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계동현의 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난 광동예지아전자과학기술유한회사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할빈사범대학 일본어학과에 진학, 대학 졸업후 벌리현조선족중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
1992년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고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그 이듬해에 새로운 꿈을 찾아 중국의 개혁개방 1번지 심천으로 가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장장 30여년간 낯설고 물선 심천 땅에서 새로운 경력을 쌓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이 걸어온 길과 마찬가지로 결과는 화려하지만 걸어온 길은 파란만장했다고 털어 놓았다.
목표는 성공의 시작이다
목표는 성공의 시작이다. 인생은 만약도 없고 다시도 없다. 그러나 미래는 있다. 당시 전경숙은 알수 없는 그 미래를 꿈꾸며 그 미래를 향해 달려 갔다.
우리가 무엇이나 한가지 결정을 하기 전에는 목표를 세우고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것을 잃거나 혹은 다른것을 놓치게 된다. 어느 누구도 례외가 없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 역시 그러했다.
1993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였다.
교사 시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설득해서 재수시키려고 찾아 나섰는데 다들 광주나 심천의 일본 기업에 취직했다고 했다. 자기한테서 일본어를 고작 기초 정도만 배운 학생들이 자신의 봉급에 비해 10배 넘게 받는다고 하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았고 고민에 빠졌다. 교사 사업이 아무리 신성한 직업이라고 해도 현실은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막상 모든걸 뿌리치고 훌 떠나려고 하니 5살 딸애가 마음에 걸렸고 가르치던 학생들이 걱정됐다.
그는 교장한테 다시 올수도 있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마음을 모질게 먹고 중국에서 '철 밥통'으로 불리며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교사라는 평생 직업을 버리고 딸애를 고향에 두고 자신의 새로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교단을 떠났다.
중국의 제일 북단에서 제일 남단으로, 중국의 제일 추운 곳에서 제일 더운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날씨가 추워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
우리 말에 '날씨가 추워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고 어려움을 겪어야 진정함을 알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전경숙 명예 동사장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심천에 가서 적응할 사이도 없이 3일만에 구인광고를 보고 심천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취직했는데 통역을 담당했다. 일본 기술자들이 신축 공사를 하면서 현장 통역을 할 일도 많았다.
한여름이라 무더위가 말이 아니였는데 36-37도 되는 고열에 회사의 건축 현장에서 선풍기도 없이 적어도 하루 십여시간씩 밖에서 사무를 보다나니 그 고생을 한입으로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견디어야 했고 일본어 통역으로서 많은 전문 용어들을 제대로 통역할수 없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숙소에 돌아와서는 "교사로써 존경을 받고 남들의 부러움도 받았는데 왜 수모를 당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하며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수 없다며 이를 악물고 견지했다.
낮에 제대로 통역하지 못했던 전문 용어들을 익히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공부도 했다.
얼마나 열심히 현장을 뛰였다녔는지 한달만에 새로 산 신발의 바닥이 싹 다슬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모자를 꾹 눌러 쓰고 뛰여 다녔으나 얼굴이 해볕에 그을려 가마잡잡 해졌고 어느새 기미가 깨알처럼 돋아났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외선을 차단하는 크림이 없었고 솔직히 있는 줄도 몰랐다.
경력이 쌓이고 업무에 익숙해져 점차 회사관리에 대한 공부의 절박함을 느꼈다. 회사의 총무, 인사업무까지 맡아 일인 다역으로 일했고 야근도 많았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욕심만은 버리지 않았다.
외자기업이 어떻게 운영 되는지, 외자기업이 직면한 문제는 무엇인지, 외자기업에 관련된 '로동법'이나 '보험법' 그리고 세무, 세관 관련 업무 등도 익혀나갔다. 이 모든 골치거리를 하나하나 부딪쳐 가면서 해결해야 했으므로 정력이 딸리고 힘에 부쳤어도 그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스스로 배우고 터득하면서 하나하나의 어려움을 풀어나갔다.
이렇게 한해두해 해가 바뀌고 심천에서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자 산동성 위해에서 사업하는 남편도 심천으로 왔고 고향에 두고 왔던 딸도 심천으로 데려와 3곳에 흩어졌던 가정도 '복원'이 되였다.
