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물먹은 적 있다
언제인가 나이 지긋한 동창생이 술이 얼큰해서 나이 어린 너는 그렇게 부러울 정도로 멋있게 사는데 머리 더 큰 자기는 왜 이 꼴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게 뭐 부러울 게 있어서 하고 웃음으로 넘긴 적 있다.
결혼해서부터 안해가 줄곧 친정집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안해로서는 친정집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니 시름 놓고 시집을 돌보았을 수 있다. 대신 내가 처가 쪽으로 더 정성을 쏟게 되였다.
맏형수는 아들 둘, 딸 하나에 세 자식을 두고 있다. 지금은 자가용차로 대여섯 시간이면 거뜬히 닿을 통화시를 교통이 숨 막히던 지난 세기 70년대에는 렬차를 리용해도 한쪽으로 만 사흘이 걸리고 그것도 차를 세번이나 갈아타는 역사를 치러야 했다. 1968년 3월초, 내가 일곱살 때인가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통화로 놀러 간 적 있었다. 그때 맏형수가 둘째로 본 딸이 두살이였다. 돌아올 때 어머니가 자기가 손녀를 봐주겠으니 이번에 데려가면 어떻겠는가고 물었다. 시집이라면 기둥뿌리라도 뽑아줄 맏형수인데도 이번만은 이례적이였다. 떠나는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턱에 서서 지긋이 며느리 대답을 기다려도 맏형수는 애를 안은 채 묵묵히 흑흑 느끼면서 눈물 만 하염없이 뿌렸다. 결국 우리는 맏형수의 바램도 받지 못한 채 우울하게 통화를 떠나게 되였다. 어린 나한테도 그때 조카를 어머니에게 맡기지 않던 맏형수가 그처럼 야속해서 가슴에 두게 되였다.
2019년초 안해는 갓 태여난 손녀를 봐주겠노라고 외국에 나가있었다. 손녀가 귀여운지 날마다 위챗으로 사진이거나 동영상을 보내왔다.
한번은 손녀애가 재롱부리는 동영상과 함께 “이제 생일 쇠고 집에 데려가야겠는데 얘네 놓아줄가?” 하고 위챗 글을 보내왔다. 나의 심기를 지독하게 건드리는 글이였다.
“너는 모아산 너머에도 아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수천리 밖에서 너한테 얼싸 안겨줄 것같아? 꿈 깨라, 그게 네가 받는 벌일 거다.”
그러고 보니 안해 의지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한번 만이 아닌 것 같다. 다만 평생의 여한을 남긴 이런 세부에서 남편이 안해를 꺾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지금도 헛갈린다. 대신 가끔이라도 이 기왕지사가 떠오를 때면 공연히 울화가 나서 자신이 바보 같아보인다. 내가 안해한테 화를 내는 90%는 여기에서 비롯되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도 나 였으니 받아준 줄 알아요
2020년 그해 음력설에는 애들도 올 수 없었고 가게도 그만두었으니 오랜만에 구애없이 설을 쇨 수 있었다. 통화 맏형네한테 전화로 설 문안을 보내고 부부 둘이 썰렁한 대로 밥상에 마주앉았다. 그날은 어쩌다 안해와 조용히 얘기하고 싶었다.
안해가 종래로 시집을 시집이라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하는 세절에서도 남편의 가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얼마간 짚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래력을 돌아보자면 단연 나의 맏형수부터 찾게 된다.
나의 맏형수는 철두철미한 골수 시집팬이였다. 친정집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서럽게 자라온 연유도 있겠더라도 아무튼 시부모를 친부모 무색하리만치 깍듯이 섬겼다. 둘째 형수, 셋째 형수가 선후하여 시집오자 맏형수의 처음 당부이자 약속이 “이 가문에 들어온 이상 시부모이자 부모이니 우리 시집이라는 말부터 쓰지 말기요. 그리고 시부모님이라도 절대 시자를 쓰지 말고…”였다. 과연 나의 형수님들은 집에서 ‘시’자를 전혀 쓰지 않았다. 둘째형수, 셋째 형수의 억양만 들어봐도 마음속에서 우러러나왔다는 진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안해 역시 자연히 이 같은 분위기에 녹아들게 되였다. 그래서 친정집 이웃들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하면 친정부모를 부르는가 착각할 때가 많았다. 놀러온 친구들과도 우리 집 했다가 어정쩡해하니 시집 말이야 하고 가볍게 웃어주는 에피소드만 들어도 그 같은 분위기를 짐작하기 별로 어렵지 않다.
