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받은 ‘련애편지’
내가 안해와 련애하던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에 와서는 한 세기를 풍미하면서 청춘남녀들을 들뜨게 하고 잠못 이루게 하던 사랑의 1호 매개물인 련애편지가 막 저물어가던 세월이였기에 련애편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다. 굳이 있다면 내가 한번 보냈던가 싶다. 그것은 만난지 며칠 안되여 내가 출장 떠났다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그 연유를 밝히면서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을 쓴 것 같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련애편지라 할 수 없었다. 안해는 일상에서는 락천적이더라도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는 랑만스럽다기보다 현실적이기에 그런 련애편지 같은 데 별로 흥미가 있어보이지 않았다. 사실 한 시내에서 지내면서 보고 싶으면 만나는 것이 가장 효률적인 련애 처방이겠는데 굳이 구구절절 글로 감정을 표달하는 건 좀은 싱겁고 거치장스러운 역사였는지 모른다. 싱숭생숭해나는 걷잡기 힘든 감정을 꼭 련애편지에 절궈보내고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그 시대 청춘들에 비하면 오늘의 청춘들은 퍼그나 매끄럽고 여유로워 보인다마는 종이장으로든지 인터넷으로든지 혹은 위챗으로든지 사랑의 부호를 단편적으로나마 남기는 건 어디까지나 감미로운 추억거리가 아니겠냐고 싱거운 대로 한마디 하게 된다.
“자기야, 얼즈를 바르게 키워줘서 고마워.”
짤막하더라도 내가 여지껏 안해한테서 받아본 유일한 글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안해한테서 렵기적이라 할 만한 ‘련애편지’를 받아보았다 할 수 있겠다. 그 세월 류행하던 련애편지마저 받아보지 못한 바보스러운 남자라는 오명이 달갑지 않아 내가 거기에 련애편지라는 감투를 억지로 씌우는 게 아닌지 헷갈린다마는…
안해는 내가 외국에 펠로우(高级研究员)로 나가면서 부부 동반 비자로 석달 뒤 따라나오게 되였다. 나를 초청한 신문사가 그 나라에서는 두번째라면 섧다 할 메이저 언론사이고 내가 수업하는 대학원의 교수들도 쟁쟁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안해는 여러모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일자리도 이들이 찾아주었기에 힘든 일을 하지 않고도 브랜드 전문점에서 수입이 근사한 점원을 맡을 수 있었다. 내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에 안해는 좀만 더 벌고 가면 안되겠는가고 조심스레 그러면서도 절절하게 청들었다. 잘 나가던 직장이 해체된 후 정리실업하면서 안해가 외국으로 나오겠다고 여러번 칭칭거리는 걸 번마다 일언지하에 눌러놓았던터라 발 한쪽을 이미 물에 들여놓은 지금에는 허투로 넘길 수 없었다. 나를 딛고 요행 가게 되였으나 솔직히 돈은 얼마 벌지 못했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나를 펠로우로 초청한 문화재단에서 10개월 체류비에 대학입학 시 한 학기 등록비까지 대주는지라 나를 추천한 교수님이 기어이 언론학 석사연구과정을 밟으라기에 그런대로 따랐는데 1년이 지나면서 연수기일이 끝나니 돌아가서 출근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에 맞띠우게 되였다. 이러면 부득이하게 석사과정에서 중도하차하는 게 필연적 순서였다. 좀은 아쉬웠으나 그 학위에 별로 미련이 없다보니 집착이 가지 않았다. 다만 교수님은 펄쩍 뛰였다. 얻기 힘든 기회를 놓치지 말라면서 나머지 세 학기 등록금은 자기가 외국인 장학생으로 천거하여 해결해주고 학교측과 말해서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학업을 마칠 수 있는 특혜를 줄 수 있다고 가능성까지 시원히 열어주었다. 기실 이만하면 정말 얻기 조련찮은 파격적 조건이였음에도 내가 선뜻 답할 수 없었던 건 그 사이 엄청 들어갈 왕복 항공료와 잇따르는 비용이 걱정되여서였다. 