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 강신무는 “신”이 들려 스스로 무당이 된 경우이고 세습무는 다른 무당으로부터 배워 무당이 된 경우이다.
한 사람이 대성하는데는 강신무와 세습무적 방식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강신무-끊임없이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총기를 발휘하며 스스로 깨닫고 터득해나가는것. 세습무-끊임없이 눈을 밖으로 돌려 다른 사람한테서 배워나가는것. 간단히 말해 강신무는 자학(自學)의 경지이고 세습무는 타학(他學)의 경지라 할수 있다.
인간에게는 강신무적인 자학의 능력이 천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나는 일자무식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가감승제를 배우지 않았으련만 돈계산은 귀신처럼 해제낀다.
나는 우리 아버지도 신기하다. 서당문앞도 가보지 못했다는 당신이 두손가락을 폈다접쳤다하면 웬만한 계산은 다 해내고 주먹을 불끈 쥐고 올록볼록 손가락밑둥마디를 짚어나가면 60갑자는 얼음판에 표주박 밀듯이 짚어나갔으니 말이다.
나는 소학교에 입학해서도 깜박 놀랐다. 혁명도사 레닌이 말했다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 위대한 수령 모주석이 교시했다는 “학습을 잘 하여 나날이 향상하자!”는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나는 워낙 학교에 가기전에 우리 아버지로부터 이러루한 말을 수없이 들었던것이다. “촌놈” 우리 아버지가 혁명도사, 위대한 수령과 통하는데가 있는듯하여 나는 그때로부터 우리 아버지를 정녕 당신으로 보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쩍 하면 물었다.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하면서 왜 아는것이 그렇게 많아요? 그때마다 우리 아버지 하는 말이 강신무적인 걸작-생각해보면 알지!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서 바로 이 “생각해보”는 걸작을 배웠다. 나는 누구에게 묻고 배우기전에 먼저 생각해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며 미립이 트다보니 나는 스스로 깨닫는바가 있었다. 그 많은 명언명구들, 별로 아닌걸.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사람들 제 아니…” 내 입에서도 이러루한 명언명구들이 튀여나올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선생을 깔보기도 했다. 대학이 들어와 “어느어느 작가 몇년도 몇월 몇일에 탄생했소”를 신기한 지식이냥 졸졸 외우며 시험에까지 내는데는 그만 나를 질리게 해버렸다. 책을 보면 다 알것을 왜서 졸졸 외우게 하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세습무”로만 만드는 주입식으로 대변되는 고질병의 발작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믿어야 한다. 인간의 뇌는 동물중에서 가장 큰 용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잠재력은 대영박물관 하나를 다 기억하고도 남는다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비극은 한생에 있어서 이 잠재력을 몇백만분의 1도 발굴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세습무적인 따라 배우기가 가장 큰 주범의 하나라고 한다.
따라 배우기, 학교에서의 선생, 선배나 “어른”들을 “타습”하는것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가장 빠르고도 손쉽게 장악할수 있는 지름길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것을 미신하게 되면서 맹목성을 띠는데 있다. 자기 스스로 아는것 혹은 알수 있는것도 꼭 강의를 들어야만이 마음이 놓이고 그 식이 정상으로 느껴지는것, 변태에 다름 아니다. 소학생들이 책보 미여지도록 교과서를 넣어 다니고 대학생들이라는 우리도 하루에 1, 2, 3, 4, 5, 6, 7, 8, 9, 10절까지 수업을 하는데는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난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것-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사실 우리 인간의 많은 지식은 이런 자습의 경지에서 스스로 터득되는것이다. 이유목염(耳濡目染)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것, 우리 삶의 많은 기본바탕들은 바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로 많이 일컬었다. 또 어떤 일이나 분야에서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숙능생교(熟能生巧)의 경지에 들어 배트랑이 될수도 있다. 사실 종교적 묵상이니 참선이니 하는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무의식세계를 포함한 전반마음의 경지를 읽는것이다.
현단계는 말 그대로 지식이 폭발하는 시기다. 인간이 지식을 따라 가기가 힘에 벅차다. 컴퓨터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것이 더 없이 편리한 우리 인간삶의 방편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다 배워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나는 이 순간도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워드밖에 모르는 신세다. 지식을 많이 배우면 좋겠지만 그 많은 지식을 다 배울려 하다가는 코 꿰인 송아지신세가 되여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특히 세습무적인 “타습”의 외곬으로 나아가는것은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신무적인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강신무는 일단 신이 들리게 되면 자기는 무당이 될 운명이라 무당노릇을 열심히 한다. 우리도 일단은 스스로의 적성을 판단해야 한다. 내가 문과형인가, 아니면 리공과형인가 등등. 그리고 적성에 맞는 쪽에 몰입해야 한다. 나의 적성은 이미 그런 쪽으로의 성공을 절반 먹고 들어갔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적성에 바탕한 강신무적인 자습은 아는것은 넘어가고 모르는것을 주공(主攻)할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다. 세습무적인 타습이 언제어디서나 주어지는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공간적으로 제한적인것인데 반해 강신무적인 자습은 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는 영구적인것이다. 물론 모르는것을 주공하는데 세습무적인 타습의 방조가 필요하다. 선생의 역할은 바로 이런데 있다.
여기서 잠간 세계 최고 갑부 빌 게이츠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빌 게이츠는 분명 강신무적인 존재다. 그는 컴퓨터에 “신들려” 세습무적인 타습이 싫어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든가? 그리고 그는 주로 강신무적인 자습으로 컴퓨터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그 와중에는 세습무적인 타습도 곁들였겠지만.
사실 세계 위대한 발명가나 인물들을 보면 거의 다 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를 많이 추구했음을 알수 있다. 현재 계발식의 창신(創新)교육이라는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를 떠날수 없다. 세습무적인 타습은 일종 힌트나 계발의 계기가 되고 강신무적인 엑스타시(迷狂)나 도취속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자습의 경지를 개척하도록 하는데 있다.
자습의 방법, 방식, 기교… 지식의 바다에서 빠져 죽지 않고 유유작작하게 노닐려면 모종 의미에서 현단계는 배우는 내용물보다 이런것이 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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