6형제인 우리 가문에는 3대까지 하여 이젠 식구가 40여명으로 늘어났다. 코리안 드림이 세간을 흔들 때에도 우리 가문에는 한국 나갈 동아줄이라도 잡으려는 협의리혼,가짜리혼도 없었거니와 진짜리혼은 더구나 없었다. 농촌에 있는 두 형님, 형수들은 한국에 두번 나갔다가 4년씩 보내고는 욕심을 접고 맞춤한 무렵에 돌아왔다. 이는 우리 가문에서 그 무엇보다 자부하는 일이다. 삐여진 부자는 없더라도 어려움이 나지면 모두어 힘을 합쳐 풀기에 막히는 게 크게 없고 톡톡 튀는 부자는 없어도 특별히 부러운 게 뭔지 모른다.
우리 가문이 번창하는 까닭을 맏형은 평생 술 한잔 부어놓고도 반잔쯤 겨우 마시네 하던 아버지의 적도(适度)에 있다고 정의한다. 즉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부문별한 과욕을 버리라는 메시지이다. 자연히 이 가문에서 누가 일등 공신인가를 담론할 때도 있어 제법 흥미롭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팔순까지 모시다가 저세상으로 편안히 보내드린 둘째 형수님을 꼽는다. 대체 상 여기에는 이의가 없다. 다만 맏형수도 둘째도 셋째도 안해한테 얼굴을 돌린다. 경제적으로 우리가 돕느라 한게 맏형네 한테는 비기기도 부끄럽다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다만 형수네는 시골에 시집왔다고 시내티낼세라 격의없이 녹아준 손아래 막내동서가 기특하여서 후한 점수를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확실히 나도 안해의 희생이 만만찮다고 속으로 새겨두고 있다.
“이래 보니 확실히 고생한 것 같아. 고마워.”
표현에 익숙하지 않는 내가 처음 하는 치하여서인지 조금은 어색했다.
“그것도 썩 시원치는 않군요. 동무도 자기가 얼마나 섬기기 까다로운 남자인지 지금쯤 와서는 좀 알리겠죠? 내가 뭐 다 내켜서 따라주었는가 해요? 지금이라도 자기한테 놓아보면 저절로도 한심해나는 게 푸술 할 거예요. 다른 건 내놓고 그 위챗에 금방 온 글만 보아요. 감이 오잖아요.”
“무슨 글?”
뭐냐고 묻자 안해는 옛 직장동료한테서 어제 받은 글을 잊었는가고 뚱겨주었다. 보름전인가 한참 선배 녀동료와의 대화이다.
“애가 여기와서 공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라고 하며 나한테 고마운 일을 대여섯가지나 위챗으로 적어보내면서 정말 잊지 못하겠고 언제인가 꼭 보답하고 싶었다고 실토정하였다. 더듬어보니 그 속에 우리 직장 여덟호가 막 개발되던 연길시 신풍촌구역 8호 동네라는 별명을 가진 허름한 2층 공동 주택에서 살 때의 일도 들어있었다. 그때 집들마다 구들에 불길이 들지 않아 심하게 곤욕을 치른 적 있다. 어느 한겨울에 내가 우리 집 굴뚝에 안장했던 송풍기를 뜯어다가 두 집 너머 살고 있던 자기 집 굴뚝에 달아준 게 그중 고마운 사연의 하나였다. 로모를 모시고 힘들게 살고 있는 선배 동료여서 한창 나이인 내가 도와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었다만 30년도 거의 되니 희미해졌는데 오늘 다시 불쑥 튀여나오게 될 줄이야, 안해에게 그런 적 있느냐고 능청을 부리니 한심한 듯 없는 일을 지어냈겠느냐면서 한바탕 원망을 쏟아냈다.