그러자 안해가 자기가 벌어서 항공료를 대겠다고 나왔다. 말이 쉽지 1년 반 동안에 나는 결국 10여번이나 그 나라를 드나들었다. 개학초, 중간시험, 기말시험, 외국어시험, 학위 론문답변, 졸업식 이렇게 모두가 피키 어려운 과정이였기에 신물나도록 오고가게 되였다. 번마다 왕복항공료에 주숙비, 기타 비용까지 만원은 푹푹 나가야 했으니 그동안 안해는 번 돈을 거의다 내 공부에 밀어넣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좀만 더 벌고 가겠다니 나로서는 이때 만은 약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안해는 남게 되고 나는 4년 동안 애를 돌보면서 지내게 되였다. 남들 같이 보모도 쓰지 않고 아들애를 초중 3학년에서 고중 3년 졸업 때까지 차질없이 돌봐온 내가 고마워서인지 어느 해에는 내 생일에 선물을 부치면서 종이쪽지 같은 데에 보낸 것이 바로 우에서 말한 그 글이였다. 기실 나는 시골에서 어려서부터 검박하게 살아왔기에 보모같은 건 사치스럽더라도 부담스럽게 보고 있었다. 아들애 보고 보모를 청하라는가 넌지시 묻기는 했어도 한낱 떠보려는 속내였고 애가 그러자고 해도 내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였다. 대신 아들애가 아버지가 해주는 밥이 맛있으니 보모는 싫다고 하기에 부전자전 같아서 은근히 대견했던 감미로운 기억을 남기게 되였다.
그걸 보상하느라 그랬는지 안해는 나를 꾸미는 데 더구나 성의를 쏟았다. 기분좋게 번마다 새로 나온 브랜드라고 알려주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 미처 입지 못할 걸 그만 보내라고 했더니 안해의 말이 걸작이다.
“내 재간으로 해줄 게 그것 밖에 없는데 뭘요? 나그네를 허술하게 내놓았다간 가뜩이나 공부를 못한 얼굴마담을 얻은 게 어델 가겠느냐고 꼬투리라도 잡은양 킥킥거리라고요?”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한테는 허투루 돈을 쓰기 아까워한다. 나는 안해와 쇼핑하기를 죽도록 싫어한다. 정작 뭘 사달라고 쇼핑가자 해놓고는 분명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인 데도 정작 돈 물자하면 비싸다느니 흠이 있다느니 외국에 가서 사면 엄청 쌀텐데 타령하면서 밀어놓는다.
국외에 있는 며느리 그리고 언니, 조카들이 사주어야 못이기는 척 새옷이란걸 입어보면서 벙글사해진다. 며느리, 조카들이 입던 옷을 받아 입고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안해가 안쓰러워 보다못해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입으라고 돈을 건네주면 슬쩍 챙기면서도 정작 사입지는 않는다.
안해를 울린 그날
남들 보기에 안해를 지극히 아껴주는 것 같은 내가 안해를 울린 적이 있다면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 세기 80년대말이다. 그때 한번 맹랑한 일에 부딪쳐 나는 발행을 자청하여 나간 적 있다. 그래서 내려간 곳이 훈춘이다. 그때까지 훈춘은 우리 신문발행에서 사각지대였다. 불의의 충격을 받고 보니 머리도 정리하고 싶었고 나이도 어린 만큼 그 기회에 발행 불모지에서 한번 해보고픈 뚝심도 있었다. 10월말부터 양력설까지 두달남짓 하도록 한번도 집에 오지 않으리만치 매일 신문 주문으로 훈춘지역을 참빗질하듯이 샅샅이 훑어나갔다. 하루는 아침 7시에 나가서 저녁 아홉시까지 온 하루 도보로 4개 공사(지금의 향)와 진의 촌마을들을 차례로 돌았는데 걸은 길이 무려 40여키로메터나 되였다. 이런 걸음이 푸술하였다. 고진감래라고 할가 나중에 우정국에서 총 주문량을 확인하고 나서 경이로운 주문량에 너무 기뻐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개선장군 같은 희열로 오래 만에 직장에 들어서니 동료들은 수고했다면서 치하해주느라 야단법석이였다. 이때 사무실 주임이 나를 조용히 한켠에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고생했는데 집(직장)에서 걱정 덜어주지 못해 미안하네. 제때에 석탄을 실어갔더라면 애 엄마가 애 업고 직장까지 찾아오지는 않았겠는데…”하고 미안쩍게 얼굴을 붉히였다. 사무실 주임이 사과같이 한 말이 나에게는 되려 폭탄처럼 머리를 두드렸다.
