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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와 작가, 곧은 정신을 만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3년9월25일 14시52분    조회: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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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빛신록이 장백로에 여울지는 계절에 허룡석 선생을 만났다. 긴시간의 대화를 나눴다. 기자로부터 공직자, 작가를 거치며 다시 생활의 진리와 인간다운 모습의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그의 덕목에 필자는 모름지기 경건함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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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51년 2월 룡정시 동성공사(동성용진) 한 농민가정의 외아들로 태여났다. 1979년 12월에 중앙민족학원 민족언어번역학부를 졸업했으며1980년 7월부터 연변일보사 기자, 부주임, 주임, 부총편집으로 사업했다. 1995년 3월부터는 연변인민방송국 국장 그리고 길림성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가협회 리사,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가협회 부회장을 지녔고 1999년 7월부터 다시 연변일보사 사장 총편집, 당위서기를 력임했다. 2002년 연변주제8차당대표대회 위원으로 선거되였고 중국기자협회 리사, 중국소수민족신문연구회 상무부회장, 길림성신문업협회 부회장, 연변기자협회 주석을 맡았다. 그러다 2006년3월부터 연변작가협회 주석, 당조서기와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제6기, 7기 전국위원회 위원을 력임했다.

문학작품으로 중편소설‘팔부형이 이사가다’, ‘해후’, ‘잠식’, ‘큐피드의 영탄곡’, ‘달빛도의 락원’, ‘첫수업’ 등과 단편소설 ‘사랑과 령혼’, ‘인분표’, ‘지부서기의 자살’ 등 40편과 기행, 수필, 잡문, 칼럼, 동화 등 100여편 그리고 신문기사집 “창을 열면 진실이 보인다”, 장편기행집 “신비한 아랍땅으로 가다”, 단편소설집 “수의가계”가 있다.

1. 꿈은 기자

1972년, 21살나던 해였다. 5월 중순 세전이벌 한복판에 자리잡은 생산대에서는 모내기를 먼저 시작하는 이란공사 유채대대에 손잡이 뜨락또르를 보내여 논밭써레 삯일을 해주게 되였다. 며칠째 숨가쁜 밭풍경, 그러던 중 뜨락또르의 동음이 하루는 덜컥 끊어졌다. 한 부속품 나사가 터져나가면서 뜨락또르가 논바닥에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자체로 수리할 수 없는 고장이라 운전수는 어쩔바를 몰랐다. 한시도 지체없어야 생산대일을 계속 진행할텐데. 안달아난 운전수는 앞뒤로 뛰여다니다가 마을사람들의 귀띔대로 100여리 떨어진 산너머 왕청현중평공사농기계관리소로 향했다. 연길현의 맨 뒷자락에 자리잡은 유채대대는 산을 등지고 왕청현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튿날 오후 나사를 얻어가지고 돌아온 운전수가 감격에 들떴다. 서로 다른 현이지만 중평공사농기계관리소 일군들의 봉사태도가 그토록 좋았다는 것이였다. 김씨라는 분은 성부지 명부지였음에도 규격에 맞는 나사를 찾으며 일군 몇사람까지 동원해 자기일처럼 수리해줬다. 그러고는 쉼없이 기계를 돌리느라면 또 고장날 수 있으니 하나는 여남으로 쓰라면서 나사 두개를 더 쥐여주더란다. 돈을 치르려 하자 “농민형제들 일이면 우리들 일이지!”하면서 기여코 운전수를 밀어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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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치 무슨 령감의 불꽃이라도 점화되는 기분을 느꼈는지 어린 허룡석은 정황들을 까근히 물어보고나서 원고를 작성해 연변일보사에 부쳐보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뉴스에 대한 애착을 느꼈던게다. 감동사실을 반영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것이 정말로 신문에 실릴줄이야. ‘나사 두개’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그의 이름 석자가 번듯이 활자로 찍혀나왔다. 흥분에 휩싸여 심장이 튀여나올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꿈은 그렇게 가슴 깊은 곳에서 순간적으로 피여나왔다. 꿈은 어쩌면 애써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차’하고 발견되는 우연이기도 하다. 당사자를 안 만나고 썼던 기사인지라 확인차 그들을 찾아갔더니 기계관리소에서는 대단히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 시기 대대나 생산대 집체는 물론 절반 이상 사원가정들에서도 모두 자원적으로 당보를 주문해봤기에 신문에 실렸다하면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뉴스였다. 특수시기 정치운동때문에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허울을 쓰고 고향에 돌아온지 몇해 되였어도 토끼꼬리만한 지식으로 장차 뭘 할지 아리송해 세상 돌아가는대로 휘둘리기만 하던 이 아이는 결국 인생행로를 찾은 셈이였다. 흥취에도 부합되니 얼마나 복받은 일인가. 그후부터 굶주린 날새가 먹이찾아 다닌다고 그는 여유만 나면 보도감을 찾아 분산된 대대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신문에 실린 원고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는 일보사란 대체 얼만큼 엄엄한 곳이고 기자란 얼마나 멋있는 사람들인지 보고싶어 하루 한번씩만 통하는 뻐스에 올라 30리 떨어진 연길을 무작정 향하기도 했고, ‘생산대로동책임제’ 관련기사가 중요원고로 취급돼 담당편집의 단평이 함께 발표됐을 때에는 대대의 ‘작은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공사에 명망높은 전국로력모범 김시룡, 전국모주석저작학습표병 황순옥, 전국 3.8홍기수 리옥금 등 선진인물들을 쓴 원고는 더욱 큰 중시를 받았다.

