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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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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교환기
2016년 08월 05일 15시 27분  조회:1315  추천:0  작성자: 중국민족

 글/한동준


 청와대 앞에서 저자


    2014년2월27일, 나는 순리롭게 인천으로 행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4개월간의 경희대학교 교환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학교뻐스에 앉은 나는 생소한 환경에 저으기 긴장되는 마음을 쓸어 내리며 학교로 향하였다. 한국은 나를 포함하여 우리 조선족과 끈끈하게 련결되여 있는 곳이다. 많은 초중, 고중 친구들이 현재 여기서 일을 하거나 학업을 이어가고 있고 부모세대들은 일찍 내가 어릴적에 이곳에서 몸을 숨기며 돈을 번 적이 있다. 주위친구들과 비교해보면 나의 한국행이 시간적으로 늦은 느낌도 주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발로 이곳을 누비며 나만의 인상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들뜬 심정이였다.
 
조선족과 한국어
 
    2012년부터 산동대학교에서 한국문학 석사공부를 시작한 나는 경희대학교에서도 관련 수업을 신청하였다. 한국의 본토 연구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발표를 한다는것은 나에게 하나의 도전이였다. 그것은 내가 줄곧 경상도 방언을 사용해오면서 표준 한국어인 서울말은 석사공부를 시작해서야 배웠고 또 순 한국어로 된 수업에는 참여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수업이 시작되면서 점차 소실되였다. 동일한 언어, 동일한 전공이란 점이 나로 하여금 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수업환경에 적응하고 류창히 발언을 할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한국에 있는 조선족이 나처럼  “안일한” 환경에서 한국문학 관련 수업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울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것은 아니였다. 다수의 조선족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미지가 한국인들에게 각인된것이 현실이였다.
    경희대에서의 생활이 2개월을 맞이하는 시점이라 기억된다. 중국어를 꽤 잘하는 고려대학교의 한 녀대생이 나와 같은 학과의 친구들을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알게된 인연으로 우리들을 교회에서 주최한 자선모임에 요청하였다. 특별히 가고픈 생각은 없었으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란 얘기에 체험삼아 참석하였다. 종교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덤덤히 앉아 있다가 곁에 있는 한국인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가지 주제가 오가던 중에 그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듯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였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간 침묵하다가 말을 꺼내였다. “제가 그동안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선생님처럼 한국어를 잘하는 중국동포는 처음이네요.”
    목사의 평가에 나는 약간 당황하였으나 이내 평온을 찾았다. 사실 연구생 1학년부터 짬짬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해온 나는 이와같은 평가를 들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직접 듣고보니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가 “한국어가 서툴다”로부터 시작돼서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것이 심심히 느껴졌다.
    중한수교를 기점으로 조선족사회의 주된 이야기거리는 줄곧 한국행이였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큰돈을 벌 목적으로 이웃나라로 넘어갔고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때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정착한 부모세대들은 다수가 문화수준이 낮았고 돈을 벌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 두발로 뛰는것이였다. 보통 남성은 공사장에서, 녀성들은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고 한국에 온 목적도 여기에 있지 않았다.
    서툰 한국어 실력과 다수가 3D업종에 종사하는 현황, 그리고 와중에 언론매체에서 의식적으로 보도되는 조선족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기사들, 이 모든것들이 한데 뭉쳐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선모임에서 만난 그 목사의 반응은 분명 기존에 유지해왔던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아니함에서 일시적인 혼란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의 집단에 대한 이미지가 일단 형성되면 쉽사리 개변되지 않는다. 이는 재한 조선족사회 개개인의 노력과 시간적으로 몇세대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아이러니한것은 근년래 대학교육을 받은 신세대 조선족이 한국에 정착하여 사회의 여러 업종에 종사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가 다계층의 구조를 이루어 가고 있지만 이들의 대부분이 한국어, 즉 서울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원인으로 주위의 한국인들이 같은 국민으로 착각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에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들이 한국 서민층으로부터 간과되여버렸다는것이다. 언어에서 시작된 문제는 결국 또 언어에서 말썽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이는 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재한 조선족사회가 한국 서민사회와의 융합과 발전은 소통의 원활에서부터 시작되는것이 당연한 행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사회는 집단적인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기쁜것은 몇년전부터 재한 조선족사회의 집단적인 움짐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개개인의 활동이 무의식간의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면 집단이 내는 목소리는 재한 조선족 사회를 한국사회에 정면적으로 알리고 나아가 재한 조선족 사회의 이미지 개선과 응집력 제고에도 크게 도움이 될것이다.
    나는 부모세대든 신세대든 한국어를 능숙히 구사하든 못하든 모든이가 힘을 합쳐 함께 움직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것이라 굳게 믿는다.
 

