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로부터 ‘연변 좋은 사람’칭호를 수여하고 연변지역에서 알곡대재배호로 불리는 최명성농민은 줄곧 농촌에 뿌리박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촌민들이 버리고 간 760무에 달하는 경작지를 장장 10년간 기계화 농사로 알심들여 가꾸어 당지 농업생산을 추진하고 새농촌 건설에 크게 기여하고 있어 동네방네에 소문이 높다.
연변의 알곡대재배호 최명성
한국로무 갔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온 최명성
금년에 52세에 나는 최명성은 원래 장백조선족자치현 십사도구진 삼남촌에서 태여났으며 십사도구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에 돌아 와 줄곧 농업에 종사해 왔다. 20년전인 2003년 1월, 그는 온집 식구들과 함께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동성용진 석정촌에 이사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장장 10년간 편벽한 산간마을에서 어머니를 높이 모시면서 촌에서 도급맡은 20여무의 경작지를 다루면서 소와 닭 등 집짐승을 기르며 이럭저럭 살림을 유지해왔다.
룡정시 동성용진 석정촌은 2010년까지만 해도 수백호의 농호에 1,200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연변주에서는 출국로무열조가 일어 마을에는 적지 않는 촌민들이 밭을 버리고 로무송출로 한국에 나갔고 또 국내에서 알곡가격이 부단히 하락되면서 마을에는 많은 경작지가 남아돌면서 페허로 되였다. 한국에서 몇 년간 돈을 벌어온 이웃들은 손에 돈이 있게 되자 많은 집들이 차츰 연길시나 연해도시로 이사를 떠나게 되였다.
최명성은 2012년, 40세의 나이에 다른 사람의 소개로 한 조선족녀성과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도 2014년도 봄에 안해와 함께 마을사람들을 따라 로무로 한국으로 떠나게 되였다.
한국에서 약 한달간 일하면서 마을사람들이 모두 밭을 버리고 한국에 돈벌이를 나왔다는 소식에 접한 최명성은 년세 많은 어머니가 외롭게 집에 남아있고 고향마을이 텅비여 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꼼꼼히 생각하고 고민하던 끝에 그는 아예 집에 돌아가 고향마을에서 어머니를 높이 모시면서 남들이 버리고 간 경작지를 도맡아 기계화 농사로 치부하려고 작심했다. 이리하여 그는 안해의 권고도 마다하고 한달 만에 곧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최명성, 정봉 부부
장장 10년간 기계화 농사로 해마다 760무 경작지 다루어
정작 집에 돌아오고 보니 생각과는 달리 일이 그닥 순조롭지 못했다. 촌민들이 버리고 간 경작지를 도급맡아 다루자고 하니 실로 애로가 많았다. 기술이 모자라고 농사경험이 부족한데다가 자금이 전혀 없다 보니 대체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 지를 몰라 안절부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선 그는 연변주과학기술협회, 룡정시농업과학기술보급소, 동성용진농업과학기술보급소와 련계를 달아 그들의 과학기술 지도를 받으면서 해당 부문의 과학기술 론증과 비준을 얻고 개인독자기업인 명성재배전업농장을 세웠다.
뜨락또르를 몰고 가을걷이에 나선 최명성
진정부와 신용사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으로 그는 일정한 신용대부금을 내오고 농업기술원을 초청하여 농업생산에 관한 과학적인 기술지도를 받으면서 한해한해 묵어가는 마을사람들의 경작지를 한무, 두무 도급맡기 시작했다. 선후로 시신용사와 시농업은행으로부터 근 60만원의 신용대부금을 맡았으며 형제, 친척들한테서 몇십만원을 장만한 후 옥수수와 콩 등 우량종자를 구입하고 화학비료, 농약을 해결하고 또 선후로 70마력 뜨락또르 2대와 파종기 2대, 가을걷이 수확기 2대, 지게차 1대, 밭갈이 기계(旋耕机) 2대, 분무기 1대, 루초기(搂草机) 1대를 구입했으며 생산모식을 전통적인 농업으로부터 현대적인 신형 농업으로 전변시키였다. 그리고 2014년 봄부터 기계화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생산규모를 부단히 확대한데서 10년간 그의 경작지 종식면적이 최고로 975무에 달했고 보통 760무에 달해 보통 농장의 규모에 도달했다. 이리하여 올해까지 그는 이미 장장 10년간 해마다 마을의 760여무에 달하는 경작지를 도급맡고 주요하게 옥수수를 위주로 규모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가 여러 가지 농업과학기술서적을 열심히 탐독하고 연변주와 룡정시에서 꾸리는 각종 과학기술보급과 강습반에 참가하여 시야를 넓히고 농업과학기술수준을 부단히 제고하고 과학영농으로 경작지를 부지런히 알뜰하게 가꾸어온 데서 근년래 해마다 알곡 대풍작을 거두었다.