그러다 1973년에는 대대공청단총지서기와 골간통신원으로 활약하면서 행운스럽게 연변일보사 골간통신원강습반에 추천돼 학습기회를 가지며 더 많은 신문원리를 터득했다. 두달가량의 견습은 앞으로 어떻게 해서든 기자로 될 다짐을 하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입당과 동시에 대대당지부서기로 발탁됐다. 그 기간 허룡석은 각 생산대 지식청년 적극분자대오를 정리정돈하고 발전성 있는 청년들에게 의식적으로 공청단이나 민병간부 혹은 부녀간부 생산대간부 책임을 떠맡겨 그들이 실천 속에서 자기장점을 발휘할 기회를 마련해줬고 한해 지식청년 6명을 입당시키는 전례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간부는 대대사람들의 위촌에 떠밀려 한 것이지 그의 꿈이 아니였다.

대학추천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년령, 25주세 되던 해, 그는 10년 전 홍위병대표로 북경에 가 주숙했던 중앙민족학원 도서관을 떠올리면서 대학꿈을 꼭 실현할 것이라 결심했다. 공사 ‘철밥통’을 가질 수 있음에도 지식이 운명을 개변한다는 도리를 그는 깨달았으리. 대대와 어머니의 반대에도 그는 연변일보사 박하림 주임을 찾아나서면서까지 스스로에게 기회를 창조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어릴적부터 분석력과 순발력이 뛰여난 고집스런 청년 허룡석은 1976년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중앙민족대학꿈을 이뤘다.

졸업 후에는 다시 연변일보사에 돌아왔으며 3년간의 기자, 8년간의 부주임, 주임을 거쳤다. 박하림 부총편이 퇴임하게 되자 그는 주당위 비준을 거쳐 부총편집, 사장을 맡았다. 한편 조직의 배려로 ‘인민일보’, ‘농민일보’ 전국편집기자 훈련반에도 참가했고 한국의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견학하며 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조선정부 기관지 ‘민주조선사’와도 제휴관계를 맺으며 친분을 유지했다. 또한 유일한 소수민족대표 5명으로 구성된 중국신문대표단에 참가해 민족언론를 홍보했다. 다년간의 노력 하에 연변일보사와 그는 성신문학회 선진과 모범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2. 세개의 25년