경희대 캠퍼스


친척 방문
 
    경희대에서의 교환생활은 편안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숙사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이 우리는 희소한 학교 기숙사에 배정됐다. 숙사는 통일로 2인실이였고 층마다 면학실이 있어 굳이 도서관에 가서 자습할 필요가 없었다. 기숙사 지하에는 자동 세탁기와 건조기가 설치되여 있었고 세탁실 바로 옆쪽에는 헬스방도 무료로 운영되고 있었다. 국내의 기숙사는 이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널찍한 거주공간에 습관된 나는 현실속의 삶의 공간에 대한 감촉이 무디여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 나와 일하는 친척을 만나면서 점차 되살아났다.
    이국생활에서 느끼는 생소감이 얼마간 가셔질 때 나는 한국에 나와 일하고 있는 이모집에 초대됐다. 그곳은 조선족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골목길을 걷는 동안 익숙한 연변 사투리가 곁을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속에서 들려왔다. 이모는 현재 이모부와 이모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이렇게 네 식구가 한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한참을 걸어 우리는 자그만한 4층 주택의 1층과 지하사이에 박혀져 있는 문앞에 멈춰섰다. 계단 세개정도를 내려 나는 문을 열수 있었다. 평소에 말로만 듣던 반지하가 어떤 모습일까하는 의문의 표정으로 나는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또 세개의 계단을 걸어서야 지면에 도착했다. 이모할머니는 한창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주방이자 거실인 이 좁은 공간을 한눈에 둘러보고 이모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실외의 빛은 집문 오른쪽켠에 낸 창문 웃쪽을 통해 가까스로 들어왔다. 주방은 다소 캄캄하였으나 전등을 켤 정도까지는 아닌 애매한 상황이였다. 어두움속에 서서 나는 이모할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들과 눈앞의 정경에 약간의 충격을 먹은 나는 너무나 대조되였다. 이모할머니는 환히 웃으며 나더러 방에 앉으라 하였다. 집안의 유일한 잠자리방은 주방과 방문 하나로 갈라져 있었다. 크기는 주방만큼 하였으나 옷장과 책상, TV 등이 있다 보니 더욱 비좁아 보였다.
    방에 앉아 있던 이모부는 반가이 인사를 건네였다. 이모와 이모부는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 관심사가 비슷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모부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였다. 알고보니 몇달전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현재 물리치료중이였다. 다행히도 회사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되여 있어 이모부는 치료에만 열중하면 되였다. 그러나 이모는 돌연히 현재 이모부와 함께 인터넷을 통해 국내로 화장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계획중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이모부가 완치되여도 이후에는 육체로동을 할수 없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나의 주변에는 이모부처럼 공사장에서 다치거나 고된 로동에 골병이 든 친척들이 적지 않았다. 이모가 이제부터 가정의 기둥 노릇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 어딘가 찡해났다.
    창밖이 네온등의 빛에 아른거릴 무렵 이모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까지 일을 하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이모가 짧게 소개를 하고서야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이모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예전에 걸음마를 금방 뗏을 적의 나를 본적이 있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푸짐하게 차려졌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는 나더러 한국에 있는 동안 집밥이 생각나면 꼭 오라고 하였다. 나는 정성스레 만든 반찬을 먹으며 그들과 한집식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는 일흔을 앞두고 있으나 여전히 이국땅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였다면 이는 불가능 했을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보슬비가 내렸다. 나는 문득 소학교 때 한국에 간 어머니가 걸어온 한통의 전화가 생각났다. 그때 어머니는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카운터 안내원으로 있었다. 전화속에서 그는 요즘 비가 많이 내려 퇴근하고 나면 먼저 바가지로 세집에 고인 비물을 퍼내야 된다고 하였다. 나는 홍수가 졌는가고 걱정스레 물었다. 어머니는 그게 아니라 반지하에 살면 비가 약간만 많이 와도 비물이 흘러든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도 반지하란 무엇인지 모른 나는 아는척하며 얼버무려버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인파속에서 나의 머리속에 어머니가 바지가랑이를 걷고 물을 퍼내는 모습이 잡히였다. 순간 목이 메여 왔다. 이미 10년도 더 지난 과거에 대한 회억이였지만 눈가에 차오르는 뜨거움을 걷잡을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름못할 아픔과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신변에 혹은 바다건너 저편에 기댈수 있는 희망이 있어 끝까지 버티고 있는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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