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전 골회함 안고 천만리 길 달려왔던 요조당, 림소란 부부를 추억하여
지금으로부터 32년전인 1992년 8월14일이였다.
당시 화룡시 서성진발행소에서 사업하고 있던 필자는 서성진 서성촌 제3촌민소조에 과거 이 마을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왔던 상해지식청년 부부가 찾아왔으니 가서 취재해보라는 진당위 문서 남분적의 제의를 받았다.
지체할세라 달려가 보니 40대 중반 쯤 돼보이는 중년부부가 20대 청년과 함께 한 농가의 온돌에 마을사람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40대 중년부부는 1969년도에 상해에서 서성촌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왔던 요조당, 림소란 부부였고 20대 젊은이는 1971년도에 서성촌에서 출생한 이들 부부의 아들 연민이였다. 알고 보니 이들은 머나먼 상해에서부터 골회함을 품에 안은 채 천만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몇날 몇밤을 기차와 뻐스를 번갈아 타면서 동북변강의 농촌마을인 서성촌까지 내처 달려왔던 것이였다. 그들이 골회함을 안고 상해에서부터 천만리길을 달려온 데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가?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56년전인 1969년으로 돌아간다.
변강농촌에서 맺어진 조한 두 민족의 피보다 더 진한 혈육의 정
1969년, 상해지식청년 요조당과 림소란은 하향지식청년으로 대도시 상해에서 변강의 자그마한 농촌마을인 화룡현 서성공사 서성 3대로 오게 되였다. 하향한 이듬해 요조당과 림소란은 백년가약을 맺고 타향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다. 당시 집체호가 비좁아 신혼집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인품 좋은 서성촌의 촌민 리생금이 그들에게 선뜻이 자기 집 웃방을 내여주었다. 리생금은 남편을 일찍 잃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머나먼 상해에서 산설고 낯선 타향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이들 부부의 딱한 사정을 가긍히 여겨 함께 살면서 생활상에서 친자식 못지 않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돌봐주었다.
리생금할머니와 함께 천안문광장에서 남긴 요조당의 가족사진
1971년도에 요조당 부부가 아들애를 낳게 되자 리생금할머니는 마치 친손자를 본 것처럼 기뻐했으며 애를 애지중지 보살펴주었다. 이들 부부는 아들애가 연변에서 태여났고 연변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연민(延民)이라고 지었다. 그 당시 비록 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이들은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친부모와 자식 못지 않은 가족애로 서로 의지하면서 오손도손 살아갔다.
그러던 1979년, 지식청년 정책이 시달되여 요조당 부부는 10년 만에 다시 상해로 돌아가게 되였다. 이들 부부는 친혈육이 없이 혼자 사는 리할머니를 홀로 두고 차마 상해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리할머니를 아예 상해에 모시고 가기로 했다. 상해에 계시는 요조당의 부모님들도 그들이 리할머니를 끝까지 모시는 것을 견결히 찬성해 나섰다. 리할머니는 극구 사양했지만 요조당 부부의 진심어린 권고와 끈질긴 청구에 마침내 상해로 가는 것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살아오면서 고향마을을 멀리 떠나본 적도 없는 리할머니는 이들 부부의 지청구에 못이겨 일단 먼저 몇해 동안만 상해에 가서 살아보고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생각이였다. 그래서 이제 늙어 세상뜨면 입으려고 했던 수의도 고향마을에 두고 갔고 집 판 돈 800원도 고향마을 저축소에 넣어둔 대로 상해로 떠나갔다.
리생금할머니의 생전 모습
상해에 간 후 리할머니는 요조당, 림소란 부부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대도회지 생활을 느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상해 대도시의 생활이라 하지만 리생금할머니의 마음만은 그냥 고향마을에 가 있었다. 상해로 가서 5년 철을 잡던 해 리할머니는 고향마을에 대한 사무친 그림움 때문에 연변에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요조당 부부가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요조당 부부는 리할머니를 모시고 다시 연변에 돌아왔다. 그런데 정작 떠날 때가 되여 다시 리별할라니 정이 들대로 든 이들 부부와 리할머니는 작별인사를 나누기가 정말 힘들었다. 더우기 당시 할머니 품에 안겨서야 잠들군 했던 아들 연민이가 리할머니의 목을 꼭 끌어안고 할머니가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도 상해로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로 떼질을 쓰는 통에 리할머니는 다시 이들 부부를 따라 상해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5년이 넘는 세월을 리할머니와 요조당 가족은 한집에서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피보다 진한 혈육의 정으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친혈육’이 되였던 것이다.