그에게는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세개의 25년이 있다. 20살에 남에게 떠밀려 덩덩히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쳤다가 락방되고 25년 후에 연변인민방송국 국장이 된 것. 23살에 연변일보사 전주 통신원강습반에 조선족 4명 중 한명으로 뽑혔다가 25년 후에 연변일보사 사장, 총편집으로 된 것. 31살에 첫 단편소설 ‘사랑과 령혼’을 연변문예에 발표했다가 25년 후에 연변작가협회 주석, 당조서기로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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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그는 연변인민방송국 국장을 맡게 되였다. 그 시기 그는 한국의 주요방송사들인 KBS, MBC, SBS등 중앙급, 지방급 방송사들과도 허물없이 래왕했다. KBS홀의 프라이즈시상대에도 올라보았고 대통령 좌편에 자리잡고 앉아 대통령의 즉흥적인 제의로 발언도 했다. 그는 방송국의 중층간부초빙제, 직원초빙제, 장려처분제도보완 등 획기적인 개혁으로 특수공헌자 명예를 받기도 했다. 또한 경제가 어려운 형편에도 조건을 창조하여 력사상 처음으로 생방송을 제때에 올리면서 전례없는 방송효과를 이룩하기도 했다.

“개혁이 물결치는 시절이였어요. 개혁이란 정확히 하면 혁신이지만 방법론이 틀리면 재앙이지요”

허룡석은 1999년에 연변일보사 사장, 총편집, 당위서기로 발령이 내렸다. 그 시기 정부의 부축으로 살아가야 할 연변의 신문출판, 문학예술은 부유한 남쪽동네의 개혁을 따라한답시고 장장 9년 동안이나 시장에 떠밀렸다. 로임을 주지 못하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였다. 다년간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조직을 믿고 울분을 조용히 삭혀오던 편집기자들, 나중에는 퇴직인원들도 동원돼 이들은 조직이란 ‘보뚝’을 터뜨리고 프랑카드를 들고 주당위 청사앞에가 ‘먹고 살게 해줍시사!’, ‘민족정책을 제대로 관철집행하라!’며 불만을 호소했다. 이는 전국소수민족 당기관보 중 유일한 청원이며, 결국 두차례에 거친 대규모청원으로써 현실을 마구 떠난 시장화는 막을 내리게 되였다. 그렇게 록록치 않은 마지막 7년을 사장, 주필로 헐떡인 선생은 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 지도자들을 찾아 뛰여다니면서 연길시 가장 번화한 중심지역에 연변일보사 12층 건물옆에 19층 건물을 일으키기에 필사의 노력을 들였다. 여기에는 그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이들의 로고가 있겠다…

“문제의 근원은 나한테 있지 않지만 어쨌든 청원사건이 나의 임직기간에 두번이나 발생했으니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되지요” 불운마저 달갑게 받아들이는 한 공직자의 바른 자세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는 굳이 삶의 우연과 필연을 따져 그것에 빠져 크게 아파하거나 크게 기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서로 뒤엉킨 것이 바로 인생이기에. 신은 아마 세개의 25년 그리프를 사전에 정해놓고 그 틀에서 벗어날가봐 그를 아픔을 겪게 하면서도 신비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필연을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른다.

3. 작가, 그 무거운 이름에 대하여

간부란 양성되는 것이지만 작가란 발견되는 것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뒤늦게 창작에 참여했어도 선생은 분명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스스로는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선생을 보면서 필자는 다시 한번 ‘작가’라는 이름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봤다. 지금은 여기저기 작가가 용솟음치는 시대다. 모두가 작가이면서 대부분 작가가 아닌 시대다. 글로동자와 작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작가의 창작활동은 쉽게 말하는 것처럼 그런 손쉬운 일이 아니라 제 살을 뜯어먹고 제 피를 빨아먹고 제 뼈를 갉아먹는 괴로운 로동이다.

2006년, 연변작가협회 주석, 당조서기를 력임한 선생의 창작활동은 그때로부터 수필과 소설을 대량으로 써내면서 활기를 보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작가들 무리에서 개성과 자존심 강한 작가들을 ‘상대’하며 맡겨진 직무를 성실히 리행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풍격대로 창작에도 매진해야 했다.

