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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47] 안해를 읽어가는 인생 려행(1)
조글로미디어(ZOGLO) 2023년7월13일 20시33분    조회: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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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해와 살아온 지도 두루두루 36년이 되여온다. 선배들과는 외람된다만 솔직히 결코 짧다고는 하기 어려운 이 세월에 파장이라 할 만한 에피소드 같은게 별로 없이 살아와서인지 아니면 가정이요, 부부관계요 하는 일상에서 수시로 부딪치게 되는 이 화제가 너무 익숙해서인지 또 아니면 아예 둔해버렸는지 그 실체의 속알을 까근히 저울질해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오늘까지 밟게 되였다.

시작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내가 막둥이기에 무랍없이 놀려주면서도 동창생들은 모이기만 하면 내가 안해를 잘 만났다고 슬슬 바람을 넣어준다. 솔직히 이 말은 지극히 피상적이다. 흔히 남자들한테는 동네 집 녀자를 재단하는 유치하다 못해 바보스러운 자대가 있다. 시시껄렁한 건 말짱 팽개치고 남편 말을 고분고분 듣는 안해이라면 불문곡직하고 복 터졌네하고 떠드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그러면서 아귀를 맞추려는양 안해를 본때있게 주물러놓았다는 ‘덕담’도 까먹을세라 조미료 삼아 살짝 뿌린다. 어쩌면 마누라한테 잔뜩 주눅들어서인지, 사내 이름답게 호기를 부려보지 못하는 남자들의 속앓이가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현주소이기도 하다.

이럴 때면 나는 그저 히죽이 웃는다. 자기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가닿았을는지는 알바없더라도 사실 내가 드세여서보다도 안해가 내 뜻을 곧잘 따라주어서라고해야 정확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이라는 나름의 판단이 부채질하는 느긋함에서이다. 그대로 뒤집어보면 마치 자기가 안해를 깔끔히 후려놓은 듯이 시치미를 떼는 나도 솔직하지 못한 남자인게 분명하다.

결혼하기 앞서 나는 처가집에 딸린 성냥갑만한 세집을 진작부터 눈박아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어딘가 점잖은 말이고, 눈독들였다는 게 적절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요즘 세태를 빗질해보아도 어느 가문에서든지 올케와 시누이들 사이는 흔히들 썩 원만하지 못하다. 나의 처가집도 례외가 아니였다. 나는 안해 손우 처형과 맏며느리 사이가 삐꺽거리는 줄 모르고 주제넘게도 안해한테 저 세집에 들면 만사대길일텐데 하면서 슬쩍 턱짓해 보였다 .

안해는 단통 도리머리를 저었다.

“수애네도 그 집에 들었다가 지은이네 엄마가 트집 잡기에 나가고 말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든단 말이에요?”

대략 이태전에 결혼한 처형네는 아이도 딸려있고 직업도 마땅치 않아서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걸 밀어낸 걸 보면 처남댁도 등쌀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처남은 남들이 다 침 흘리는 이른바 노란자위라고 할 수 있는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고 단층집이나마 여벌로 가지고 있었다. 모자랄게 없을 처남댁이 왜 비정하게 나왔을가?

길고 짧고는 재보아야 한다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기보담 일단 부딪쳐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갓 창간한 신문사에 옮겨오면서 한달에 거의 세주 이상을 취재로 길림성내 산재지구에 나가있었다. 그러니 갓 결혼한 색시를 세집에 혼자 두고는 아무래도 시름을 놓기 어려웠다. 그 세월을 살아본 경력자라면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의 치안 들어가서 세집의 안전벽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가슴 섬뜩하게 기억할 수 있다.

더구나 멀쩡하게 비여있는 처가집 세집을 두고 밖에 나가 세집을 잡는다는게 자존심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은근히 벼르다가 언제인가 결혼전에 가시집 식구들과 식사하면서 나는 동창생, 동료들의 세집살이를 안주삼아 장모를 보며 세집 말을 슬쩍 꺼냈다.

“먼저 장가간 동창생들 다들 세집 때문에 아우성이니 저도 걱정됩니다. 하긴 출장이라도 없으면 그나마 괜찮겠는데…그렇다고 룡정으로 통근하자니 뻐스 잡기도 변변치 않고…”

장모님보면서 입 열었다더라도 기실은 처남댁을 들으라한 말이였다. 그때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큰딸을 자기 울안 세집에 남겨두지 못한 채 며느리의 기염을 들어줘야 했던 장모에게 큰 기대를 건다는 건 어쩌면 무리수였다. 싱겁다고 해야 할지 뻔뻔스럽다 해야 할지 분명 자기 일인데 공을 처가집에 넘긴 꼴이 되여버렸다. 나는 이 게임의 승산을 두가지에 두었다. 하나는 처남댁이 사리 밝다는 데이고 다른 하나는 안해와의 사이가 가깝기에 막 나오지 않을 거라는 예상에서였다.

