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중국사회과학원 리성일 박사의 ‘성적 역전 공부법’
공부는 마라톤이다. 진득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는 끈질긴 사람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승리를 맛본다.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거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아태및글로벌전략연구원 리성일박사는 그야말로 진득하게 책상머리를 지켰던 ‘공부벌레’였다고 학창시절을 회상했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부는 정말 정직하다. 부지런한 노력은 성적으로 보답 받는다. ‘공부벌레’로 불릴 만큼 공부에 쏟아부었던 리성일 박사는 1990년에 룡정고중 문과생으로는 유일하게 북경대학 합격자로 모교를 빛냈다.
“그 당시엔 먼저 지망을 쓰고 대학입시를 치렀던 때인데 북경대학을 지망했을 정도면 성적에 대한 고민은 없었겠지요?”
기자의 물음에 리성일박사는 “담임이신 심성범선생님의 덕분이 엄청나게 컸죠. 연길도 몇번 못가본 촌뜨기가 뭘 알았겠어요?”라며 겸손한 대답을 보였다.
“고중 담임이신 심성범선생님은 력사교원이셨는데 저의 학습과 생활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이세요. 1990년에 대학 지망을 쓸 때 저도, 농촌에 계신 부모님도 이 방면에 대한 료해가 별로 없었어요. 제가 제출한 지망서를 확인하신 선생님께서 저더러 북경대학에 지망하기를 희망하셨어요. 담임선생님의 인도와 격려가 없었다면 저의 대학 지망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단 말이죠.”
북경대학 학부시절(1995년), 조선족 대학생들과의 졸업기념 사진.
인생을 바꿔준 심성범 담임선생님의 얘기를 하면서 리박사는 한사람의 성공은 우선 본인의 노력과 분투를 기반으로 하지만 부모님, 그리고 학교와 선생님들의 응원과 지원도 절대 빼놓을 수 없다고 연신 강조했다. 고중 때 담임교원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지도와 인도, 반급 동창들의 성원, 그리고 친척들의 지지가 학창시절 본인의 성과를 완성시킨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리성일박사는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담임선생님의 기대 대로, 본인이 지망한 대로 리성일 박사는 1990년에 북경대학 정치학및행정관리학부(현 정부관리학원)에 합격했다. 그리고 노력한 대로 본과과정 이후에도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에서 석사를,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했고 졸업 후에 한국 동서대학에서 4년 동안 교수로 교편을 잡으면서 공부에 대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이 사진은 1999년 12월에 촬영한 사진. 당시 조선족으로서 처음으로 원사로 당선된 강경산원사 축하모임에 북경의 대학생 대표로서 참가, 발표했다는 리성일 박사. 최년소 중국과학원 원사로 당선된 박세룡원사(당시 북경대학 학부생)가 이 모임에 참가해서 자신도 원사가 될 꿈을 키웠다는 뒤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시골 촌뜨기’의 성적 역전
“그렇다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나요? 얼만큼 노력했나요?”
“시험을 치른 날 오후에도 책을 펼치고 공부를 했어요.”
룡정 시가지에서도 50키로메터 넘게 꽤나 멀리 떨어진 룡정시 삼합진 남호촌(현 학서촌)에서 태여나 남호소학교에 이어 삼합중학교를 다녔다.
“산 밖에 산이 있다고 삼합에서 나름 좋은 성적으로 룡정고중에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고중에 와보니 우수한 친구들이 그렇게도 많더라구요.”
가장 현실적인 체감이 바로 고중 첫학기 기중시험에서 락제점수 과목이 나왔던 것. “물리와 화학 두 과목에서 락제점수를 받았다.”며 리성일박사는 그때를 회억했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딱 한마디 하셨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번 열심히 노력해봐야 하지 않겠니(당시 반급의 좌우명이였음, 人生能有几回搏?)’ 그리고 그 학기 기말에 반급에서 3등을 했어요.”
리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고 락제에서 반급 3등 자리에 오르기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였다고.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주말 구분 없이 공부에만 매달렸던” 그는 다시 한번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 정도로 할 수 있었을가 할 정도로 그야말로 피타는 노력을 쏟았다는 게 바로 리성일 박사의 ‘성적 역전을 만든 공부법’.