이미 방송국시절부터 그는 원칙없는 풍기를 바로잡는 곧은 국장으로 알려져있었다. 곧은 성격 그리고 덕목있는 됨됨이와 해학적인 유머로 그는 작가들의 어떤 ‘모욕’도 다 리해하고 이겨내면서 비바람 잘 새없는 작가협회 ‘두목’노릇을 착실히 전개해나갔다. 어떤 이들의 ‘개떡’같은 말도 ‘호떡’같이 들어줄 아량을 키웠고 ‘각설이’같은 ‘환자’도 ‘갑순이’로 보아줄 너그러움도 생겨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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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작가란 군체가 없다면 사회와 민족, 력사에 책임지는 민족문화와 인류문화의 한구석은 크게 구멍뚤릴 것입니다. 아무리 모지름을 써도 큰 돈 못벌고 권력 없는 작가들, 더우기 모어로 창작하는 소수민족 작가들은 ‘불쌍한’ 군체이지요. 그러면서도 이들은 민족문화의 번영을 위해 개인 득실을 따지지 않는 귀중한 군체이지요”라고 말하는 선생은 ‘괴짜’같은 작가들 덕분에 무딘 필이나마 들고 다시 문학이란 ‘량산’에 오를 수 있었단다.

또한 고정된 문학사업자금이 조달되지 않은 형편에서 체면을 무릅쓰고 해마다 여기저기에서 자금을 인입해들이고 연변작가협회 50주년 경축행사를 성대히 벌였고 대사기와 번역작품을 출판하고 각종 세미나 등 문학행사를 개최했다. 거기에 ‘연변작가협회문학상’, ‘김학철문학상’, ‘화림신인문학상’등 여러 종류의 문학상응모 및 시상식을 제때 펼치고 산하 창작위원회들의 문학활동을 경제적으로 부축하며 젊은 작가들을 양성했다. 연변밖의 창작위원회들을 순방하기도 하고 회원들간에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 ‘재판관’을 자처했으며 중국작가협회에 우수작품을 추천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공작들을 차근차근 진행해나갔다.

이에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를 력임했던 김병화는 “소수민족 문학은 중국주류문학의중요한 구성부분이지요. 작가협회사업은 자기로서의 개성과 특성이 있으니 당정기관과 언론계의 작법을 그대로 옮겨와서는 안되지요”며 선생의 공작태도를 긍정했다.

선생은 결코 ‘문학도 모르는 주석’이 아니였다. 그는 륙속 ‘아리랑’, ‘연변문예’, ‘은하수’ 등에 소설을 위주로 수필, 동화, 칼럼 등 100여편을 발표하며 작가의 립지를 다졌다. 주석으로 온 후 선생은 주석이라는 베일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저잣거리의 광대가 되여 보통 작가들은 말하기 힘든, 말하기 저어하는 사회적비리를 서슴없이 파헤쳤다. 그는 관청사회 부조리와 사회적문제에 누구보다도 예리한 시각으로 치렬한 문제의식과 사회의식을 담아내며 어두운 삶의 그늘에 촛불같은 그런 글을 써온 작가이다. 그의 소설들에는 속악스러운 경쟁론리만 강조되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부패한 현실문제를 변혁하려는 굳건한 의지가 끊임없이 반영되고 있다. 중편소설 ‘해후’와 ‘팔부형이 이사가다’ 등이 모두 이러한 소재이며 수필 인생3부곡 ‘인생은 널뛰기’, ‘인생은 뽈차기’, ‘인생은 소용돌이’; 잡문 ‘낯가죽은 엷으면 좋느리라’, ‘아첨쟁이의 속마음’; 단편소설 ‘장기들의 반란’ 등도 모두가 훌륭한 문제작들이다.