그는 정말로 '악척녀'라는 말을 들으며 격변하는 심천과 함께 30년을 달려왔다. 30년전 고향을 떠나 심천으로 진출할 때 울며 불며 엄마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울던 5살 되던 딸도 이젠 30대 중반이 됐고 일본 류학을 다녀와 현재 심천에 금융회사를 꾸리고 제2 금융권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렇게 간고하게 시작해서 10여년은 거의 휴식없이 일을 했고 종자돈을 모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2001년에 형제 친적들과 공동창업을 하게 되였고 20여년 시간을 거쳐오면서 거듭되는 성장을 하였다.
자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살펴 보고 있다.
처음에는 로동밀집형 중소기업으로써 금속, 사출 등 과학기술 함량이 낮은 간단한 제품을 생산 했었는데 지금은 첨단기술 굴지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룹으로 자리 매김했다. 자동차부품, 핸드폰 부품 등 과학기술 함량이 높은 정밀제품을 생산하여 세계 일류회사에 공급하고 있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이 주요 고객 계시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예지아 제품은 적지 않은 세계 일류 회사에 공급되고 있다.
'예지아그룹은 광학산업을 선도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광학산업 선도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장기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달리고 있다.
1000여명 로동자를 고용하고 년간 인민페 3억원의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자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살펴 보고 있다.
현재 211건의 특허를 취득했으며 중국의 유명대학인 절강대학, 상해복단대학, 화남리공대학, 남방과학기술대학 등과 협력하고 있다.
2018년 광동성과학기술청으로부터 '광동성정밀광학부품 및 금형 공정기술연구센터'라는 영예를 받았다. 그리고 당지 정부로부터 여러차례 표창 받았다.
예지아그룹은 현재 상장 준비를 하고 있으며 사회에 많은 일자리 제공, 세금 납부 등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동관에 위치한 예지아그룹 본부 공업원 전경
회사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끝임없이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때문에 객관적, 주관적, 목표, 환경, 조건 등 방면에서 원인을 찾고 효과적인 방법을 대야만이 회사가 발전할수 있다. 예지아그룹 회사도 언제나 비용, 인건비, 재료, 효률, 기술 각방면에서 개선을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행해 전진을 해왔다.
만약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멈추고 있으면 내리막 길을 가게 되고 계속 견지를 하게 되면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모든 어려움은 목표를 달성하는 길에서 꼭 경과해야할 올리막 길이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이 생산 현장을 둘러 보고 있다.
노력과 지혜가 성공의 필수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성공하려면 노력도 해야하고 지혜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한 친구가 무엇때문에 우리의 차이가 이렇게 나는 가고 물었다. 그때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꾸준히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누구나 다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데 왜 차이가 나는가"고 다시 되물었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그럼 달랐다면 녀성, 가정, 경영, 경제 여러면의 책을 읽으면서 얻은 지혜가 끊임없이 그의 목표를 향해 이끌어 준것이 큰 차이가 아닐가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바로 독서의 힘이라는 것이다. 노력과 지혜로 가정과 사업 두마리의 토끼를 잡았다고 할수있겠다.
한가지 일을 하는것은 어렵지 않지만 끝가지 견지하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생에서 많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려움에서 물러서지 말고 이를 악물고 묵묵히 노력을 견지해야만이 인생 돌파구를 찾을수 있고 자기의 절주에 맞게 자유롭게 성장 할수있다.
그도 창업 초창기에는 여러가지 사연으로 달마다 적자가 생겨 봉급도 못주는 형편이였지만 끝임없는 개혁과 도전을 하면서 여기까지 성장을 하게 되였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창업을 희망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는 누구나 꿈꾸는 만큼 이룰수 있다"고 귀띔했다.
동관에 있는 예지아그룹 본부에서 포즈를 취했다.
