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호림
솔직히 그곳의 첫 이주민은 언제부터 살고 있었는지 잘 모른다. 전호산 촌장은 촌락에 앞서 산민(山民)이 벌써 내두산(奶頭山)의 산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내두산은 장백산 천지 폭포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쌍을 이룬 둥그런 모양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촌락은 1931년 내두산의 바로 동쪽에 생겼다고 안도현 지명지(地名志)가 전한다. 하늘 중턱에 걸린 이 동네도 부근 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내두산촌”이라고 부른다.
그때 마을에서는 땅에 주로 감자와 보리를 심고 있었다. 고원 지대라서 기온이 낮아 소출이 그다지 많지 못했다. 보리고개면 집집마다 곳간이 비여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늘 배를 곯았다고 한다. 다들 산에 들어가서 뭔가 먹을 음식을 찾았다.
“마침 산비탈에서 감자를 숨긴 움을 찾았는데요, 진작 녹말이 되여있더라고 합니다.”
전호산씨는 이렇게 그가 전해들은 마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할머니가 아직 현존한다면 약 120세의 고령이니 적어도 지난 세기 20년대 내두산 일대에는 인가가 있었다는것이다.
옛날 누군가 감자를 숨겼다고 하는 움은 마을 남쪽의 “왕더기” 부근에 있었다. “더기”가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이니 “왕더기”는 그 땅이 아주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근처에는 또 “서울 막” 등 선민(先民)이 살면서 지은 옛 이름도 있었다.
마을 동쪽의 밭에서는 또 마제(磨製) 석기가 발견되여 이 고장에서 인간의 력사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것을 알려주고 있다. 밭에서 돌도끼를 주었다고 하는 림씨는 이날 일행이 농가에서 식사하면서 만난 촌민이다. 그는 일행에게 돌도끼를 자랑하면서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도끼의 뒤쪽 모서리가 부러졌는데요, 어디에 떨어졌는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림씨는 내두산 현지의 태생이 아니다. 약 30년 전 내두산에 사냥을 왔다가 결혼하고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조금은 비유가 이상하지만, 정말로 내두산의 “노다지”는 노루가 아닌 처녀로 탈바꿈한것이다.
내두산에는 “노다지”의 천지라고 림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산에 노루는 물론이요, 곰이며 메돼지, 담비 따위가 수림을 이루고 있다는것. 그가 이곳에 장가를 왔던 지난 세기 80년대 담비의 모피는 벌써 천정부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녀인들도 산짐승을 잡을줄 알아요.”
해마다 가을철이면 녀인들은 또 산에 올라 삼을 팠다고 림씨가 말했다. 마을 동쪽 20리 되는 곳의 산에 삼이 많다는것. 그러나 지금은 삼을 캐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인삼이 너무 많아서 산삼이 오히려 가짜로 간주된다는것.
“그럼 솥에 삶은 닭은 내두산에서 자란 닭인가요? 아니면 마당에서 키운 닭인가요?”
롱담은 두발이 달린 듯 냉큼 밥상에 뛰여오른다. 물론 이날 주인집에서 밥상에 올린 료리는 마당에서 기른 닭이였다.
기실 야생동물 보호조례가 실시되면서 수렵꾼은 거의 다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현성으로 나가는 길목에는 또 전문 야생동물 불법매매를 차단하기 위한 검문소가 생겼다. 그럴지라도 불법 포획자들이 돼지 대가리에 메돼지 몸뚱이를 합체로 만드는 등 야생동물을 집짐승으로 둔갑하여 검문소를 통과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고 한다.
이야기가 그만 다른 데로 흘렀다. 1644년 만족은 중원에 입주한 후 장백산 일대를 선조의 발상지로 삼아 성지(聖地)로 간주하고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장백산 일대는 인가가 차츰 없어졌으며 고목이 하늘을 찌르고 야수가 출몰했다. 1881년 청나라는 봉금지역을 개방했으며 이에 따라 인적이 늘어나게 되였다.
