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재력가의 집에서 금괴를 훔친 혐의로 구속된 조모씨 집에서 경찰이 압수한 금괴 40개와 현금 2억2500만원. [사진 서초경찰서]
2003년 6월 숨진 박모(당시 80세)씨는 강남의 소문난 재력가였다. 박씨는 토지매매, 금융투자 등으로 모은 돈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금괴로 바꿨다. ‘금보다 믿을 만한 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씨는 서울 서초구의 2층짜리 단독주택 안방에 금괴를 숨겼다. 방바닥을 20㎝가량 판 후 금괴를 빼곡히 채운 나무 상자를 넣었다. 그 위에 붙박이장을 올려놓으니 감쪽같았다. 붙박이장 서랍을 완전히 꺼내야만 금괴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뒀다. 그러다 박씨가 치매 증세를 나타냈다. 병세가 심해지기 전인 2000년 가족들을 불러 1인당 10개씩 금괴 100개를 나눠줬다. 박씨는 금괴가 장롱 밑에 더 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2003년 숨을 거뒀다. 10년 동안 붙박이장 밑에 있던 금괴의 존재가 드러난 건 화재로 인한 집수리 과정에서였다. 박씨의 집을 수리하던 인테리어 업자가 발견해 통째로 도둑질했다가 경찰에 잡힌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두발관리업체는 지난해부터 박씨의 집을 임대해 사무실로 사용했는데 지난 8월 15일 이곳에 불이 났다. 사무실을 수리하던 인테리어 업자 조모(38)씨 등 인부 3명은 같은 달 19일 붙박이장 밑에서 라면박스 크기의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나무 상자 안에는 1980~90년대 발간된 신문지로 하나씩 정성껏 싸둔 금괴 130여 개가 들어 있었다. 개당 4600만원, 총 65억원 상당의 금괴였다. 조씨 등은 금괴를 한 개씩 나눠 가진 후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하자”며 상자를 다시 넣어놨다.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조씨의 머릿속에는 금괴 생각뿐이었다. 조씨는 결국 동거녀 김모(40)씨와 함께 다시 들어가 금괴 130여 개를 모두 갖고 나왔다. 집주인도 금괴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범죄가 될 수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욕심이 화근이었다. 조씨는 다시 사흘(22일) 만에 동거녀 김씨 집에서 금괴를 모두 들고 도망쳤다. 평소 알고 지내던 30대 후반의 여성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금은방 3곳에 금괴 60여 개를 팔아 29억원을 손에 넣었다. 이 중 21억원은 지인을 통해 투자회사에 맡기고 3억5000만원을 주고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벤츠를 몰고 다니며 개당 300만~400만원짜리 고급 외제 시계를 세 개 샀다고 한다. 하루에 수백만원을 유흥비로 탕진하기도 했다.
조씨가 호화생활을 즐기는 동안 동거녀 김씨는 조씨를 찾아다녔다. 김씨는 지난달 심부름센터에 “동거남이 금괴를 갖고 집을 나갔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심부름센터 직원은 수원 중부경찰서에 김씨를 신고했다. 수원 중부서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5팀은 조씨의 행적을 쫓기 시작했다. 지난 2일 전세 아파트에 있던 조씨를 검거했다. 조씨의 안방 속 금고에서는 금괴 40개와 현금 2억2500만원이 발견됐다.
경찰 조사에서 조씨는 “화재가 나도 집주인이 오지 않아 이민을 가거나 죽은 걸로 알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압수한 금괴와 현금 등은 박씨의 부인인 김모(84)씨가 돌려받게 된다. 벤츠 승용차와 외제 시계 등 금괴를 팔아 산 물품은 공매를 통해 현금화한 후 돌려줄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조씨가 투자회사에 맡긴 돈에 대해서도 반환 절차를 진행 중”이라며 “금괴가 더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씨는 ‘오히려 도둑을 맞아 말년에 쓸 돈이 더 늘었다’며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이 생전에 붙박이장 밑에 있는 금괴를 가족에게 모두 나눠준 것으로 생각해 더 많은 금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경찰은 국세청과 상속·증여세 문제도 협의하고 있다.
서초경찰서는 조씨를 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또 동거녀 김씨와 금괴 한 개씩을 가져간 인부 두 명은 절도 혐의로, 훔친 금괴를 사들인 금은방 업주 세 명은 장물취득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130여 개 금괴 중 사라진 금괴가 있는지 조사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훔친 금괴 수량을 놓고 조씨는 106개, 동거녀 김씨는 130여 개라고 진술하고 있다”며 “현재 조씨와 금은방 업주 등을 상대로 행방을 추궁 중”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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