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국회 연설만큼이나 멜라니아의 아시아 순방 패션이 화제가 되었던 한주였다. 패션에 관한 취향이 확고한 멜라니아는 통상 영부인들이 해당 국가와 관련한 디자이너 옷이나 자국 브랜드 옷을 입는 ‘패션 외교’의 암묵적 룰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방문국 전통 의상을 떠올리게 하는 절묘한 룩으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에서는 전통 한복의 곡선미를 살린 둥글게 부픈 소매의 코트를, 일본에는 기모노를 연상시키는 꽃무늬 코트를, 또 중국에서는 치파오와 비슷한 실루엣에 자수를 놓은 맥시 드레스를 선택했다. 멜라니아식 ‘패션 외교’라 할만하다.
11월 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환영행사에 참석한 멜라니아.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를 연상시키는 돌체앤가바나 플로럴 프린트 드레스를 입었다. [AFP=연합뉴스]
물론 의상 대부분이 럭셔리 브랜드이다보니 비용이 상당하고 당연히 뒷말도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멜라니아가 한·중·일 방문 기간 들인 옷값이 4만2000 달러(4700만원)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만큼 화려한 패션으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맥시 드레스부터 와이드 팬츠, 클래식한 검정 코트에 이르기까지 트렌디한 하이 패션 아이템을 적재적소에 완벽하게 매치했다.
11월 3일 아시아 순방을 떠나는 멜라니아.역시 킬힐이 눈에 띈다. [연합뉴스]
장소마다 상황마다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였지만 멜라니아의 패션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레이디 라이크 룩(ladylikelook)’이다. 말 그대로 어떤 장소에서도 여성스러움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멜라니아의 화려한 레이디 라이크 룩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 바로 ‘킬힐’이다.
킬힐없이는 사진 안찍어
멜라니아는 킬힐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아는 대충 높은 그 하이힐이 아니다. 10cm 이상의 아찔한 높이의 가느다란 굽에, 앞코가 뾰족한 스틸레토(stiletto) 타입의 힐을 통상적으로 킬힐(killheel)이라 부른다. 높이로 구분하자면 일반적으로 굽 높이 3~4cm를 키튼힐(kittenheel), 5~7cm 사이는 미들힐(middleheel), 7~9cm를 하이힐(highheel), 10cm 이상을 킬힐(killheel)이라고 한다. 멜라니아가 가장 즐기는 신발 브랜드 역시 당연히 킬힐에 특화된 브랜드다. 신발 밑창이 붉은색이라서 ‘레드 솔(redsole)’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크리스티앙 루부탱’과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 자주 등장했던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마놀로 블라닉’이 대표적이다. 두 브랜드 모두 아찔한 높이의 킬힐을 대표 아이템으로 내세우는 브랜드다.
멜라니아는 대부분의 공식 석상에서 10cm 이상의 킬힐을 신는다. [연합뉴스]
멜라니아의 킬힐 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10월 8일자 뉴스위크는 멜라니아의 오랜 친구이자 패션지 보그의 전직 에디터 앙드레 레옹 탈리(AndreLeonTalley)의 말을 인용해 “멜라니아는 킬힐 없이는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며 백악관으로 입성할 때도 22켤레의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일본 순방 당시 도쿄 긴자의 미키모토 매장에서의 멜라니아 패션. 화려한 배색이 돋보이는 코트에 베이지색 마놀로 블라닉 힐을 매치했다. [연합뉴스]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도 멜라니아의 마놀로 블라닉 사랑은 여전했다. 11월 5일 일본 방문 당시 펜디의 꽃무늬 코트와 매치했던 베이지색 스웨이드 소재 스틸레토 힐 역시 마놀로 블라닉이다. 같은 날 저녁 아베 총리 부부와 함께했던 만찬에서는 마놀로 블라닉의 글리터 펌프스를 신었다. 또 9일 중국에서의 환영 만찬에서 구찌 드레스와 매치한 신발도 마놀로 블라닉의 분홍색 킬힐이었다. 한국에선 어땠을까. 7일 한국 방문 당시 델포조 코트 원피스와 매치한 푸른색 스웨이드 힐은 크리스티앙 루부탱이다.
지나친 패션감각으로 구설 오르기도
멜라니아의 킬힐 스타일이 세련돼 보이는 이유는 가늘고 높은 굽 때문만은 아니다. 화려한 의상을 선호하는 멜라니아는 신발만큼은 가장 심플한 것으로 고르곤 한다. 무늬가 거의 없는 단색을 선택해 화려한 의상을 돋보이게 한다는 얘기다. 11월 9일 중국 방문 당시 룩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전통 의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화려한 무늬의 구찌 드레스를 입은 뒤 심플한 핑크 베이지색 힐을 선택해 균형을 맞췄다.
