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백성들의 생활 형편은 전례 없는 제고를 가져와 복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문화생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집집마다 큼직한 채색텔레비가 있고 사람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여 집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손바닥에서 세상과 련계하며 현대화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한날한시에 이룩된 것이 아니다. 텔레비만 하여도 채색은 고사하고 흑백텔레비도 귀했던 시기를 걸쳤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 20대의 청년들은 흑백텔레비를 구경조차 못하였을 것이다.
1970년 나는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량식이 박한 연변을 떠나 입쌀이 흔한 길림성 유수현 연화조선족향에 이사하여 살았다. 그곳은 1948년 길림성인민정부에서 조직한 연변의 연길현과 화룡현의 이민들로 조직된 조선족향인데 수전농사만 짓는 벌방시골이였다. 토지면적이 많아 입쌀이 정말 흔하였다. 집집마다 곡간에는 입쌀마대가 차고 넘쳐 장사군들과는 돈으로 교역하는 것이 아니라 입쌀로 교환하였다. 입쌀을 저렴한 가격으로 정하니 장사군들은 흔쾌히 승낙하며 좋아하였다.
두부장사, 돼지고기장사, 소고기장사, 옷장사, 약장사... 하여간 벼라별 장사군들이 다녔는데 농민들은 모두 입쌀주머니들을 들고 나와 교역을 하였다. 인심이 후하고 입쌀이 흔한 이곳 농민들은 입쌀 가격을 시내 가격보다 퍽 낮게 정하고도 주먹이 커서 결산에서는 꼬리부분을 따지지 않아 장사군들은 연화조선족향에 오기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인심이 좋고 량식이 흔한 곳이지만 문화생활은 매우 뒤처져 있었다. 극장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이동방영대의 영화구경도 겨울에는 집체 우사칸에서 벼북데기를 깔고 보았다. 소똥 구린내가 물씬 풍기여도 농민들은 웃으면서 구경하였다. 그런데 마을에 이동방영대가 오는 날이면 소들은 추운 겨울날씨에 밖에서 떨어야만 하였다. 겨울에는 연변보다 기온이 3-4도 낮아 대소한 기간에는 오줌이 얼 지경으로 혹독하여 소들은 추위에 부르르 떨었다.
교통이 불편하니 문화생활도 따라서 불편하였다. 연화조선족향은 유수현성과는 120리 떨어져 하루에 뻐스가 한번밖에 통하지 않아 농민들은 현성으로 다니기가 매우 힘들었다.
흑룡강성 성소재지 할빈과는 기차표값 1.50원으로 가깝지만 연화향 동북쪽에는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성계를 흐르는 큰강 라림하가 가로막혀 날씨가 좋은 여름철에만 작은 쪽배를 타고 왕래하다나니 불편이 심각하였다. 비가 몹시 오거나 바람이 세찰 때에는 사공이 움직이지 않으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려야 하였으니 그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때는 채색텔레비는 고사하고 흑백텔레비도 사기 힘들었다.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여 사자면 사전에 큰 성시의 백화상점과 련계하여야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1974년 가을 사전에 흑룡강성조선말방송국 최기자님을 앞세워 할빈시 제일백화상점에 사전구매계약을 하고 며칠지나서 상해에서 생산하는 비약패(飞跃) 19인치짜리 흑백텔레비를 실외 안테나까지 합하여 1,200원주고 샀다. 그때는 유선케이블이 없는 때라 실외 안테나에 의지하여 신호를 접수하여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텔레비를 샀다는 소식이 재빨리 100여호 동네에 퍼져 온 마을은 큰 경사나 난 것처럼 남녀로소가 총동원하여 우리 집에 구경왔었다. 나는 오자마자 재빨리 텔레비 안장에 달라붙었다. 사전에 준배해둔 8메터 이깔나무대 끝에 안테나를 안장하고 집 앞 백양나무에 의지하여 철사로 단단히 묽었다. 그리고 안테나를 돌릴 수 있는 쇠손잡이를 몇곳에 단단히 고정하였다.
안테나에 련결한 선을 텔레비에 련결시키고 전기를 넣으니 텔레비 막에 좁쌀 같은 무늬가 알른거려 다시 안테나를 고정한 나무를 천천히 움직이니 드디어 영사막이 환해지며 영상이 나타났다. 마을분들은 드디어 환성을 울리며 좋아라 박수를 쳤다. 그 무슨 대성공이라도 이룬 것처럼 대단히 좋아하였다. 여섯시 중앙방송뉴스를 보고 저녁 여덟시 20분부터는 일본련속극 <배구녀장>이 방송된다고 소개하였다. 젊은 청년들은 좋아라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다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집안이 꽉 찼다. 부엌과 부뚜막까지 사람들이 빼곡빼곡 앉았다. 철부지 어린애들을 가마뚜껑에까지 앉히였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밖에 앞마당에서 서성거리며 혹시나 있을 기회를 기다리였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배구녀장> 련속극이 시작되였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영사막을 지켜보던 마을청년들은 이따금씩 환성을 울리며 흥분에 쌓여갔다. 한편 소리만 들으며 밖에서 지켜보던 청년들은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며 서로 창문가에 다가서서 한장면이라도 보려고 했다.
