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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19)
2020년 08월 13일 10시 06분  조회:3093  추천:0  작성자: 오기활
19. 93세에 동년을 회억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무엇이나 다 크다. 그래서일가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첨벙거리며 놀았던 강이 조그마한 강인데도 아주 넓은 강으로 기억된다. 나무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소학교 운동장 주변에 늘어섰던 나무들을 떠올릴 때 작았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별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내가 살았던 집도 다 커보인다. 그뿐이랴! 손바닥 만한 마당에도 무슨 추억들이 구석구석 그렇게 많이도 숨어있는지. 겨우 엉덩이를 붙일 만한 크기의 뒤마루도 추억 속에서는 대청마루보다도 더 넓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들로 종종 밤잠을 설칠 때가 있다.
나의 출생지는 지금 지명으로는 조양천진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이다. 그때 향양툰은 수전농사를 위주로 하는 지역이였다.
93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 조양천진에서 살고 있으니 횡도는 나를 낳아준 산실이고 또 나를 길러준 요람이며 나의 령혼이 깊이 뿌리 내린 고향땅이다.
나는 늘 고모의 따뜻한 등에 업혀다니군 했다. 지금도 불을 밝힌 집마당의 널뒤주에 앉아서 긴 수염을 내리쓸며 얘기를 나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리고 밤이면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에 끼여서 재롱을 부리고 어리광을 피우던 일도 때론 눈앞에서 가물거린다.
내가 네댓살되던 때의 일이니 아마도 1928년 4월 쯤의 일이겠다. 그 때 아버지는 34세였고 어머니는 25세로서 한창 젊음을 자랑하던 시절이였다.
나는 때때옷을 입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꽃천으로 치장한 소수레에 앉아 외가집 나들이를 하게 되였다. 그 때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때 나에게는 세살짜리 동생이 있었지만 둘째어머니가 길렀으므로 나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그 때 외가집은 조양천[그 때에는 천수해(川水海)라고 불렀다.] 서남쪽 골짜기에 자리한 쌍기정자(双基亭子)에서 살고 있었다.
털렁거리는 수레에 앉아 조양하를 건너 가고 또 가니 길 서쪽에서 마을이 나타났다. 바로 태흥촌이였다. 마을 한복판에 학교건물이 우뚝 서있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국기게양대가 제일 눈에 띄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게 큰 학교건물과 넓다란 운동장을 난생처음 보는지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마도 내가 가는 도중에 그만 잠이 들었던 모양이였다. 아버지가 나를 깨우면서 철길을 보라고 하였다. 그 때 철길은 작은 기차만이 다닐 수 있는 소철길이였다. 이어 아버지가 “을록(애명)아, 불술기(기차의 방언)가 방금 지나간 것 같구나. 철길 우에 아직도 연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걸 봐선.”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기차란 두갈래 철길 우에서 굴러가는 수레일 것이라는 정도로만 리해했을 뿐이였다.
외가집은 여섯칸짜리 초가집이였는데 외할머니께서 동향 바깥출입문이 있는 뒤방에 병환으로 누워계시고 있었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나에게 엿가락을 늘여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와 이모들의 모습도 똑똑하지는 않지만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리고 외가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암(砂岩)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가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버지가 모는 수레에 앉아 외가집 나들이를 하던 꿈만 같던 나날들, 나는 정말 행운아였다.
행복했던 이런 기억들이 내가 살아온 발자취로 되여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니 이 모두를 금싸락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누군가는 “어린아이들은 언제나 동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행복할 때에만 동시를 쓸 수 있다. 그것은 어른들은 행복할 때에야만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내가 93세의 나이임에도 잊지 못할 동년시절의 기억들이 많은 것은 아마도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너무 행복해서가 아닐가!
김수철
2017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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