내두산 기슭의 촌민은 함경북도 갑산 일대의 간민으로 여느 이주민처럼 강이 아니라 두만강 발원지 부근의 마른 땅을 건너고 있었다. 전호산씨는 내두산에서 국경 건너 이국의 촌락까지 1박 2일이면 도착할수 있다고 말한다. 갑산 일대의 간민이 내두산에 진출한게 꼭 언제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을수 없다고 하는 설이 나올 법 한다. 그러나 확실한건 1935년 겨울 내두산에 새로운 항일유격대 근거지가 창설되였다는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일부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1년 “9.18”사변 후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에서 령도한 항일무장이다.
내두산은 일본과 위만주 군경의 거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또 남만의 무송과의 사이를 울창한 수림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또 그전부터 조선과 안도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는데 내두산 촌락은 200리 무인지경을 지나는 로정에 있는 유일한 주민지대였다.
1936년 1월, 일본군은 8백여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내두산 유격구를 진공했다고 중국의 관방 간행물 《당건설(黨建)》이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제2군의 창시자인 항일명장 왕덕태(王德泰)가 2개 중대의 병력을 지휘하여 300여명의 적군을 섬멸, 제2군의 전쟁사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긴 전례를 만들었으며 내두산 항일부대 근거지를 보위했다. 그때부터 내두산 마을 동북쪽의 무명의 산은 현지인들에 의해 “왕덕태의 산”이라고 불렸다는것.
산기슭에 세운 석비로 일행을 안내했던 림씨는 산 이름을 속명 “포대산(砲臺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포대산이 그에게 남긴 기억은 산마루의 포대나 밀영이였으며 언제인가 출토되였다는 탄알 깍지나 쇠솥 등 기물이였다.
촌장 전호산씨가 입에 올린 옛 이야기는 이목구비를 갖춘 항일부대 대원이였다. “김정숙이 녀성대원들과 함께 마을 학교의 아동 단원을 거느렸다고 하던데요.”
그 무렵 김일성 장군이 일본군의 탄환을 피했던 고목은 바로 마을 동쪽의 산비탈에 있었다고 전호산씨가 말한다. 이 고목은 마을 주변에 있던 원시림과 더불어 지난 세기 80년대에 소실되였다고 한다.
내두산의 이 항일부대는 유격구를 개설한 뒤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며 1936년 가을 일본군의 “포위숙청”으로 인해 내두산 근거지에서 철수한다. 동만 지역의 제일 마지막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로써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첩첩산중의 유격구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미구에 내두산에 무장이민을 파견했다. 전호산씨는 이 자위단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또 “백호동(百戶洞)”이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그들이 총 100자루를 어깨에 메고 들어왔다고 해요.”
일본군은 내두산에 산재한 사람들을 한데 모여 집단부락을 세우고 나무로 2,3m 높이의 목책을 세웠다. 집단부락은 동북 지역에서 일본이 주민을 일정지역에 집결시키고 주민과 항일세력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설한 촌락이다. 이 정책에 의해 동북지역에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집단부락은 1만 3,451개에 달하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을 내두산까지 안내했던 연변의 소설가 김춘택씨는 그가 살던 고등리(高登里)는 내두산의 목책과 달리 풀이 무성한 저습지의 뗏장으로 성벽을 세웠다고 말했다. 고등리는 1938년 가을 강원도 동명의 마을 이주민들로 인해 지은 이름인데 내두산의 북쪽으로 130리 정도 상거한다.
고등리에도 조선인 항일부대의 일부 흔적이 있었다. 북쪽 대사하(大沙河) 근처의 산기슭에 일명 “김일성의 금점굴”이라고 불리는 웅덩이가 있다는것. 김일성 장군이 금맥을 발견하여 이 웅덩이를 파고 강냉이의 알갱이 크기의 금을 한보자기나 캤다고 한다.
