김할머니는 입원 전 자녀들에게 “혹 내가 식물인간 혹은 의식불명 상태가 되면 인공호흡기를 끼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대법원은 유가족의 손을 들어줘 연명치료 중지를 인정했다. 김할머니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당장 생명이 위독하다는 병원 측의 말과는 달리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만에 존엄사했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신상진 의원과 김세연 의원이 존엄사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일단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다. 생명경시 풍조를 낳는다는 이유다. 또한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국가의 생명권 보호에 관한 헌법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도 있다. 다시 말해 존엄사는 국가의 생명보호의무와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된 제도화 방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사위원회(이하 생명윤리심의위)에서는 지난해 12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윤성·서울대 의대 법의학과 교수)를 구성했다.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협의체인 이 위원회는 매달 1회 이상 논의를 거쳤으며, 5월 29일 최종 공청회를 갖는다. 공청회에서 합의된 사항을 생명윤리심의위에 보고할 예정이며, 이를 기반으로 제도화 여부와 가이드라인을 결정할 방침이다.
존엄사의 제도화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정의, 생명의 절대성과 사회적 효율성 등 기본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소설가 서영은은 일찌감치 이런 유서를 써 뒀다.
“의식이 없을 때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며, 장례는 가족 친지들과 간소하게 치를 것이며, 화장한 재는 산의 나무 밑에 뿌려서 거름이 되게 해 주면 좋겠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9
죽음체험수련원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 “사(死)테크를 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구별여행자는 한 출세지향주의자의 대대적인 전향에 의해 탄생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김기호(48) 대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대한항공에 입사해 기획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6년 가을까지만 해도 출세를 향해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엘리트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그가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은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다. 이후 그는 어린 시절에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냈다. 더 늦기 전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라 호주 퀸스랜드대학에서 호스피스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귀국한 후 1999년부터 북한산 인근에서 봉사자들을 모아 죽음 교육을 시작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을 주제로 진행한 교육에 관심과 호응이 점점 늘었다. 그는 “행복해지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아름다워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사(死)테크라는 말을 씁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17세부터 죽음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빛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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