문학작품의 내재적 령혼에는 시종 하나의 정신이 관통되여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마음 속으로부터 부르고 싶은 ‘노래’이다. 이렇게 비춰볼 때 선생은 문학창작에 량심을 걸었다. 그는 승화된 문학언어로 자기의 량심을 써냈고 민족적량심, 력사적량심을 밝힌 것이다. 이는 그가 보도매체 지도일군 그리고 크고 작은 부문, 높고 낮은 간부들과 자주 접촉하며 변화무쌍한 관청사회를 몸소 겪은 까닭에서일게다. 그 소재들이 알알이 글감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문단에 발을 들여놔서야 새삼 깨달았다. 모래 속에 묻혀있던 진주를 작협에서 발견한 셈이다. 농축된 원액같이 그것들의 무게와 속울음을 각혈하듯선생은 퇴임 13년에도 치렬하게 글을 토해내고 있다…

4. 인간 허룡석

평범한 농촌부녀였던 어머니는 선생이 공사간부로 된 것에 만족하며 어서 빨리 결혼해 손주를 안겨주기를 원했다. 그때 그는 수천명 귀향, 하향청년들을 거느리는 공청단서기로 있었기에 따르는 처녀들도 한둘 아니였다. 하지만 더 배워야겠다는 욕심에 ‘철밥통’ 직업도 포기하고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척 하면서 기어코 대학에 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불효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후에도 선생은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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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로인은 태여나서부터 자주 앓는 애들에게는 이름을 천하게 지어야 명이 길다면서 선생에게 ‘매지’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단다. 젖이 안나는 어머니는 그를 안고 동네를 돌며 동냥젖을 먹였다. 어머니의 못말리는 정성에 맘씨 고운 마을 어머니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젖을 물려줬다. 그러다 렴치없이 계속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그가 좀 춰서자 암죽을 끓여먹였다. 사탕이 귀하던 때에 어머니는 어데가서 사탕가루를 얻었는지 암죽에 꼭꼭 사탕가루를 섞어주었다. 마구 거부하던 어린 피덩이를 보며 어머니는 온돌바닥을 치며 울다가도 다시 일어나 암죽을 끓였다. ‘천인젖’을 먹던 입은 어느새 암죽에 습관되였는지 잘도 받아먹었다. 어머니 열손가락은 이미 불에 데고데여 감각을 모르는 살만 두텁게 들어앉았다. ‘비천한’ 농민으로서 부모들은 그에게 우월한 사회환경과 재부를 안겨주진 못해도 그들은 평생의 정력과 심혈로 선생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담임 리용식 선생은 ‘학교에 남으라’는 놀라운 기회를 창조해주셨다. 이에 선생은 한동안이나 "그래도 발전하자면 여러모로 조건이 훌륭한 북경에 남아야 한다. 작은 늪에서는 큰 고기가 자랄 수 없다. 드넓은 바다가 나의 수영장이다...” 또 “그러면 효도는? 고작 출세를 위해 평생을 자식 위해 아글타글하신 부모 가슴에 피눈물 고이게 할 것인가? 효성이 지극하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 했다. 개구리가 되였다고 올챙이때를 잊지 말아라...”의 사상투쟁 컸다도 한다. 그는 출세와 효도, 량심을 모두 지킬 수 없는 현실에서 도덕적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장래보다도 우선 량심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은혜를 아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 마침내 귀향을 택한 그는 80세 어머니가 돌아간 후 골회를 아버지 산소곁에 모셨다가 32년 후 소하룡 합수목에서 두분을 띄워보냈다.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못난 자식이 부모곁을 지킨다. 효도를 위하여 기어코 ‘못난이’를 자처한 선생의 바른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도덕이고 량심의 선언인 것이다.

뜨거운 것일수록 덤덤하게 조용히 으깨는 법이다. 선생도 마치 슬픔이나 사랑이나 열정이나 모두를 덤덤함 속에 치렬하게 녹여내는 듯싶었다. 한생 한사람만 사랑한 그에게 아내 김순선은 평생의 동지이기도 했다. 아내는 선생이 방송국과 일보사 간부를 전전하던 성장길에서 ‘거금’을 빌려주면서까지 곁에서 지지해준 사람이다. 생물학적각도에서 죽음은 그저 먼저 죽고 후에 죽고하는 것뿐인데 후에 가는 사람은 먼저 간 사람의 슬픔마저 짊어지고 살아내야 하니 더 슬픈 법이다.