첫학기만에 적응기를 완전히 끝내고 그는 두번째 학기에는 당당히 학년 1등을 쟁취했다. 이어 그후 줄곧 문과반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에야 고중시절이 “그리하여 학년 1등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정의되지만 고중 3년 세월의 노력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은 한마디이기도 하다.
‘학년 1등’의 뒤에 고비마다 동기부여가 되여준 담임선생님의 묵직한 한마디가 있었다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배려해준 가족의 지원과 희생도 있었다.
“고중에 진학하면서 집을 떠나 외지생활을 시작하게 되잖아요. 부모님들이 삼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 뒤바라지를 했는데 그당시 저를 기숙사에 보내지 않고 따로 룡정에 세집을 맡아주었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손주의 고중 뒤바라지를 자처해 나섰구요.”
지난 8월 고향을 찾은 리성일 박사, 삼합해관 교두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할머니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마치 어제일 같다. 인터뷰 내내 할머니의 헌신을 여러번 꼽았던 리성일박사는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담아 북경에서 사업하고 생활하지만 그래도 추석이나 설 때에는 고향을 자주 찾아가보려 한다고 말했다. 고향에 가면 할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고 했다.
“도움을 주는 일에 참여할 수 있어 행복”... 인생 선배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희망’
목표를 향한 끝없는 도전, 열정과 노력으로 점철된 리성일박사는 지난 8월 모교인 룡정고중에서 열린 제1회 룡정고중동창회 교류모임 현장을 찾아서도 노력의 중요성을 재차 짚었다. 재학생들에게 학업과 발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리성일박사는 학생들에게 시기에 맞는 옳바른 노력을 들이길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 8월 모교인 룡정고중에서 열린 제1회 룡정고중동창회 교류모임을 통해 후배들에게 진로상담을 해주고 있는 리성일박사.
“저 또한 고중시절의 분투와 노력이 있었기에 그후의 대학꿈, 류학꿈을 이룰 수 있었고 지금의 사업상 연구성과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매 단계마다 상응한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학습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건 당연히 본인이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점을 설파하면서 그는 그 시기를 살아온 인생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공유하고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싶다는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북경에서 열리는 공익행사에 활발히 참여하는 편이다. 2001년에 설립되여 2002년부터 장학금을 발급하기 시작한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에서 2015년부터 집행위원회 주임 직책을 맡아 애심영재장학생 공익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애심장학회는 대학생들에 대한 경제적 후원 외에도 조선족대학생 자원봉사상, 대학생 성장포럼, 대학생 글짓기콩클, 북경시 통주구에 있는 주문빈(본명 김성호, 조선족 출신 혁명렬사, 통주지역 첫 당조직 창건) 렬사 모교-로하중학교 탐방 등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며 소개를 이어간 리성일박사는 “오늘날 애심장학회에는 학자와 전문가, 기업가, 직장인, 가정주부, 퇴직간부, 나아가 어린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발전했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더욱 긍지를 느끼는 점은 “장학생 출신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후에 애심장학회에 후원금을 기부하거나 집행위원회에 가입해 활약하고 있어 장학회의 량성 순환은 물론, 사회의 긍정에너지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면서 애심장학회가 전하는 선한 영향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19기까지 진행된 장학회는 570여명 학생들에게 15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리성일박사는 학생들의 희망을 돕는 공익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든든한 뒤심이 되여 희망과 애심을 전하는 전달자가 되고싶다는 바람을 천명하기도 했다.
2021년 5월, 주문빈 렬사의 모교인 통주 로하중학교를 방문한 애심장학회 집행위원회 일행이 학교의 서화 교장 등 간부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매번 갈 때마다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이름으로 주문빈 렬사 장학금에 1만원을 기부해 왔다고 리박사는 소개했다.
인터뷰 말미에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으로 리성일 박사는 “성공은 노력하는 자가 얻는다.”를 꼽았다. 그러면서 정말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부했던 고중 때의 그 정신, 기백으로 계속 꾸준하게 노력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는 겸허한 자기성찰을 하면서 웃었다.
/길림신문 김가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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