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시 야부리진 동흥촌을 찾아서
지난 8월말, 상지시소수민족사업촉진회 김장성비서장과 함께 배산림수로 흉년을 모르는 마을로 소문난 상지시 야부리진 동흥촌을 찾았다.
상지시내에서 출발해 70여킬로미터를 달려 야부리진에 도착, 야부리진에서 야부리-설향도로를 지나 약 5킬로미터를 더 가니 동흥촌이란 마을 간판이 나왔다. 산아래 자리잡은 동흥촌은 작지만 아담했고 도로량켠에는 꽃들이 피여있었으며 도로와 집마당들도 깨끗하게 잘 치워져 있었다.
동흥촌사무실에서 리성근(62) 당지부서기 겸 촌주임을 만났다. 작은 키에 수척했지만 눈에서는 정기가 돌았고 화끈하고 소탈한 특유의 기질이 풍겨왔다. 그에게서 동흥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동흥촌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생겨난 조선족마을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던 당시 동흥촌은 30여호, 북대촌은 60여호에 달했다. 현재의 동흥촌은 2002년 동흥촌과 북대촌이 합병하여 이루어졌는데 호적농가는 272호에 인구가 854명에 달하며 경작지 면적은 2603.43무에 달하고 그중 수전은 2405.85무이며 한전은 197.58무이다. 주요재배작물은 벼, 옥수수, 콩이다. 동흥촌도 여느 조선족마을처럼 도시진출과 해외로무로 현재 마을에 상주하는 인구는 적었다. 동흥툰에 18호에 인구가 41명이고 북대툰에 16호에 인구가 35명이며 북대분툰에 외래호수가 10호에 인구가 38명에 달해 총 44호에 인구가 114명에 달했다. 흑룡강성외 대도시에 진출한 촌민이 111명에 달하고 한국이나 일본 등 해외로무에 종사하는 촌민이 568명에 달했다.
동흥촌은 한때 상지시는 물론 흑룡강성적으로도 가장 잘사는 조선족마을에 속했다. 1960년대에 우량종 '로톨벼'를 심고 쌍고랑 점파를 하여 헥타르당 만근좌우의 수확을 거두었으며 돌까기, 약재부업을 하여 당시 대부분 조선족촌들이 한공에 1원좌우 분배를 하는 상황에서 동흥촌은 한공에 2원 30전씩 분배를 하여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임덕룡당지부서기는 흑룡강성빈하중농대표대회에 참석하고 도상식촌주임은 흑룡강성로동모범대회에 참가하는 영예를 누렸다. 1974년 촌에서 5천원을 투자하고 수리부문에서 지원을 받아 마을입구에 양수장을 세웠는데 30여년간 동흥촌의 풍작을 보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헥타르당 1만3천근이란 소출을 내여 상지시(당시 상지현)는 물론 송화강지구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장상인당지부서기는 상지시로동모범시상식에서 경험을 소개하고 트랙트를 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개혁개방시기에도 강일도, 신국철 등 농사능수, 김봉덕, 고혁남, 남영우, 강춘수, 김성일, 강일도, 리춘근, 신남철 등 치부능수들이 속출했다. 1988년 동흥촌로인협회가 설립되여 강룡문, 리하섭, 도상식, 장상인이 선후로 회장을 맡았으며 해마다 농사를 지어 수천원씩 수입하고 옥수수 우량종을 배육하여 4만원을 수입했으며 회원들을 이끌고 경박호, 장백산, 할빈 태양도, 북경, 상지야부리스키장 등지를 유람했으며 상지시조선족로인운동회에서 여러종목의 우승을 따내였다. 또한 75세이상 로인들의 축수연도 열어 당시 부근 조선족촌 로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2012년부터 동흥촌의 중책을 짊어지게 되였다는 리성근 당지부서기 겸 촌주임은 동흥툰과 북대툰의 마을도로건설, 력사적으로 내려온 토지분쟁해결, 촌민리익보장 등에 주력해왔다. 그는 력대 촌지도부와 촌민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동흥촌은 한때 할빈시문명촌의 영예를 따내고 잘사는 마을로 소문이 났었지만 현재는 촌민들의 고령화, 마을의 공동화가 가속되면서 마을유지와 발전에 큰 제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동흥촌의 28명의 당원중에 25명이 류동당원이고 3명도 60세이상인 점을 감안해 향후 심혈을 기울여 젊은 당원을 발전시켜 후비촌간부를 양성하고 야부리스키장 등 주변에 관광자원이 풍부한 리점을 살려 민속관광업을 발전시킬 타산으로 관계자들과 상담중이라고 밝혔다.
/진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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