작년 춘삼월에 세상 뜬 아내는 근 20년간 신화서점 총경리, 당조서기로 중공중앙선전부와 국가신문출판총서에서 발급한 전국도서발행 최고영예상, 성 출판집단 우수경영관리일군 등 수많은 명예를 따냈으며 사업수요로 6년간의 연장근무 중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2009년부터 난치질환인 파키슨병에 걸렸다. 그런 아내를 선생은 장장 14 년 동안 손발이 되여주며 살뜰히 보살폈다.

선생은 남편으로써 아내를 향한 작은 부름에도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담았다. 선생은 행사가 있어 나갔다가다도 저녁회식이 있을 때면 “우리집 ‘당의 딸’이 기다리니 나는 들어가야 하오”라며 급급히 돌아와 아내의 저녁식사를 챙겼다. 파키슨으로 고통을 겪던 중 2019년에는 부주의로 넘어져 척추 12마디를 수술하며 만신창이 된 아내를 그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간호원으로 나섰다. 코로나방역통제로 시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 선생은 휠체어를 밀고 여러층을 오르내리며 검진을 받게 했고 밤이면 침대사이에 방수포를 펴고 쪽잠을 잤다. 그후 아내는 기본상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집안에서도 걸어다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다보니 오장륙부마저 하나둘 병들었고 페에 염증이 생겨 기침이 나고 가래가 끓고 숨이 올라오지 않아했다. 체중도 35키로까지 줄었다. 아득바득 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대성통곡하다가도 다시 힘을 내주는 아내를 보며 선생은 가슴이 찢어졌다. 선생은 아내가 민감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느껴 서글퍼할가봐 마스크도 고무장갑도 없이 오로지 변함없는 사랑과 책임으로 14년 동안 아내를 간호했다. 백년가약을 맺던 호시절의 첫마음을 결코 잊지 않은 선생은 그 언약을 평생으로써 지켜냈던 것이다…

...

“아직 쓰고 있는 글들도 있고 못 발표된 원고들도 있고…”

언제 발표될지도 모르는 원고들이지만 아직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는 선생에게 정녕 글이란 혼자 쓰는 것이며 스스로 펼치는 환희거나 목마름임을 느꼈다.

헤여질 무렵, 선생은 나의 손을 잡으며 따뜻이 웃고 있었다. 누군들 부딪치고 치우치며 살지 않는가. 그러나 자신을 찾아오는 불운에 원망보다는 감사, 곧은 마음으로 대처한 선생에 필자는 되려 진통으로 밤을 새웠다…

/류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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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4일,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전국 량회가 곧 북경에서 소집된다. 왕청현 항신건축안장유한책임회사(恒信建筑安装有限责任公司)에서 온 옥명희는 제14기 전국인대 대표의 자격으로 이번 성회에 참가한다.얼마전 옥명희는 인터뷰에서 이번 북경에 가서 회의에 참가할 때 자신은 고향인민들의 기대와 부탁을 잊지 않고 인...
  • 2023-02-28
  • 2월 20일, '2023년 월드옥타 제1차 동북지역 회장단 경제포럼'이 대련캠핀스키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이날 회의에서 월드옥타 본부 리성국부회장과 월드옥타 본부 엄광철부이사장은 지난 몇년간 코로나19 전염병 영향을&nbs...
  • 2023-02-24
  • 2월 20일, 중국 최동북단의 우리 말 방송인 흑룡강조선말방송이 개국 60주년을 맞이했다. 1963년 2월 20일 '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도 없다네'의 개시곡과 함께 조영, 심경화 아나운서의 첫 뉴스방송을 시작으로 중국의 가장 동북단 변방지역 흑룡강성 할빈에서 송출하는 조선말 방송이 고고성을 울렸다. 중국...
  • 2023-02-21
  • 개천에서 룡난다는 건 거짓말 같은 소리로 들리는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거나 성공하는 것을 개천과 룡에 비겨 이르는 속담이다. 학강시 라북현은 지도에서 찾기 쉽지 않은 습지가 많은 지역인데 말 그대로 속담에서 나오는 개천이라고 불리기엔 둘도 없이 알맞는 고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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