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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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증조부 (외2수)
2014년 12월 22일 14시 46분  조회:2649  추천:5  작성자: 허창렬
               시 증조부 (외2수)
 
 
 (심양) 허창렬
                                   
  단 한치의 제 땅도 없이
  증조부님은
  넓은 하늘아래에서
  오직 넓은 가슴으로
  할아버지를 애지중지
  한의사로 키우셨다
 
  단 한치의 제 땅도 없이
  오직 넓은 등으로 할아버지는
  모진 가난에도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가나다라마바사
  훈민정음으로 아버지를
  정성으로 키우셨다
 
  이제 가진것 하나 없이
  넉넉한 나는ㅡ
  증조부님의 존함조차 모른다
  할아버지 얼굴조차 아예 잊는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마저
  김치국물에 밥을 말아
  후륵후룩 떠 마신다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증조부님이 내 꿈에 나타나
  날마다 지팡이로 한치의 땅을
  쾅쾅 구른다
  내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린다…
 
 
  파도
 
  내가 다가서면
  바다는 그동안 너무 억울하였던듯이
  애완견 강아지처럼 찰싹 내게로 달려들어
  바지가랭이 덥썩 물고 더욱 깊은 곳으로
  자꾸만 나를 잡아끈다
 
  한사코 뿌리치면
  바다는 누런 썰물로
  눈물 코물 다 흘려가며
  부지런히 도마뱀처럼 잔 다리 잽싸게 놀려
  차츰 내게서 멀어져간다
 
  시커멓게 잔등을 드러낸 갯벌
  28층 건물이 거대한 성기로 거꾸로 비친 물웅덩이에서는
  달이 수줍게 알몸뚱이채로 목욕하며
  벅차오르는 오르가슴에
  반나절씩 아무런 말이 없다
 
 
  내 삶이 리유없이 찌들어갈 때
 
 
  리유 없이
  내 삶이 하루 또 하루 찌들어져갈 때
  나는 모두 떠나버리고 오는 이 하나 없는
  오골산 길섶에 홀로 서서
  때늦게 피여난 라일락 꽃향기를 맡아본다
  가을은 부재중 전화
  여름의 하얀 젖무덤에서
  살찐 회초리 살짝 꺼내든다
  이제 나는 평생 너 하나만을 목숨으로 사랑하다가
  맑은 이 하늘아래에 서서
  아무런 리유 없이 즐겁게 죽어가리
  죽는것마저 또 하나의 사치로 느껴질 때면
  나는 이제 남은 여생을 깨끗이 비움으로써 다시 살아야 하리
  내 삶이 리유 없이 자꾸 찌들어갈 때면
  나는 어느 해 가을 멀리로 떠나간 한 녀인을 생각한다
  평생 나 하나만 바라보시다가 하늘로 가신 어머니
  백발이 성성한 어머님을 부축하여
  한발자국 두발자국 넘고싶은 이 고개길
  아아 이 가을은 내 인생의 끝이자
  마침내 또 다른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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