과연 처남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너무나 시원시원하고 통쾌했다.

“저기 세집이 멀쩡하게 비여있는데 하필 나가 잡을 건 뭔가요?. 어머니, 작은 올케네가 사정이 그러하니 들게 하자요. 그리고 집세 같은 건 말도 꺼내지 말아요.”

처남댁은 성격이 날카롭더라도 경우는 꽤 밝은 녀자였다. 지금은 남남이 되였어도 나는 당시의 처남댁한테 여지껏 고마워한다. 지금도 길에서 만나면 편안하게 안부를 주고 받는다. 꼭 도무지 떼여버릴 수 없는 사촌아이들이 딸려 있어서만이 아닌가 싶다.

하긴 나의 한달 로임이 고작 50원일 때 서시장에서 조선베개거죽마구리장사로 하루에 만 300여원쯤은 거뜬히 벌어들이던 가시집에서 새발의 피나 다름없는 집세에 련련해 할리 없다. 대신 나로서는 나름대로 미안해서였는지 퇴근해서 재봉침을 퍼그나 돌려준 것 같다. 가시집에서는 재봉침 두대가 온종일 돌아가야 주문받은 베개거죽마구리를 차질없이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가끔 쉬여있는 재봉침을 보면서 가만히 놔두자니 손이 근질근질해나서 해보겠다니 장모는 처음에는 갸우뚱해하다가 정작 바느질을 보더니 언제 마선질을 이렇게 익혔는가 하면서 반가워서 야단이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야금야금 배운 마선질을 가시집에서 써먹는다 하니 어머니는 배워준 보람이 있다면서 무척 즐거워하였다.

가시집에서 보내니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꽤나 여유로웠다. 하긴 워낙 풍요로운 가문이니 떨어진 떡 고물만 찍어 먹어도 어렵잖게 배를 넉넉히 불릴 수 있었다.

이산을 넘으면 저산이 나온다고 가시집에서 보내면서 유쾌한 기억 만을 남긴 건 아니였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아들과 사위를 쪽 놓는 이중적 갈라치기가 기분을 뒤집어놓을 때가 무지 참기 힘들었다.

무심히 보아도 가시집에서 돈을 쓰는 방식은 썩 석연치 않았다. 그때 국가기관의 공무원으로 한창 잘나가던 맏처남은 사계절에 맞추어 통일 제복을 타입고 출퇴근할 때에도 직장에서 내준 오토바이를 굴리고 다녔다. 그래도 가시집에서는 맏처남의 괴춤이 훌쭉해질세라 보기만 하면 챙겨주느라 법석을 떨었다. 특히 장인이 자별났다. 아무리 돈이 넘쳐도 저러는 건 아닌데 하면서도 아들들이 장해보여 그러려니 하고 못 본체 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과 사위를 따로 하는 게 무척 서운하더라도 가시집 세집에 공짜로 눌러있는 처지에서 뭐라고 툴툴거릴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참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나에게는 흔치 않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결혼해서 1개월이 지났을 가할 무렵 처가집 식구들은 도문시 월청향으로 가문의 어른 회갑잔치에 가게 되였다. 나로서는 처음 나서는 가시집 쪽 행사이고 가시집 쪽 친척들 또한 대학생 사위를 얻었다고 장모에게 덕담을 늘여놓느라 야단법석이였다. 그런데 불쾌한 일은 트럼프판에서 일어났다. 나와 맏처남, 동서 그리고 친척집 누군가가 그렇게 넷이서 트럼프를 왁자지껄 치는데 장인이 어디선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돈지갑을 열고 맏아들에게 10원짜리 한장을 꺼내서 호주머니에 슬쩍 넣어주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트럼프를 치지도 않고 옆에서 구경하던 막내처남에게도 10원짜리를 찔러주며 눈을 끔뻑하였다. 그러니 멍청해진 건 나와 동서였다.

