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면서 조깅시 필자는 동네 작은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잠간 쉬였다 간다. 요즘 흰 운동복 차림의 로신사 한 분이 그 벤치를 차지해 버렸다. 며칠 련속 로신사가 매일 그 시간대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필자‘령토’의‘침범자’이다.
그래서 전보다 좀 일찍 나가‘령토’를 되찾으려고 했는데 로신사가 어느 시간대에 나왔는지 여유만만하게 책장을 넘기면서 챙겨가지고 나온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령토’를 빼앗긴 필자가 분수대 뒤에 있는 돌의자에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 로신사가 아침식사를 끝내고 물러가기를 기다리는데 헌 자전거를 끈 로숙자가 나타나 필자가 앉은 자리를 흘끔거린다.
잠깐 다리쉼이나 하는 줄 알고 한 쪽에 비켜서서 기다리던 로숙자가 필자가 음료수를 꺼내드니 낮은 계단 옆에 자리를 잡는다. 필자가 차지한 자리가 그 분의 고유한‘령토’인것 같다. 그 분이나 필자나 다‘령토 주권’을 빼앗긴 신세다.
필자는 로신사가 스스로 물러가길 바라고 있고 로숙자 역시 필자에게 자주 눈길을 준다. 로신사가‘철수’를 하지 않으니 필자는 남의‘령토’이지만 죽치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 로숙자는 체념하고 그늘을 지워주는 낮은 계단 벽에 바싹 붙어 앉아 빵 하나 꺼내 먹으면서 포켓 책을 꺼내든다.
로숙자가 책을 읽는 광경은 처음 본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로숙자의 모습은 대체로 고개를 떨구고 조는 모습이 아니면 멍한 시선으로 한 곳만 응시하는 모습이다. 빵으로 아침식사를 때우며 책을 열심히 읽는 로숙자가 마치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듯한 모습으로 안겨온다.
로신사와 로숙자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폰을 뒤지는 것이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닐까 싶어 필자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로신사가 읽고 있는 책과 로숙자가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지 궁금하다. 로신사가 든 책 두께가 두툼하고 로숙자가 읽는 포켓 책도 두툼하다. 장편 글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종이로 된 책을 읽어야 글을 읽은 것 같다는 안해의 말이 귀전에 울린다. 언젠가 공항에서 탑승 대기 중인 일본 소학생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눈에 밟혀온다. 좌석은 어른들에게 양보하고 공항 대기실 바닥에 앉아 열심히 책을 보는 모습이다. 폰을 만지작거리는 애가 한 명도 없다.
필자에게도 하루에 명작으로 알려진 장편소설을 한 권씩 읽던 시절이 있었다. 못 보던 어휘나 잘 묘사된 대목을 적어 가면서 장편소설 한 권을 하루에 다 읽자면 잠자는 시간을 엄청 줄여야 한다. 그렇게 읽은 명작이 작가가 될‘밑거름’으로 된 것이다.
지금은 나이가들어시력때문에 종이로 된 책은 될수록 외면한다. 시력이 갑자기 떨어지기 전에는 호주머니에 항상 포켓 책을 넣어가지고 다녔다. 짬만 나면 몇 줄이라도 읽었다. 지금은 그런 독서의 즐거움이 많이 줄었다.
‘사람마다 한 권의 책’이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 이 말을 더 승화시켜“우리 모두 살아 숨쉬는,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삶을 적은 책, 그런 책은 우주의 책”이라고 했다.
책이 되려면 책이 될 만한‘글’들이 담겨져야 하는데 그런‘글’을 담으려면 다른 분들의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도리를 필자의‘령토’를 차지한 로신사와 필자에게‘주권’을 빼앗긴 로숙자가 보여주고 있다.
저 분들도 필경은 한 권의‘책’임이 분명한데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책’일까? 또 궁금해진다.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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