실제로 고등리의 첫 이주민인 할아버지가 김춘택씨에게 전한 이야기이다. “언제인가 조선인 부대가 집단부락의 경찰소를 습격하고 백여마리의 소를 로획한 적 있는데요, 마을 청장년들이 소의 뒤다리를 어깨에 메고 함께 유격구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이 유격구가 바로 후날 내두산으로 이전되였던 안도 부근의 화룡현 차창즈(車場子) 근거지이다.
내두산에 있던 집단부락의 목책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전부 사라졌다. 마을에서 저마다 바자를 세우거나 장작으로 목책을 사용했던것이다. 이맘때까지 마을에 흥성했던 소학교와 농촌중학교도 차츰 줄어들더니 미구에 겨끔내기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시 진출과 해외 로무의 바람은 심산속의 이 마을에도 불어들고 있었다.
보름날의 달밤에 산비탈에서 소발구에 올라 곡식을 실을 때면 멀리 천지의 폭포가 우중충한 달빛 아래 하늘에 걸리던 내두산촌의 그림 같은 옛 풍경은 슬픈 옛 이야기로 어디론가 멀어지고 있었다.
전호산씨는 마을에 호적으로는 120여 가구 되지만 실은 50여 가구라고 알려준다. “1976년에 논을 개간했는데요, 사람이 없어서 다시 밭으로 되여버렸습니다.”
내두산의 원근에 소문이 있던 감자도 마침내 옛말로 되였다. 메돼지가 출몰하면서 땅을 헤집었으며 감자 농사를 할수 없었다. 그래서 밭에 돈이 될 만한 곡식으로 10년 전에는 해바라기, 근년에는 또 호박을 심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두산에 현존하는 옛 실상은 상두(喪頭)뿐만 아닐지 한다. 상두는 상여의 속된 말로 상례 때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를 말하며 죽음의 전통의례와 상징의 세계이다. 상여라는 이 말은 조선 후기 관혼상제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상두는 우리밖에 없어요, 상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고장이죠.”
전호산씨는 내두산촌의 제일 높은 조직은 기실 그가 촌장으로 있는 촌민회가 아니라 상여회라고 말한다. 상여회는 매년 12월 20일 총화를 하는데 상여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상례 비용은 따로 지불해야 한다. 입사를 한 후 또 상례에 참여하지 못하면 촌장이라도 벌금을 내야 한다는것.
“우리 마을을 조선족 장례문화의 표현기지로 만들자고 춘택이가 주장하고 있어요.”
조선족의 장례풍속은 2009년 길림성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대상, 인제 내두촌의 관광품목으로 내세우자는 김춘택씨의 주장은 마을의 동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허약한 로인들만 잔존한 마을에서 무거운 상두를 메는 상여꾼도 찾기 힘든 현 주소이다. 김춘택씨는 연길에서 행사 때마다 상여꾼을 따로 찾아와야 할것 같다고 혼자말로 일행에게 말했다.
잠깐, 김춘택씨의 이야기를 잇자니 자칫 엉뚱한 물곬에 흘러들것 같다. 작가로서의 김춘택씨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은 내두산의 상여뿐만이 아니였다. 성산의 기슭에 중국 조선족문인의 창작기지를 만들고 하늘 아래의 첫 동네에서 민족의 하얀 혼을 불러일으키고 싶다고 한다.
“지금 내두산공원 편액을 만들었고 또 일부 소설비와 시비, 노래비를 세웠습니다.”
문뜩 조무래기의 오구작작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이날 마침 제사를 지내기 위해 주인집에 손님이 찾아오면서 부근 현성에서 아들딸을 데리고 왔던것이다. 이윽고 제사상 앞에서 곡을 하듯 망자에게 이야기를 읊조리는 주인집 로인의 목소리가 창밖으로 새여나가고 있었다.
밖에 나서니 마을에는 벌써 어둠이 깊게 깔리고 있었다. 귀가에 간간이 울리는 곡소리는 마치 내두산의 상여가처럼 그 무슨 마지막 작품을 애절하게 연주하고 있는듯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고 하거늘
눈물을 흘려서 뭣하나? 한숨은 쉬여서 뭣하나?
상사듸여! 상사듸여!…”▣ (편집/ 김향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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