처가집 켠 친척들이 숱해 보는 앞에서 수모를 당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처음 오는 처가집 켠 회갑자리에서 흥분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잔치가 끝나고 연길에 돌아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에게는 썩 앞으로 년상의 누님 두분이 있다. 아버지는 사위들을 자식같이 아껴주었고 가문에 일이 있어도 사위들과 상론하고 의사를 귀담아들을 때가 많았다. 우리 형제들과 자형들의 사이도 그만큼 끈끈했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자라왔기에 눈섶에 떨어진 사위 푸대접이 치욕 같아 더구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길에 돌아온 후 나는 처가집 식구들을 몽땅 한자리에 눌러앉혔다. 모두들 당돌해서인지 서로의 얼굴 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나는 장인에게 직방으로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 솔직히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아들들한테 주고 싶으면 뒤에서 조용히 줄 거지 꼭 생색내야 즐겁습니까? 하필 집안 친척들 앞에서 사위들과 쪽을 놓으면서 그 따위 개망신을 줘야 합니까? 남들은 그래도 사위가 반자식이라 불어주지 못해 삼삼거리는데 이 집에서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해도해도 너무하는 게 아닙니까?”

하긴 장인은 글쓰기를 즐기다보니 언론 쪽에서 일하는 나를 무척 아끼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출장 나갔다가도 그때로서는 귀하고 비싼 《한국말사전》이랑 사다 주었고 애들 손바닥 만하게 소식기사가 신문에 실려 3원인가, 5원인가 되나마나한 원고료가 나와도 너무 기뻐서 우정 나를 불러 맥주를 마시는 등 애정이 남달랐다 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통일이냐, 분렬이냐?”, “물이냐 피이냐?” 하는 절체절명의 판가름 앞에서는 약해질 수도, 양보할 수도 없었다.

“이제 다시 그런 게 눈앞에서 보이면 다시는 이 집에 들어오지 않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이어 나는 내친김에 최후의 통첩까지 꺼내들었다. 하긴 이런 때가 웃긴다. 저절로 찾아들었지 청한 것도 아닌데 제 쪽에서 들어오지 않겠다고 떵떵거리니 말이다. 다만 나는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한다고 단단히 뼈물고 있었다. 동서가 푸대접 받으면서도 가만있었기에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였으니 말이다.

집안은 술렁거렸다. 모두들 이 같은 가정 분위기에 길들여져 목석처럼 덤덤해졌는지도 모른다. 정작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나자 모두들 자기한테 구멍난 부분은 무언가부터 조심스럽게 오르내리 쓰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왜 밖에 나가서까지 설치는가요?” 안해의 볼멘소리가 먼저 들렸다. 하긴 아버지가 오빠나 동생한테 쩍하면 돈을 찔러준다고 탐탁치 않게 보아오던 안해로서는 자연스러운 핀잔이였다.

“아들들만 불어주면 어깨 더 올라가는가요?” 불만스러워하는 안해의 두번째 말에는 수위가 더 높아졌다. 솔직히 이런 분위기에서는 안해의 태도가 판세를 가를 수 있다. 가뜩이나 막강한 처가집 진영인데 안해까지 그 쪽에 기울가 하면 나는 꼼짝 못하고 영낙없이 패잔병으로 벼랑 끝에 몰릴 수 있다. 본전도 찾지 못한 채 가시집 앞이라면 영영 설설 기게 될지도 모른다.

“보자보자하니깐 아버지가 이런 게 몇해입니까? 해도해도 너무합니다. 아버진 아들만 자식입니까?”

처형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 사이 많이 참아왔다는 설음이였다. 하긴 동서 때에 이 ‘버릇’을 진작 눌러버렸더라면 나도 수모를 뒤집어쓰지 않았겠는데 말이다.

“동무는 맏이라는게 그게 뭡니까? 아버지가 주더라도그걸 매부들과 나눠 쓰면 얼마나 보기 좋았겠습니까?”

이번에는 처남댁이 남편을 살짝 나무랐다. 자기체신에 꼭꼭 맞는 말이다. 분명 다 지혜로운 데 왜 이렇게 꼬였을가. 그러자 맏처남이 뒤더수기를 매만지며 얼굴을 붉혔다.

“이거 장난 아닌데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하긴 그 같은 ‘버릇’에 하도나 오래 길들여졌으니 아무런 감촉도 받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솔직한 고백이였을 게 틀림없다.

옆에서 잠자코 있던 장모가 이자식 저 자식 조심스레 곁눈질하다가 50원짜리 인민페 두장을 장인애게 슬쩍 내놓았다.