명문대가 좋지만 들이대(견지)가 최고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는데 바로 "명문대가 좋지만 들이대(견지)가 최고이다"라는 것이다. 학력이 중요하지만 인생에 무엇보다 겁없는 과감한 추진력이나 끈질긴 정신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만약 실패하면",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이런 생각이 앞선다면 아무일도 할수 없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일단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막무가내로 아무 계획도 없이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면밀하게 계획을 짜는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편 사람마다 비지니스와 경제학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 97℅의 부자가 비지니스에서 온것이다. 또 비지니스는 경제학을 떠날수 없다며 경제학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국제무대에서 맹활약하다
지난 9월 초 한국 부산에서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녀성 리더들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는 제 22회 세계한민족녀성네트크(이하 코윈)가 열렸는데 360명의 세계 한인녀성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는 전경숙을 단장으로 각 지역에서 온 녀성리더 21명으로 구성된 중국 대표단도 있었다.
행사 기간에 코윈 중국지역 제9-10기 담당관이였던 전경숙 명예 동사장이 한국 녀성가족부 장관 표창장을 수여 받았다. 코윈대회 일정에 이어 세계한민족녀성재단(이하 코위너) 제8회 국제컨벤션이 열렸는데 중국에서는 코윈 담당관 전경숙을 단장으로 4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이 중국 지역을 대표하는 기성세대 패널 발표자로 초청되여 성공 사례를 발표했는데 각국 대표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이 세계한민족녀성재단 제8회 국제컨벤션에서 중국지역을 대표하는 기성세대 패널 발표자로 초청되여 성공 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중국 대표들이 예전에는 참석해서 듣기만 하던데로부터 이제는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런 단합된 모습으로 박수 갈채를 받는 모습에 뿌듯했다고 중국 대표단 참석자들이 말한다.
특히 중국 녀성 리더들이 배우고 느끼며 글로벌 녀성리더로 성장한것으로 평가된다.
전통문화 바통을 이어가는데 앞장 서다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경영활동을 하면서도 사회봉사와 전통문화 바통을 이어가는데도 앞장서 왔다.
회사 년말 파티에 참석
2004년부터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며 광동성 조선족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민족문화 전승과 발전을 위하여 조선족 노래자랑, 민족운동대회 등 여러가지 행사의 조직과 진행에 참여하였다.
2010년부터 전국애심녀성포럼에 참가하면서 조선족 녀성들의 자아성장과 민족공익 활동에 도움을 주었으며 교류와 나눔을 통해 우수한 녀성들과 동반성장을 하였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광둥성조선족녀성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는데 전국애심녀성포럼 제5회 심천 워크숍을 개최, 중국 10여 개 지역 400여 명 녀성 리더들이 참석했다. 특강, 비지니스 소개, 기업 탐방을 통한 조선족 녀성리더 및 차세대 리더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녀성 단체간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편 2021년부터 광동성 한글주말학교 설립과 어린이들의 한글 공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2019년 8월부터 2023년 9월까지 전국애심녀성포럼 의장, 세계한민족녀성네트워크 중국 지역담당관으로 선임되여 중국 지역 녀성단체를 10개으로부터 15개로 발전시켰으며 민족문화전승, 전파, 자선공익사업, 차세대양성 및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많은 기여와 후원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경숙 명예 동사장은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서 자기를 알고 현실에 맞게 자유로운 길을 선택하여 성공하기를 기대하면서 “모든 아름다움은 미래로 가는 길에 있다”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전경숙 프로필
1962년 흑룡강성 계동현 출생
1986년 7월 할빈사범대학 외국어학과 졸업
1986년 9월~1993년 2월 흑룡강성 벌리현조선족중학교 일본어 교사
1993년3월~2014년 5월 교오화프라스틱제품유한화사 CEO
2001년~현재 광동예지아전자과학기술유한회사 명예 동사장
2004년 6월~현재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부회장
2010년~2014년 광동성조선족녀성협회 초대 회장
2014~현재 광동성조선족녀성협회 명예 회장
2016년 1월~현재 전국애심녀성민족발전공익기금회 공동발기인 집행 이사장
2019년 8월~2023년 9월 코윈 중국 지역담당관
2019년 10월~ 2023년 9월 코윈 중국지역담당관 중국 전국애심녀성포럼 의장
2023년 5월 세계한민족녀성재단 평생이사
/리수봉 기자. 사진 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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