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고려사는 기원 927년(后塘天成2년) 오월왕 전류(钱鏐)에 의해 최초로 세워졌으며 당시에는 《헤인선원(慧因禅院)》라고 불리웠다. 고려사는 항주의 정자사(净慈寺)보다 27년 뢰봉탑보다 48년 륙화탑과 개화사(开化寺)보다 43년 앞선 오월왕실의 최초로 되는 불교공사였으니 이는 고려사가 나중에 화엄종제일산(华严宗第一山)이란 중요한 위치에서 교종중흥(教宗中兴)의 중심이 될수 있는 기반이였다.
당조말년으로부터 시작한 전란 및 회창법난(会昌法难) 등 불교말살정책으로 중국에서의 불교경전들이 회멸성적인 파손을 당했다. 그때 항주에 수도를 두고 세력을 확장하게 된 오월국왕실에서는 불교를 대대적으로 숭상하고 불교발전에 큰 중시를 돌렸으며 중국에서 소실된 불교경전들을 복구할려고 왕실에서 직접 고려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서 경전들을 요구한다. 오월지역은 동남연해에 위치해있으며 춘추전국시기에 벌써 조선업이 태평양지역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여 이 지역 선민들은 세계적으로 제일 처음으로 해양을 정복한 민족중의 하나이고 중외문화교류력사상 이 지역은 "해상실크로드"의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월지역은 고대로부터 조선반도 일본 및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동남아 남아세아지역과 밀접한 경제문화교류가 있었다. 불교적인 측면에서 볼때 오월불교는 줄곳 대외문화교류활동을 중시하였으며 력사적으로 오월지역과 해외불교문화교류는 매우 활발하였으며 오월불교자신은 이러한 문화교류과정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
상술 기록에서부터 중국대륙 동남연해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인 유리한 우세를 빌어 오월국은 조선반도하고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는 정경을 보아낼수 있는데 그중에서 주로 오월지역에 정착생활을 하고 생을 마감하면서 오월불교 및 중국불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제관과 의통의 행적을 례로 들면서 조선반도의 불교문화발전이 일방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흡수가 아니라 중국불교문화를 흡수 발전시킨후 다시 중국불교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점도 있다는것을 강조하고 싶다.
력사상 대부분의 중한불교의 교류는 주로 한국승려들이 개인적인 신분으로 중국에 와서 불법을 구하고 공부한후 본국에 돌아가 불법을 전파하는 것이였지만 이와 달리 제관의 중국행은 오월왕의 요청에 의해 당시 중국에서 류실되고 조선반도에 보존된 천태경전을 다시 중국에 보내오는 즉 고려불교가 중국불교에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국가적인 행위란것이 중요하다. 제관의 중국행은 중국불교력사상 중흥천태(中兴天台)에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제관의 중국행이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중국불교제일종(中国佛教第一宗)으로 알려진 천태종력사 및 천태종의 중한불교교류력사를 간략하게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중국력사상 진수시기(陈隋之际) 남북조불교(南北朝佛教)의 충돌과 융합을 거친후 불교사상리론의 통합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기초상에서 최초의 중국불교종파인 천태종이 형성 되였다. 천태종사상의 근원은 룡수(龙树)의 대승중관사상(大乘中观思想)인데 혜문(慧文)이 처음으로 창립하고 남악혜사(南岳慧思)의 발전을 거쳐 최종에 지자대사(智者大师) 지이(智顗)에 의해 확립 되였다. 지이(538—597)는 《법화경(法华经)》을 중심으로 남북조불교의 의학(义学)에 근거하여 특별히 혜문의 “일심삼관(一心三观)”및 그 은사인 혜사의 “십여사(十如是)”설과 “선의쌍수(禅义双修)”의 주장을 발전하면서 “원융삼제(圆融三谛)” “일념삼천(一念三千)” “성구선악(性具善恶)” “지관쌍수(止观双修)”등 사상을 제출하고 천태종의 불학리론기초를 확립 하였다. 지이가 확립한 지관병중(止观并重)의 천태종리론체계는 리론사유방명에서 당시 철학사상계의 최고수준에 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실천방면에서도 탄탄한 실력과 온건함을 보존하였기에 천태종의 수당시기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후로 꾸준한 발전을 거쳐 오다가 당말오대(唐末五代)에 와서 중국불교의 한차례의 회멸성적인 타격인 회창법난(会昌法难)을 겪고 쇄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북송초에 들어서서 비록 천태승 의적(义寂)이 천태종을 계승받았지만 경전의 대량류실로 정상적인 교리전습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이것이 바로 제관이 중국에 오기전의 중국천태종의 상황이다.