“밖에 나가서까지 아들이고 사위고 가리느라 호들갑 떨 게 뭡니까, 이걸로 속이나 좀 풀게 사위들을 우선 뽀우쇼(报销)해줍소.”

누구나 자기의 카드가 있다. 장사군이니 돈으로 진화하는 것이 최적이라고 짚었을 것이다. 하긴 50원이면 한달 로임 같으니 절대 작은돈이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밀어놓았다.

“돈이 욕심나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후에는 아들들에게 주더라도 사위들 보는 데서 흔들거리지 마시라는 겁니다.”

결국 장인이 “앞으로 명심해야겠네.”하고 들릴락말락 중얼거리면서 뒤두서기를 긁적거렸다.

“얼른 맥주 떠오지 못하고 뭘해! 맥주로 섧은걸 털어버리게…”

한시라도 난처한 궁지에서 헤여나오고 싶었는지 장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그날 가정모임에서 나는 구겨졌던 자존심을 살렸다할 수 있었다.

풍파가 있은 그 뒤로도 쩍하면 돈을 찔러주는 장인의 고질은 별반 달라지는게 없었다. 대신 이제부터는 두 아들과 두 사위한테도 똑같이 헤쳐주리만치 방식은 달라졌다. 감격스러운 반전이였다. 자주 받기 민망해서 거절하면 장인은 안해에게 슬쩍 뿌려주었다. 그러면 안해는 싫다 안하고 잽싸게 받아챙겼다.

결혼해서 삼십여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나는 이 에피소드를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아슬아슬하게 기선을 잡았기에 나는 처가집에서 엉뎅이라도 들이밀 구들목을 찾았고 나아가 처가 일을 내일로 맡으면서 항시 뭐가 모자라지 않았는가고 되돌아보는 마음가짐도 가지게 되였다. 아니였으면 다른 평행선을 달렸을게 분명하다.

귀한 우표를 도적 맞히고 펑펑 울던 안해

나는 1987년 3월 15일에 안해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다. 그때 상빈들을 싣고 모아산으로 넘어오던 직장의 해방표 트럭의 다이어가 맹랑하게 터지는 바람에 잠간의 해프닝이 있었고 그 참에 괜히 불길한 운수를 내놓는 싱거운 친척들이 있었어도 십수년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확실이 부질없는 넘겨짚기였다는게 알려지니 피씩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다.

나는 가문에서도 막둥이 말하자면 막내였다. 여섯 남매에 부모까지 생전인 대가문이였다. 나는 안해를 알아서부터 늘 입버릇처럼 막내더라도 우리들이 앞으로 부모님의 만년을 맡아야겠다고 여러 번 되풀이한 적 있다. 그 속에는 어쩌면 심리적으로 일찌감치 각오하고 있으라는 메시지가 깔려있었다.

아버지는 토개 때 옛 광개공사 회경촌 촌장(촌주임)까지 맡은 적 있는 오랜 촌간부이고 부모님 두분 다 평생 농민으로 잔뼈가 굳었다고 할 수 있다. 형제중 맏이인 누님은 교원, 맏형은 통화시에 있는 국유 중점석탄 광산의 기술일군, 둘째 누이는 제대군인 자형한테 시집가서 로동자로 신세를 고쳤다 할 수 있었다. 대신 둘째, 셋째 형은 당시로 말하면 한낱 순수한 알짜배기 농민이였다. 그때까지만도 농촌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까지도 가문에서 맏아들이 부모를 모셔야 하는 관례가 불문률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안해는 부모님을 모시는 걸 부담스러워 하기보담 하필 막내가 모시자 하는가 갸우뚱하다가 나한테서 가문의 래력을 들으면서 차츰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효성이 지극한 맏형, 맏형수가 통화에로 모셔가자 하는 데도 로인들이 한사코 시골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애꿎게 시간 만 흘러 부모님들도 어느덧 일흔 고개를 훌쩍 넘기게 되였다. 맏형은 로동자 만 3,000여명을 두고 있는 국유 중점기업인 위당탄광에서 기술과 생산에 안전까지 사령탑을 쥐고 있는 총공정사였을 만큼 부모로 하여 자리를 뜬다는 자체 또한 비현실적이였다.

우리들이 결혼했던 지난 세기 80년대 중엽까지도 시내와 농촌의 격차가 컸던 만큼 이 같은 환경 속에서 가문의 유일한 대학생으로 부모들과 형제들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올곳이 받았다 할 수 있는 데다 로임까지 타는 이른바 국가간부라는 감투를 쓴 내가 응당 나서는 것이 도리라고 은근히 마음을 굳혀오고 있었다.