이렇게 우리집은 새 흑백텔레비를 사온 날 첫날밤을 많은 사람들 속에 끼여 자정까지 힘들게 보냈다. 소학교 1학년에 금방 붙은 큰딸은 숙제공부도 못하고 사람들 속에서 불편한 잠을 자며 꿈나라에 들어갔고 그 아래 동생들은 하나는 엄마 품에 둘째는 나의 품에 안겨 힘든 밤을 보내야 했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널려 꼴불견이였다. 담배연기는 아직도 온 집안에 자욱하여 매캐한 냄새까지 코를 찔렀다. 새 텔레비를 사서 온 가정이 단란히 모여앉아 문화생활을 하자고 할빈에 가서 어렵게 텔레비를 사온 것이 되려 골치거리로 생각밖의 우환이 된듯하였다.
안해는 생각밖으로 바가지를 긁지 않았다. 안해는 “그래도 우리가 텔레비를 샀기에 모두들 믿고 오는데 어찌겠습니까? 래일 저녁부터 텔레비를 아예 밖에 마당에다 놓고 봅시다.”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밖에서 보는 것이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가 있어 좋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그 방법이 좋을 듯싶었다. 아이들도 공부도 하고 마음대로 잘 수 있어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안해를 칭찬하며 동의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 이튿날 저녁부터는 큰책상을 밖에 놓고 그우에 텔레비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랬더니 이튿날저녁에는 온 마을 남녀로소 모두 모여와서 구경하였다. 지어 뒤마을에서도 남녀청년들이 모여와서 앞마당이 용납할 수 없어 그앞 울타리를 넘어 채소밭까지 점하였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온 나그네들은 아이를 목마 태우고 보게 했고 어떤 이들은 집에 가서 걸상을 가져다 그 우에 서서 구경하였다. 별의별 진풍경이 연출되였다. 100여호 동네에서 모이니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재미있게 보는 이웃들에게 얼굴을 붉히는 것은 례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이튿날 아침 내가 일찍 일어나 앞마당 채소밭을 돌아보니 마치 폭격 맞은 전쟁마당이 되였다. 배추, 오이, 가지, 무우, 시금치, 파 같은 남새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여 죽창이 되였다. 하루밤 사이 한가정 채소밭이 먹을 수 없게 란장판이 되였다. 오이는 아예 다 뜯어먹어 넌출마저 성한 곳이 없었다. 채소 뜯으러 나온 안해는 채소밭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억이 막혀 말도 하지 못하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광경이였다.
이때 웃집에 있는 한족아주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자기 집 남새를 여러가지 따서 한바구니 가져다주어 며칠간은 먹을 수 있게 되였다. 그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하루건너 린근에 있는 청산향 채소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다먹었다. 청산향 채소시장은 꽤나 크고 교역량도 컸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5-6리되는 거리여서 그것도 하루건너로 다니자니 헐치 않았다. 향정부에 출근하는 나는 출근 시간에는 다니지 못하고 계속 점심 시간을 리용하여 다녔는데 점심 휴식을 하지 못하여 여름에는 꽤나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흑백텔레비를 사다놓고 앞마당 채소밭을 거덜내여 관람장으로 만들고 2년간 여름 외지로 채소구입을 다녔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고 모든 것을 리해하고 받아들이며 달갑게 여기였다. 마치 타고난 운명처럼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왜 그랬을가 리해가 안되였다. 그후 2년이 지나면서 우리 마을에도 텔레비를 사는 호가 늘어나서 더는 골치 아픈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시내 백화상점에서 일본제 채색텔레비를 팔았는데 자그마한 14, 16인치 짜리가 4,000여원 5,000여원하여 농민들가정에서는 꿈도 꿀수 가 없었다.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농촌에서 호도거리를 하여 농민들 수입이 재빨리 증대되였고 편벽한 연화조선족향에도 흙길이 포장도로로 변하고 선진적인 농기계가 들어오고 자가용이 늘어나면서 살맛나는 고장으로 변하였다. 지금은 집집마다 모두 대형 채색텔레비가 있다. 옛말이 돼 버린, 흑백텔레비도 귀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허구푼 웃음만 나온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 사람들의 인정은 더없이 따뜻하였다.
/김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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