11월 9일 중국 베이징에서의 만찬에서 멜라니아는 화려한 구찌 드레스를 입었다. 소매에 달린 분홍색 퍼(fur) 장식과 비슷한 컬러의 분홍색 킬힐을 선택했다.[연합뉴스]
반대로 일왕 부부와의 만남에서는 디오르의 심플한 푸른색 드레스에 글리터 소재 힐을 선택해 시선을 사로잡았다.
11월 6일 일왕 부부와의 만남에선 디올의 푸른색 드레스에 맞춰 화려한 글리터 슈즈를 선택했다. [연합뉴스]
다만 너무 확고한 킬힐 취향 탓에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2017년 9월 29일 허리케인 하비로 큰 피해를 당한 텍사스 수해지역 방문 의상이 대표적이다.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마린 원 헬리콥터로 향하는 멜라니아는 탑건 스타일의 보머 재킷에 보잉 선글라스, 검은색 킬힐로 잔뜩 멋을 부린 듯한 의상을 택했다. 특히 킬힐이 문제였다. 활동성이 떨어지는 가느다란 굽으로 수해 현장을 방문한다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부적절하게 비쳤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스타일면에서는 압도적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보잉 선글라스와 검은색 킬힐은 한 세트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수해 현장을 방문할 때도 킬힐을 선택해 구설수에 오른 멜라니아. [중앙포토]
파워 레이디의 자신감 상징
사실 킬힐은 지금 패션계에서 트렌디한 아이템은 아니다. 패션계 전반에 스트리트 무드가 만연한 요즘은 운동화나 플랫 슈즈를 신은 이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힐을 신는다해도 3~5cm 정도의 키튼힐이 대세다. 슈즈 브랜드 슈콤마보니의 이보현 이사는 “요즘은 킬힐보다는 세련된 컬러 배색의 스니커즈나 낮은 굽의 블로퍼가 사랑받는 시대”라며 “다만 공식 석상에 설 일이 많은 퍼스트레이디인 만큼 좀 더 클래식하고 우아한 스타일을 선보이기 위해 킬힐을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트럼프의 유엔 연설 당시 화려한 핫핑크색 드레스와 핫핑크 킬힐을 신고 등장한 멜라니아. [중앙포토]
실무를 보는 정치인이 아니라 대통령 옆에서 보조하는 영부인이라 킬힐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다. 멜라니아만큼 패셔너블한 여성 리더로 평가받는 영국의 메이 총리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 역시 ‘슈즈 홀릭(신발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킬힐보다는 낮은 굽의 힐을 선호한다. 레드 카펫 위에선 킬힐이 근사하지만 킬힐만큼 고통스러운 신발도 없다. 그걸 오랜 시간 감당하기란 사실 누구라도 쉽지 않다.
패셔너블한 여성 리더로 손꼽히는 메이 총리는 킬힐보다 낮은 굽의 구두를 즐긴다. [중앙포토]
그래서일까, 평소 킬힐을 사랑하는 멜라니아도 오래 걷는 코스에서만큼은 킬힐에서 내려오곤 한다. 11월 6일 일본 방문 당시 아베 총리 부인 아키에와 정원을 산책할 때는 캘빈 클라인의 새하얀 캐시미어 니트 드레스에 크리스티앙 루부탱의 옅은 베이지색 플랫 슈즈를 신었다. 또 10일 판다 관람을 위해 베이징 동물원을 방문했을 때 역시 같은 베이지색 플랫 슈즈를 골랐다. 킬힐에서는 내려왔지만 이때도 뾰족한 앞코의 신발을 선택해 특유의 세련된 느낌은 유지했다.
11월 10일 판다 관람을 위해 베이징 동물원을 방문한 멜라니아. 심플한 베이지색 플랫 슈즈를 신어 활동성을 더했다. [연합뉴스]
여성스럽고 우아한 라인이 돋보이는 킬힐은 멜라니아의 파워 과시용 아이템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강진주 퍼스널이미지연구소장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인 만큼 보다 자신감 있는 태도를 연출하기에 킬힐만큼 좋은 아이템이 없다”며 “파워 레이디가 선택한 파워풀한 패션 아이템”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11월 7일 한국 도착 당시 멜라니아. 짙은 자주색 코트 원피스에 파란 스웨이드 킬힐을 매치해 우아한 퍼스트레이디 룩을 완성했다. [연합뉴스]
이런저런 이유를 다 떠나서라도 사실 관상용이라면 킬힐만큼 예쁜 신발은 없다. 멜라니아가 킬힐을 사랑하는 이유다. 보그의 전 에디터 앙드레 레옹 탈리는 “멜라니아가 킬힐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킬힐이 예쁘기 때문”이라며 “킬힐은 완벽한 비율의 조각상을 만들어주며 나아가 일반 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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