“내가 죽거들랑 꼭 령감의 무덤 옆에 묻어주게”
상해에서 살면서 리생금할머니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살아생전 슬하에 혈육 하나 없이 살아왔던 리할머니는 상해에서 친혈육 못지 않은 요조당, 림소란 부부의 보살핌 속에서 만년을 별 걱정 없이 보냈지만 죽어서는 고향마을 뒤산에 묻혀있는 령감 무덤 옆에 묻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내가 죽거들랑 꼭 령감의 무덤 옆에 묻어주게.”리할머니는 요조당에게 항상 그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91년 정월, 리생금할머니는 상해에 온 지 꼬박 13년 철을 잡던 해에 91세 고령으로 세상을 떴다. 리생금 할머니가 이토록 장수했고 요조당의 가족과 천륜지락을 누리게 된 데는 이들 부부와 아들 연민이의 민족과 혈연관계를 초월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깊은 정분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리할머니가 세상을 뜬 이듬해인 1992년 8월, 요조당 부부는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만사를 제쳐놓은 채 아들 연민이를 앞세우고 리할머니의 생전 유언에 따라 다시 연변을 찾았던 것이다. 조선족의 민속풍속습관을 잘 알고 있는 요조당 부부는 골회함을 안고 서성촌에 도착하기까지 강을 건널 때면 “할머니 강을 건늡니다.”하고 골회함에 일일이 문안인사를 하면서 달려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도착한 그 날로 마을사람들과 함께 리생금할머니를 남편 옆에 고이 묻어주었고 리할머니의 생전 유언을 실천하는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미담을 엮었다. 당시 이들 부부가 서성촌을 찾았을 때 서성진에서는 한창 진운동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들 가족은 운동대회 주석대에 초대되여 상빈 대접을 받았고 당지 사람들의 감탄과 흠모의 눈길을 한몸에 받아안았다.
“자기 친부모도 아닌 타민족의 년세 많은 로인을 한두해도 아니고 그토록 오래동안 끝까지 모신 것만 해도 대단한데 로인의 생전 유언을 지켜드리기 위해 골회함까지 안고 머나먼 상해에서부터 천만리길을 달려왔으니 정말 조련찮고 대단한 사람들이지요…”당시 이들의 사적을 잘 알고 있는 서성진의 촌민들은 너도나도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연변일보》에 실렸던 당시의 기사 <골회함 안고 천만리>
당시 필자가 이들 부부를 취재해서 쓴 기사 <골회함 안고 천만리>는《연변일보》에서 펼쳤던 ‘세태컵’ 기사 응모 콩클에서 최고상인 1등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글을 잘 써서 최고의 수상영예를 받았다기보다 상해지식청년 부부의 갸륵한 소행이 인심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놀래웠기에 《연변일보》에서 최고의 상을 주었다고 굳게 믿고 싶다.
중화민족공동체 의식 확고히 수립,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민족단결의 노래
요조당, 림소란 부부가 조선족 할머니인 리생금을 상해에 모시고 가서 친어머니 못지 않은 사랑을 주고 또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골회함 안고 천만리길을 걸어온 이야기는 어느덧 30여년전의 아득한 옛말로 되였다. 그러나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는 력사시대적 배경하에서 조한 두 민족 보통 백성들이 엮은 민족단결의 감동적인 노래는 결코 때지난 이야기가 아니며 세월이 흐를수록 반짝반짝 빛나는 감동과 울림이 있는 미담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3월 22일에 소집된 연변주선전사상문화사업회의에서 성당위 상무위원이며 주당위 서기인 호가복은 연변의 력사 속에 묻혀있는 요조당, 림소란 부부가 조선족할머니 리생금을 마지막까지 돌본 감명깊은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연변에 묻혀있는 이러한 훌륭한 민족단결 이야기들을 적극 발굴하고 널리 선전하는 것은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는 데서 매우 가치있는 전형이라고 강조하여 지적했다.
상해에 간 후 요조당 가족과 함께 있는 리생금할머니
《연변조간》신문은 올해 청명절을 맞으면서 요조당, 림소란 부부를 전화취재하고 그들이 이젠 70세를 넘긴 황혼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여전히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세상뜬 리생금할머니를 추모하면서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기억이 희미해져가도 결코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민족적 우애와 감정, 그리고 요조당, 림소란, 리생금 할머니 등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엮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민족단결의 미담들은 날이 갈수록 더 소중한 빛을 발하면서 수천수만의 후대들을 영향주고 또 고무격려하고 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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