중국에서 류실된 천태종경전을 해동고려국에 가서 찾을수밖에 없는 원인은 바로 조선반도는 오래전부터 중국천태종과 교류가 있었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서 천태사상을 배우고 또 그 경전들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현광(玄光)법사를 비롯해서 수십명에 달하는 승려들의 끊임없는 구법(求法) 학법(学法) 전법(传法)활동의 주도하에 중한불교의 빈번한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 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천태법화(天台法华)사상의 발전도 가속화 하였다. 통일신라시기의 원효(元晓) 등의 천태법화사상의 연구기초상에서 자린(子麟)이 전달한 지자대사의 천대경전과 더불어 고려시기에 천태교리는 큰 발전을 가져왔으며 제관 의통 덕선 지종 의천 교웅 등 인물들을 배출할수가 있었다.
제관이 중국에 오면서 많은 중요한 경전들을 들고 왔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중요한것은 지론소(智论疏) 인왕소(仁王疏) 화엄골목(华严骨目)과 오백문(五百门) 4부 경전이다. 고려왕은 제관한테 만약 중국에서 제관의 의문에 해답할수 있는 인물이 없으면 경전들을 다시 고려에 들고 오라는 밀령까지 내렸을 상황이다. 제관이 들고 온 4부의 경전은 아주 높은 가치가 있었는바 바로 그 경전들이 돌아옴으로 하여 중국천태종은 비로서 다시 흥성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관은 천태산에 머무는 동안 의적과 함께 천태종교리에 관해 많은 공부를 하면서 그 자신이 일생동안 정통한 천태사상을 반영한《천태사교의(天台四教仪)》란 저서를 남기면서 후세의 천태종 승려들한테 아주 좋은 종파입문서(宗派入门书)가 된다.
의통(927—988)은 제관과 동시대의 인물이고 비슷한 시간대에 오월지역에서 활동하고 오월불교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끼친 또 다른 고려승이다. 의통의 중국행은 비록 제관처럼 국가적 측면의 불교교류행사는 아니였지만 그가 중국에 머물은 시간이 제관보다 길고 나중에 녕파에 보은선사(宝云禅寺)를 창시하고 천태종16조세존(世尊)으로 되는 점에서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력의 중요성을 알아볼수가 있다. 또 제관이 의적과 함께 천태산에서 천태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면 의통은 천태종이 천태산를 벗어나 타지역으로 확장하는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개보원년开宝元年(968)년 의통이 사명(지금의 녕파)에 정착해서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선후로 태평흥국사년太平兴国四年(979)에 지례(知礼)를, 옹희원년雍熙元年(984)에 준식(遵式)을 제자로 받아 들이는데 이들이 바로 후세에 천태종명맥을 계승해 내려간 중요한 인물들이 였던것이다.
그뒤로 백여년후 또 한명의 고려승이 오월지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천태종을 고려에 창립하는데에 중요한 공헌을 할뿐더러 당시 경전 소실이 아주 엄중한 중국불교 화엄종《华严宗》이 다시 부흥할수 있도록 중요하고 관건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의천 이다.