“우리 집에서 직장을 찾아왔단 말입니까?”
“석탄을 제때에 실어다주지 못해서 답답해서 왔더구만.”
순간 뒤잔등이 서늘해났다. 나는 안해가 직장으로 찾아오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대남자주의여서도 아니다. 나도 안해 직장에 전혀 가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넘지 말아야 할 공과 사의 보이지 않는 적정선이 있어서이다. 두달 남짓한 막고생이 안해의 무단 직장출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이 된 것 같아서 참기 어려웠다. 저녁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안해와 아이가 반가워하든 말든 호되게 닦아세웠다. 안해는 대꾸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서러운듯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었다. 맞대꾸라도 해야 전의가 불탈 텐데 묵묵히 울기만 하니 결국 내가 머쓱하게 물앉게 되였다. 이것은 내가 딱 한번 안해를 울린 유래이다. 며칠 후에야 안해는 저녁을 먹을 때 나를 슬쩍 건드렸다.
“천정이 떠나갈 듯이 화를 푸니 속이 풀리나요?”
솔직히 말해 내가 분통을 터뜨린 건 복잡했던 감정과 기분의 포괄적 로출이였다 할 수 있다. 거기에 안해가 직장을 찾아 우는 소리를 했다니 도화선이 된 셈이였다.
“여지껏 내가 동무네 직장을 안 찾아가는 걸 알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이때는 안해 직장의 호황이 저물어갈 무렵이였다. 당연히 석탄을 한 트럭씩 와락와락 부려놓던 당년의 호시절이 아니였다. 화룡 복동탄광에서 우리 직장에 실어다준다던 석탄이 온다온다 하면서 오지 않아 안해는 일주일 나마 자기 직장 보이라실에서 석탄을 자전거 뒤자석에 야금야금 실어다 때다가 너무 힘들어 막무가내로 우리 직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터놓고 말하면 석탄도 마련해놓지 못하고 두달이나 밖에서 나몰라라 설친 나의 잘못인데 안해가 직장을 찾아갔다는 하나 만으로 성깔을 부린 내가 지나쳤다고 할 수 있었다. 직장 인맥으로 우리 직장 렬차표를 퍼그나 떼주면서도 안해는 출장 시 렬차 좌석권을 떼주면서도 한번도 그 표를 들고 나의 직장에 찾아온 적 없었고 직장 동료들 앞에서 한번도 그 말을 자랑삼아 꺼낸 적도 없었다. 자칫 이젠 직장 볼장 다 보고 단즙 다 빨아냈다고 여측이심이냐고 꼬깝게 생각하면 대단히 서러울 일이였다. 30대 미만의 어리석음이라 할가, 유치함이라 할가. 지금은 웃음으로 넘길 수 있어도 그런 가슴 시린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는 재직 시 줄곧 결혼, 생일, 상사 같은 일외에 직장의 사무적 일을 안해와 별반 건네지 않는 관행을 이어오고 있었다. 나의 집념이 옳은지 틀리는지 가리느라고 굳이 떠들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막혀진 이 세월에 부부와 직장일까지도 안 주고 받는다면 피차 나눌게 뭐 있겠냐고 남들이 설령 비웃는다면 할 말이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가볍게 넘기고 싶다. 안해가 나의 직장을 아는 정도도 자기가 엿본 데 그친다. 혹여 우리 직장으로 와도 접수실에서까지 오래 머물지 말라 한다. 고약할 만치 비정적이라도 따라주는 안해가 고마워도 속으로 받아들이지 절대 안해 앞에서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안해도 그런 나한테 길들여졌는지 그런 약아빠진 사치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리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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