“우리 집에도 불길이 들지 않아 그걸 달았는데 한겨울에 그걸 뜯어다 남의 집에 달아주는 동무가 제 정신이였어요? 그걸 받아주느라고 내 기분은 어떠했겠어요?”
“그랬다면 머리에 좀 물이 들어갔나 봐.” 하고 짐짓 게면쩍어하자 이때라는듯 다른 말도 꺼낸다.
“어디 그뿐인가요? 여지껏 안 말했다만 부모님을 모시는 아주머니들이 고생한다면서 나도 없는 금가락지를 먼저 사주자할 때 입으로 그러자고는 했으나 같은 녀자로서 기분이 어떠했겠는지 생각해보았어요?”
오늘은 분위기가 꽤 비장하다.
“그래서 나중에 부러울 게 없이 해줬잖아?”
“설마 꽃도 한철 멋도 한철이라는 말 모르지야 않겠지요?”
2001년에 국외에서 공부할 때 안해가 하도 고집하기에 금점에 가서 커풀반지라고 산 적 있다. 결혼 15년 만이였다. 워낙 내가 금반지라면 일절 질색해하는 데도 왜 그리 고집하냐 했더니 그때 설음이 남아있어 그랬을가?”
“또 형님 누나 넷을 똑같이 해줘야 된다면서 짝이 안 맞을 땐 상점에서 사다와서까지 맞출 때는 어쨌고요?…”
“불시에 다사해진다. 그래 여지 껏 못난 남편과 살아왔다는 투정질이야? 후회되면 이제라도 후회된다고 말해, 늦지 않으니…”
“호호호…후회한다는 말 듣고 재노 안하겠다면 이참에 확 터뜨릴가요? 형제들이 이젠 부러울 게 없이 어우러서 무랍없이 사니 서럽던 일 잊어진다 만은 아들애보고 너라도 절대 막내 사위로는 들어가지 말라 하자니 이젠 말짱 맏이자 막내이니 톡톡 튕기자해도 고를 상대 없네요.”
“그래 막내인 내게는 온통 불만, 불평만 꽉 찼단 말이야?”
“물론 그것 만이 아니였기에 오늘까지 살아왔겠죠, 하긴 썩 랑만 적인 남자는 아니여도 책임지는 남자쯤은 되려나? 가정 속의 남편에 아버지 책임, 형제 책임에 가시집 책임, 사회적 책임까지 두루해서…바깥에서 알아도 주고, 하긴. 요즘 세월에 남자들이 책임감 하나만 똑봐로 가져도 희한하니깐…. 뭐든지 꼭 하고야마는 동무의 볼썽사나운 성깔을 밑굽까지 빤히 알면서 모르는 체 할 수도 없었고요. 동료들도 다들 자기 일같이 받들어주는데…그걸 보면서 궤춤에 손 찌르고 멀쩡하게 구경만 하겠어요? 지금 보니 큰 거 못해도 가문을 하나 살렸고, 옛말이라도 편안히 할 수 있게 됐네요…”
“그러고 보니 아이를 곧게 키워준 거 빼놓으면 부쩍 서러워하겠지요?”
내가 잠자코 있으니 안해가 분위기가 무거울세라 말을 살짝 바꾸었다.
가뜩이나 이젠 며느리, 손녀까지 식구로 늘어나고 금방 설 문안전화까지 받은 터에 아들네 말이 나오니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아들애는 안해가 무등 자부하는 아픈 손가락이다.