기원 1055년, 고려왕 문종왕휘(文宗王徽)의 넷째아들로 태여난 의천법사(义天法师)가 어려서부터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할것을 꿈꾸면서 당시 항주일대에서 유명했던 정원법사(净源法师) 등과 서신왕래를 해오다가 기원 1085년에 끝내 송나라 상인의 상선에 몰래 올라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오게된다. 뒤늦게야 소식을 알게 된 고려왕실에서 왕자의 신분에 맞는 격을 차려서 사절단을 배동시켰는데 송나라 조정에서도 매우 큰 중시를 돌리고 특별배동관원을 파견하여 의천법사가 중국에서 널리 불법을 구할것(游方求法)을 허락하였다. 의천대사의 구법활동은 송나라 국경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관청 즉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송나라 조정에서는 의천의 구법활동을 하나의 외교사절활동으로 대하였다. 송나라 건국초반 “선남후북”의 정책원인으로 북방의 거란 료나라는 세력을 키우면서 나중에 송나라의 큰 우환이 된다. 순화오년(994)과 함평륙년(1003) 고려국은 료나라의 침략을 걱정하여 두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서 송나라 조정에서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켜 료나라를 견제해줄것을 요청하였지만 송나라 조정에서 아무런 군사행동도 없는것에 크게 실망하고 송나라와의 조공관계를 중단하게 된다. 료나라의 도종(1055-1101)통치시기 료나라 국운의 쇠퇘로 고려왕실과 송조정이 다시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회복할것을 도모하던 시점에서 이천의 구법활동을 빌어 순수한 종교적 색채를 초월한 서로간에 “량국우호와 량국관계의 정상화를 희망한다는 태도”를 보여줄려는 의도가 명확하였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 의천의 구법활동은 아주 효율적으로 진행될수가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원만한 성과를 거둘수가 있었다. “四海同一家,何此亦何彼”이는 이천의 구법활동이 객관적으로 조성한 사회 영향력이였으며 구법활동의 정치적 목적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천태종을 창시한 의천이 출가해서 처음 접한것은 사실 화엄종계렬이였으며 출가한후 줄곳 란원(烂圆)법사를 모시면서 화엄경전을 공부하다가 문종삼십년(1076) 경덕왕사란원이 입적한후 그뒤를 이어 독립적으로 화엄강좌를 하게 된다. 의천은 화엄가로 출가하였고 그의 전 생애를 화엄과는 분리할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여 있었다. 하지만 그어게 있어 교와 관을 함께 닦는 법화천태학은 또 하나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의천은 성상의 겸학과 교관의 병수를 강조하여 겸과 병을 그의 사상적 과녁으로 삼았다. 그가 둘 이상을 겸 혹은 병하고 모든 방면에 통하려고 했던것은 고려 당시 불교의 자종 우월주의 혹은 자종 중심주의 벽을 허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엄가였던 그를 화엄종에 가둘 필요는 없으며 동시에 천태종을 창시했다고 해서 그를 천태종에 가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의천은 입송구법이전에 이미 많은 경전들을 탐독하고 그 연구가 정통하였을 뿐만아니라 유가 도가를 비롯한 중국백가지설에 대해서도 깊게 리해를 하였는바 그의 학술은 화엄 천태에만 국한 된것이고 아니고 그의 입송구법은 근근한 문학(问学)이 아니고 발전과 전파라고 할수 있다. 이런점에서 바로 의천이 정원법사하고 항주고려사에서 화엄경전을 연구하는 동시에 유성법사 자변법사 등과 천태경론을 연구하게 됨을 충분이 리해 할수 있으며 항주고려사가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치문화종교교류와 불교종파적인 화엄 천태 사상의 교류와 통합의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수 있다.
항주고려사를 비롯해서 제관 의통 의천 등이 오월지역의 종교신앙과 중국불교의 변화와 발전에 적극이고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듯이 오늘날 동아세아의 중일한 3국뿐만 아니라 세계여러나라에서 학문을 닦은 여러분야의 조선족 학자들도 우리 조상들의 행적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더 적극적인 자세로 학술연구와 생활에 노력하면서 우리 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큰 기여가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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