이미 칠순고령에도 그냥 시골에서 보내는 부모님이 걱정되여 아이가 첫돐을 쇠기 바쁘게 모셔오자고 안해와 급촉하게 서둘렀다. 부모님들은 모셔오겠다고 하는 우리를 대견해하면서도 미덥지 않은지 썩 달가와하는 얼굴은 아니였다. 하긴 그때까지 부모님들은 이미 가정을 이룬 둘째, 셋째 형네와 한마을에서 번갈아 같이 지내면서 손군들을 보아주니 별로 외롭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형수님들까지 부모님들은 자기들이 번갈아 모시겠으니 괜히 걱정 말라면서 우리를 말리는 데도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것이 입만 놀리는 가식 같아보여 일단 연길시 철남 쪽에 집부터 세 맡았다. 제딴에는 로인들이 심심할세라 닭우리가 딸리고 남새전까지 있는 큰집을 잡았다. 저그만치 52평방메터 크기에 한달 집세만 70원이였다. 나의 로임이 62원, 안해 로임이 38원일 때였으니 어벌 크게 덤벼든 격이였다. 솔직히 용단은 내렸더라 해도 쉽지 않은 선택이였다.

다만 고령의 시부모를 모시는 게 어떤 시련일지 모르더라도 어디까지나 남편의 뜻을 존중해주고 따라주는 안해가 고마왔다.

우선 정도 들일 겸 새로 잡은 세집을 구경하라고 부모님을 모셔왔다. 그런데 웬걸, 즐거워하실 거라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정작 와보고 난 아버지는 버럭 꾸중부터 쏟아냈다.

“우린 아직 기운이 있으니 시내에 와서 갇혀살기는 싫다. 너희들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누가 이리 큰 집을 잡으라데, 너희들 밑천도 없는데 이렇게 막 돈을 쓰면 앞으로 어느 세월에 제집이랑 일구겠니? 우리는 절대 시내에 들어와 살지 않겠으니 더는 신경 쓰지도, 걱정하지도 말거라.”

이렇게 우리가 제딴에 ‘거금’을 털어잡노라고 한 세집에 부모들은 하루밤 묵고 이튿날 곧장 룡정 시골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이미 돈까지 다 물어버린 세집을 물릴 수도 없고 하여 썰렁하더라도 그 비싼 세집에서 세식구가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맹랑한 일은 또 있었다. 애호박에 침질이라 할 가 출근한 사이 세집에 도적이 들어 하필 옷장 서랍의 자물쇠를 요리저리 돌아가며 악착스레 파내고 안해가 로임타서부터 차곡차곡 모아오던 귀하디 귀한 우표를 홀랑 훔쳐갔다. 우표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던 무렵이였다. 가뜩이나 막내의 고심을 부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심란하던 차 설상가상으로 악재까지 덮쳐드니 안해는 하도 서러워 엉엉 울었다. 나는 지금도 흐느끼던 안해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언젠가 그 옛말을 아들애한테 들려주니 어머니의 아쉬움 같은 건 뒤전이고 그 우표가 지금 있다면 적어도 집 한채값이 갈텐데 하고 혀를 홀랑 내밀면서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래도 아무튼 나한테서 부모님은 떨쳐버릴 수 없는 시름이였다. 그 무렵 우리는 음력설에 부모님 뵈러찾아온 맏형네와 진지하게 마주앉았다.

“형님, 그나마 형님 다음에 월급 받는 내가 부모님 모시겠다고 비싼 세집까지 맡았는데 기어이 싫다하니 어쩌면 좋겠소?”

기술리더답게 맏형은 실용적이고 랭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니라면 아니니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다. 이제는 현실적으로 풀어나가자꾸나. 우리 둘이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두 형과 형수들을 경제적으로 힘이 되는 대로 도와주어 부담을 줄여주는 게 상책 아니겠니?”

하긴 맏형과 맏형수는 그러잖아도 경제적으로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식품을 싸리광주리(그때는 배광주리가 주요한 운송포장도구였음) 채로 보내줄 만큼 언제나 큼직큼직하게 나왔다. 또 한어를 배우도록 둘째형과 셋째형을 통화에 데려다가 한족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였고 부업거리도 얻어주는 등 맏이이면서도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지 못하는 말 못할 고충을 그런 보상으로나마 풀어가려고 왼심을 쏟고 있었다.