우리는 아들애를 자유롭게 키웠다 할 수 있다. 안해가 자기는 공부에 삐치기 어려우니 아버지가 맡고 자기는 먹는 것만은 부러울 게 없이 감당하는 후근부장되겠다고 아들애하고 말한 적 있지만 나도 리과에 약한 게 스스로 못나보여 그저 되도록 아버지 따라 문사류하지 말고 리공과류 쪽으로 잡았으면 하는 기대를 말한 게 전부였다. 결국 아이가 리공과 쪽에 기운 걸 보고 수리화에는 애비보다 선생인 에미 닮아서 그런가보다고 흐뭇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다만 아이가 소학교 적부터 쭉 공부가 상류는 아니여도 달달 볶거나 별로 관여하느라 하지 않았다.
초중에 올라가기 직전 여름방학에 아이는 공원 미끄럼대에서 땅바닥에 추락하면서 턱이 뭉텅 깨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이가 느닷없이 변고를 당하게 되니 대학이고 뭐고 무사하는 게 유일한 바램이였다. 천만다행으로 후유증같은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가 수수하다할 성적으로 지방대학에 붙어도 원망하지 않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졸업하고 나서 아들애는 국내 선배들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 진로를 굳혔는지 싸이트에서 류학갈 대학교를 제절로 찾아가지고 홀로 외국에 나갔다. 따라가서 밥해주겠다는 엄마도 뿌리쳤다. 공학 석사학위 과정을 두개 밟고 이어 공학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8년 동안 등록금을 모두 장학금으로 해결한외 나오는 생활비, 연구비 등으로 일상을 소비하면서 집에 일절 손을 내밀지 않았다. 집에서 해준 거라야 처음 나갈 때 편도항공권과 레노버 노트북 그리고 5,000원을 준게 전부이다. 아들애는 지금 어느 반도체설비회사에 취직하여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 회사에서 이뤄놓은 실적과 누리는 대우를 얼핏 보아도 아들애가 명문대 나오지 못한 걸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가 싶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괜스레 싸구려 승벽내기로 류학간 친지들이 얼마 얼마나 받더라고 호들갑 떨며 침방울 튕길 때에도 분명 아들애 대우가 훨씬 나은 데도 안해는 절대 끼여들지 않고 듣기만 한다. 형수네와 자기 형제들과도 매한가지이다. 아들자랑이라는 걸 일절 하지 않는다. 안해가 아들애를 곧게 키웠다고 나를 고마와 하나 나는 어디까지나 안해가 손 맞춰주었기에 가능했다고 선을 그으면서 아무튼 잔소리 없이 아들애를 자유롭게 커가도록 여유를 준 안해를 고마와 한다.
말말 간에 가끔 나를 흘기면서 안해는 또 약국의 감초 같은 넉두리를 중얼거린다.
“하도 바보 같은 나이니까 여직껏 같이 살아줬지 그걸 받아줄 녀자가 또 있겠는가 어디 눈 비비고 찾아봐요?” 또 롱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타령이다. 세상에서 제일 살기 힘든 남자라느니 어느 녀자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겠느니 체면이 납작하게 구겨지도록 빈죽 거려도 오늘도 역시 묵묵히 받아준다. 이럴 때까지 마누라를 받아주네 하는 게 아니라 이겨보겠다고 침방울을 튕긴다면 둘도 없는 구제불능 바보이다.
원망삼아 짐짓 눈을 흘기면서도 아무튼 내가 뭘 하고 싶어하고 뭘 하자 하는지를 신통하게 제꺽제꺽 짚어내고 내키든 내키지 않든 맞춰주자고 손 내미는 안해이기에 내심 고마운 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다. 나한테 항상 비빌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 되였다고 할가, 한번 뿐인 인생인데 내가 하고픈 일에서 태반을 거뜬히 할 수 있었다고 뿌듯해 하느라면 안해가 정말 감격스럽다. 그러하기에 납작해지도록 원망하거나 벼랑 끝으로 나를 내몰아갈가할 때면 속으로 “너 아니면 없을가 봐서.” 하고 제 딴에는 확 오기를 부릴가 하다가도 정말 없는 것 같아 시무룩한 대로 참아준다. 하긴 침묵이 소리를 누르는가 하면 참는다고 지는 거 아니라는 말도 있잖는가.(끝)
/리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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