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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컴퓨터 게임은 참 재미있었다. 반면에 의대는 참 지루한 곳이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흥미진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업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 쉼 없이 이어졌는데 ‘늘 새로워, 아주 신선해’라고 느낄 수는 없었다. 종종 그 이후에도 실습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계속되곤 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닐 때 유행하던 게임이던 스타크래프트나 레인보우식스의 화려한 영상과 신나는 효과음은 금세 온 정신을 빨아들였다. 게임 실력은 의대 성적만큼이나,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신났다. 가장 좋아했던 게임은 ‘시드 마이어의 문명’이었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의 단선적 발전 과정을 재현하는 게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고인류학자 고든 차일드의 단선적 진화론을 차용한 게임이다. 차일드는 신석기 시대나 도시 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인물이다. 낮은 생산력을 보이던 구석기 시대에서 점점 기술 혁명과 사회적 발전을 거쳐 높은 생산력을 가진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가 이어지게 되었다는 식의 단선적 도식을 제안했다. 더 많은 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농업, 가축, 제련 기술, 계급, 문자, 예술, 지식계급, 무역, 국가 등이 발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도시’라는 개념으로 엮었다.
물론 지금은, 조금은 진지한 인류학자로서 고든 차일드의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유물론적이었고 전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진보라는 개념은 당시 유럽의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를 복잡하게 포괄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기저에 깔고 있었다. 아무튼 고든 차일드는 20세기 초반을 지배한 위대한 고고인류학자였고 수많은 아동용 도서와 초중고 교과서인 '인디아나 존스'를 비롯한 대중문화, 심지어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의대를 졸업하고 한참이나 지나서 호주로 연구년을 갔다. 대학원 과정을 밟느라 정신없었지만, 크리스마스 무렵 드디어 긴 방학이 시작됐다. 이제 합법적으로, 물론 이전에도 불법인 적은 없었지만, 무한정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책임감과 재력, 고성능 노트북을 두루 갖춘 성인 아닌가? 스팀에 접속해서 최신판 '문명'을 샀다. ‘어른이 되면 하루 세끼 짜장면만 먹을 테다!’라고 생각한 아이처럼, ‘이제 끝없이 게임만 즐길 테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보고 실망하여 호주 블루마운틴에서 자살한 고든 차일드처럼, 나도 호주 기닌데라 협곡 근처에서 크게 낙담했다. 한때 그토록 즐겁던 게임이 재미가 없었다. 원 없이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룹 GOD의 멤버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어른이 된 어머니는 정말 짜장면이 싫어졌을 수도 모른다.
지루함이란
지루함은 보통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주변에 흥미를 끄는 일이 없을 때 경험하는 감정 상태를 말한다. 우울함과도 다르고, 무관심과도 다르다. 조금은 불쾌하지만,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심적 상태다. 권태와도 다르다. 권태는 의지나 욕동이 사라진 상태를 말하는데, 지루함은 욕동이 사라졌다기보다는 마땅한 대상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하지만 정확한 학문적 정의는 없다. 문화적이고, 맥락적인 경험이 가깝다. 정신과 의사도 사실 지루함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않는다. 지루해서 정신과를 찾는 환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울증 환자가 종종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곤 한다. 하지만 지루함이라기 보다는 집중 곤란이나 무기력, 무관심, 의욕없음에 더 가깝다.
지루함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다. 그리고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때다. 흔히 앞의 상태는 ‘지겨움’이라고 하지만, 지겨움과 지루함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하지 않음’을 하는 것이다.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더 높은 생산력을 얻을 것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한 수석 합격생의 수기는 아무래도 진실성이 의심스럽지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인류는 더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노동과 끝없는 학문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곧 지루해진다. 고든 차일드의 생각과 달리, ‘노동시간 단축’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분명 인류 전체의 생산력이 낮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류의 고귀한 진보를 위해 밭을 갈고, 소를 치고, 도구를 만들던 부지런한 인류가 어찌 이렇게 타락한 것인가?
지루함은 게으름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분명 지루하지 않다면 게으름도 상당 부분 ‘치유’될 것이다. 도대체 인간은 왜 지루함을 느끼는 것일까?
자극 특이적 피로
동물의 행동은 흔히 외부 자극으로 촉발된다. 모든 행동이 외부 자극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행동은 자극을 받아야 시작된다. 그런데 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행동은 점점 사그라든다. 특정 자극에 대해 반응도가 감소하는 현상을 습관화 혹은 자극 특이적 피로라고 한다. 가장 원시적인 학습 형태다.
지쳐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자극 특이적 피로는 반복된 반응에 지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자극에 대해 밋밋해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습관화는 감각이 무디어져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감각-처리-운동이라는 각각의 과정을 분명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자극 특이적 피로는 무디어진 감각에 의한 것도, 지친 근육에 의한 것도 아니다.
알락딱새는 올빼미가 나타나면 경계 행동을 보인다. 소리를 내면서 날개와 꼬리를 떠는 것이다. 가짜 박제 올빼미를 보여주어도 비슷한 반응이 일어난다. 그런데 대충 나무로 깎아 만든 가짜 올빼미를 보여주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구자는 계속 나무 올빼미를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박제 올빼미를 보여주었는데, 놀랍게도 알락딱새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나무 올빼미에게도 반응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지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극 특이적 피로는 우리가 흔히 아는 ‘피로’가 아니다. 지루함에 더 가까운 현상이다.
지루함을 극복하려면
흥미롭게도 자극 특이적 피로는 새로운 자극이 나타나면 곧 사라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극의 종류에 따라서 각각 정해진 피로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학습이라고 할 만하다. 올빼미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지만, 독수리 인형을 보여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계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자극으로 다시 반응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지루함을 극복하는 열쇠가 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한 우등생은 분명 ‘24시간 연속 수학 공부 매진!’과 같은 전략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자극은 곧 지루함을 부른다. 새로운 자극은 다시 행동을 활성화한다. 월요일은 수학만, 화요일은 영어만… 이렇게 학교 시간표가 짜이지 않는 이유다. 귀찮게도 한 시간마다 과목이 계속 바뀌는데, 덕분에 선생님도 이 반, 저 반으로 계속 다녀야 한다. 물론 학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라면 분명 기쁜 마음으로 학교 계단을 오르내리실 것이다.
영어책을 봐도, 국어책을 봐도, 과학책을 봐도, 절대 흔들림없이 여전히 지루하다는 분도 있겠지만, 그건 자극 특이적 피로의 문제가 아니다. 일단 ‘공부가 재미있다’는 자극 유발성 행동 반응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습관화를 극복하는 방법이 바로 ‘자극 바꾸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공부가 전혀 재미없었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아마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게임에 곧 질려버린 것은 자극 특이적 피로였을 것이다. 게임이 너무 재미있으니, 며칠이고 계속 게임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틀림없이 지겨워진다. 게임을 즐겁게 하려면,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해야 한다. 아니면 새로운 게임으로 계속 재치있게 바꾸어나가야 한다. 시간표를 정해서 여러 종류의 게임을 골고루 하는 것이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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