결국 시골에서 사는 둘째형네와 셋째형네가 부모님들을 가까이에서 돌보게 되고 우리 이른바 월급쟁이들이 경제적으로 밀어주는 모양새로 굳어지게 되였다. 그때 안해의 직장에서 복리 하나는 주변에서 다 알아주리만치 먹음직스러웠다. 솔직히 경제력으로 많이 떨어진 우리가 맏형네를 따라가자니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였다. 그래도 안해 직장의 든든한 복리를 딛고 체면은 세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두 형이 한국으로 로무송출을 가도록 수속해주고 경제담보도, 필요한 경비도 우리가 맡아주었다. 어머니가 젖먹이 때부터 키워온 아픈 손가락인 큰누이네 외동아들도 연길에서 대학입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집에 데려왔다. 또 둘째 누님네 딸도 당시에 잘나가던 백화점에 출근하게 되니 출근이 편하도록 룡정에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이렇게 외조카들 만 둘이 선후하여 5년 남짓이 우리 집에서 보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직전까지였다.

이 무렵 어머니가 느닷없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둘째 형수는 동네방네가 고개를 끄덕일 만치 온갖 정성을 쏟아 어머니를 모셨다. 무려 장장 6년이나 하반신을 못 쓰는 어머니의 뒤바라지를 했으니 얼핏 들어보아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태 뒤에 어머니 산소에 가서 “곧 당신 뒤를 따라가겠소.” 하고 중얼거리시던 아버지도 추석을 앞두고 홀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우리가 부모님들을 모시지 못했더라도 안해가 나의 뜻을 따라 주저없이 자기가 모시겠다고 나선 처사는 갸륵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때 부모를 모시겠다는 나의 의지를 안해가 따라주지 않았더라면 부부관계는 티격태격하면서 다른 구도로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리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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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4
  • 13일, 제14회 중국―동북아박람회 비서처에 따르면 제14회 중국―동북아박람회는 처음으로 현대써비스업관을 설립하고 의약건강써비스, 의료써비스, 지혜양로 및 강양써비스를 방향으로 이번 동북아박람회 플래트홈을 통해 의료건강업 자원을 통합하고 협동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현대서비스업관(6호관)의 전시 면적은 1만평...
  • 2023-08-14
  •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는 대상 수상자 박지현학생. 연변조선언어문화진흥회가 주관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예술발전촉진회가 주최한 ‘정음컵’ 제6회 어린이 <조선언어경연대회> 결승 및 시상식이 8월 12일 오후에 연길시 한원지능호텔 8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였다. 유아조, 저급학년조, 중급학년조, 고급학년조로 ...
  • 2023-08-14
  • 제3편 동북항일련군 녀성 장교와 중공 각급 녀성 지도간부 1. 사급 이상 장령, 시와 지구급 이상 중공 지도간부 김성강(金成刚, 1899—1933): 탕원 ‘10.14 참안’ 12수난자, 중공탕원중심현위원회 위원 조선 평안남도 개천군 내남면 답도리에서 태여났으며 1920년 겨울 식솔을 따라 료녕성 안동(지금의 단동시)으로 이주하...
  • 2023-08-14
  •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본래 부모의 책임이다. 그러나 어떤 원인으로 인해 많은 가정의 로인들이 손자를 양육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다면 ‘손자 양육’은 도대체 응당한 일인가? 아니면 화페로 계량화 가능한 로동인가? 최근 장춘시관성구법원 장강로개발구인민법정은 할머니가 ‘손자양육비’를 주장한 사건을 심리 판...
  • 2023-08-14
  • 연길고신기술개발구 생명건강산업단지대상 착공식 현장(사진 리군광) 8월 13일, 연길고신기술산업개발구 생명건강산업단지대상이 착공식을 거행했다. 연길고신기술산업개발구 생명건강산업단지대상은 총 투자액이 11억 5,600만원이고 총 부지면적이 25만 3,000평방메터이며 총 건축면적이 26만 6,000평방메터이다.주로 연구...
  • 2023-08-14
  • -장춘시조선족기업가협회 지원물자와 지원금 수해현쟁에 전달 태풍 ‘독수리’의 영향으로 서란시 사적촌을 비롯한 여러 지역들이 큰 물 피해를 입었다. 장춘시조선족기업가협회의 발기로 장춘시 여러 조선족 사회단체와 군중들이 분분히 호응해나서서 홍수피해 지역을 향한 장춘시 조선족 군중들의 따뜻한 관심과 훈훈한 사...
  •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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