그는 해마다 기계화농사를 지어 신용대부금을 갚는 외에 손에 돈이 좀씩 생기면 각종 기계설비를 개조하거나 농업생산에 재투입을 했으며 년로하신 어머니를 높이 모시면서 고향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알아본 데 따르면 최명성의 안해는 한국에 나간 후 남편이 신용대부금을 많이 맡고 계속 농사를 짓는다는 리유로 결혼 5년 만에 서로 갈라졌다고 한다.
가을걷이에 나선 최명성, 정봉 부부
농촌에 뿌리박고 기계화 농사로 알찬 경제수입을 창출
지난해 년발까지 최명성은 신용대부금 120만원을 몽땅 갚고 순 10여만원의 경제수입을 올렸으며 올해부터는 아무런 비용이 없이 알찬 경제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올해 그는 륜작으로 근 700무의 달하는 한전에 옥수수를 심고 또 120무의 밭에 콩을 심었는데 옥수수 무당 수확고가 2,000근에 달했고 콩 무당 수확고가 500근에 달해 농업 총생산량 100여만근 실현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이리하여 최명성은 올해 모든 비용을 빼고도 년간 순수입 60만원을 바라보고 있다.
2020년 기계화 농사로 계속 농촌에 뿌리박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최명성에게 흑룡강성 녕안시의 아름다운 한족 녀성 정봉(45세)이 자기절로 자가용을 몰고 편벽한 이 산간마을을 찾아와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화목한 가정 살림을 영위해나가고 있다.
새로 구입한 수확기
‘무엇때문에 흑룡강에서 연변을 찾아와 산골마을의 한 조선족사나이에게 사집을 오게 되였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그녀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하도 인품이 좋고 부지런하고 마음씨 고우며 능히 모든 곤난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과 신심이 있어 보였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최명성은 장장 10년간 줄곧 기계화 농사로 밭을 다루고 있지만 해마다 봄파종과 가을걷이에 뜨락또르와 수확기(收割机)를 쓰게 되는데 운전수, 기술일군을 써야 했기에 많은 비용이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2020년부터 뜨락또르, 수확기를 익숙히 다루는 안해 정봉의 덕분에 해마다 3만여원의 품삯을 절약하게 되였다.
새로 구입한 농기계
농사일에 바빠도 촌민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최명성은 아직도 기계화 농사로 해마다 촌민들의 760무에 달하는 경작지를 알차게 다루고 있으며 2013년부터 촌당지부 당소조 조장, 촌민소조 조장을 맡고 있으며 2019년부터 지금까지 련속 4년간 촌의 보조경찰을 맡아하면서 촌민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최명성이 마을의 빈곤호 가정을 돌아보고 있다.
공산당원인 최명성은 근년래 마을의 리종철, 김병화, 전림호 등 빈곤호 가정을 적극 도와 나서고 있다.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그들을 도와 화학비료, 농약을 구입하거나 우량종자를 선택하고 봄파종을 해주군 했다. 그리고 풍년의 가을철이 돌아오면 그들을 도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거나 때나무를 해결해주었으며 그 어떤 곤난한 일이 있으면 두말없이 적극 도와 나서군 했다.
이와 같은 사업성과로 하여 최명성은 근년래 연변조선족자치주로부터 ‘연변 좋은 사람’으로 평의되고 룡정시로부터 ‘룡정 좋은 사람’, ‘우수공산당원’, ‘지원자기여상’등 영예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영예증서
/김춘만 최창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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