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병사 이야기](4)
"그때 우리가 포격지원을 한 전투가 상감령 전역의 일부였네요"
항미원조 참전로병사 김응진을 만나보다
91세 고령의 김응진 로병사
“부대를 따라 귀국하고 몇년이 지나서 《상감령》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야 당시 우리 포병부대가 포격지원을 한 전투가 상감령 전역의 일부였다는 걸 알게 되였어요. 당시 지원군의 상황이 ‘좁쌀+보총’이라 한다면 저희 포병부대는 ‘좁쌀+보총’에 ‘노새+산포’로 항미원조 전쟁 승리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지요.”
최근, 기자 일행이 사전 약속대로 찾아간 연길시 모 양로봉사쎈터에서 ‘색 바랜’ 중국인민지원군 차림의 김응진(金应真) 로병사는 70여년전의 가렬처절했던 항미원조전쟁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젊은 시절의 패기 있고 름름한 김응진
1952년 10월 김응진이 소속된 포병퇀은 퇀장의 명령에 따라 김화지역 근처로 이동했고 모 고지를 향해 포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방 관측소의 좌표 보고와 퇀장의 명령에 따라 포병퇀은 련속 며칠 적군을 향해 포격했다. 김응진 로병사에 따르면 그들은 이번 전투에서 상급부문의 작전명령을 원만하게 완수했으며 관측소의 작전참모가 한명도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지 않은 실적으로 안전하게 철거했다고 한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다른 부대에 합류하여 계속 임무를 수행하던 김응진은 1955년 6월에 부대를 따라 귀국했다.
91세 고령의 김응진 로병사가 양로봉사쎈터 화단에 심은 꽃이 아름답게 피여있다.
양로봉사쎈터 대문앞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기자들을 반기는 김응진 로병사는 가슴에 여러개의 군공메달을, 목에는 기념휘장을 걸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91세 고령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채가 있었고 름름했으며 건강해 보였다.
화룡현(현재의 화룡시) 현성에서 5리쯤 상거한 원화동 신원촌 유명한 한의사네 집 5형제중 막내로 자란 김응진은 1950년에 화룡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승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항전간부인 학교 당지부 서기와 신민주주의청년단(현재의 공청단)위원회 서기가 졸업생들을 불러놓고 청년단원회의를 소집하고 항미원조 동원을 했다. 그때 김응진은 “당중앙의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입대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당시 화룡현 숭선소학교 등 중조변경이 미군의 폭격을 맞았고 중국인민지원군 제1진은 이미 전쟁터에 나간 뒤였다.
항미원조 시절의 중국인민지원군 포병부대/김응진 제공
김응진의 셋째 형은 일본침략군 강제징용에 끌려 다니면서 군사훈련에 참가한 미열로 상한에 걸린채 원한을 품고 어린 나이에 사망했었다. 화룡현과 룡정현에서 유명한 중의였던 그의 아버지는 셋째 아들을 구해내지 못한 슬픔에 빠져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청력을 전부 잃었다. 이를 지켜보아야만 했던 젊은 김응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입대 의지를 밝혔다. 당시 규정에 따라 이른 새벽에 마을사람들 몰래 마을을 빠져나온 그는 화룡현정부 회의실에서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영광스러운 중국인민지원군 전사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응진은 제복과의 인연이 한평생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51년 3월, 17세 6개월의 어린 나이에 군인생애를 시작한 김응진은 심양시 근교의 북대영에서 중국인민지원군 동북군구 모퇀 전사로 7개월 동안 군사 지식과 재능 및 군용술어를 주요내용으로 한 훈련을 받았다.
1951년 10월 5일 늦은 밤, 그는 료녕성 안동시(현재의 단동시)에서 출발하여 차디찬 압록강을 건넜다. 진씨 성의 포병 퇀장과 그의 수행인원으로 무전수, 경위원, 통신원, 취사원 등 10여명이 포병부대의 선발대로 적진을 탐지하러 떠난 것이다. 그의 신분은 중국인민지원군 모사 모퇀 련락원이였다.
밤길에 찦차 한대, 쏘련제 트럭 한대, 122미리메터 대포견인차 등을 운전하고 압록강을 건너서 이튿날 새벽에 도착한 곳이 순천이였다. 당시 순천은 곳곳이 폭격을 맞아 원래 헐망하던 초가집들이 거의 다 허물어지고 없어진 상태였다. 선발대는 좀 성한 초가집 근처에 은페하고 국내에 있는 지휘부에 무전을 쳐서 현지 상황을 알리고 나서 또 전진했다. 선발대는 강원도 양덕을 거쳐 동부전선 전방인 강원도 철원군까지 갔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후 조선 인민들과 함께 있는 김응진(뒤줄 왼쪽 첫번째 사람).
적군 폭격기가 밤낮없이 아군 진지나 이동하는 목표물을 향해 폭격해왔기에 선발대는 낮에는 산기슭에 은페해있다가 밤이 오면 힘겹게 전진했다. 밤에 적군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려오면 산꼭대기에 설치한 아군 방공초소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쏘는 기관총을 쏘았는데 적군 비행사에 발견되지 않으려고 전조등을 꺼야만 하는 선발대는 아군의 총알이 나가는 불빛을 빌어 길을 다그쳐야만 했다.
김응진이 소속된 선발대가 순천에 도착했을 때 미군의 대형폭격기 1대와 폭격기를 보위하는 전투기 10여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당시 순천에 수건중인 비행장과 철길, 철교가 목표물이였던 것이다. 그때 지원군의 분기식 비행기 몇대가 하늘에 날아오르더니 적군과 접전이 붙었다. 치렬한 접전을 벌이던 중 미군 비행기 한대가 추락, 이윽고 미군 비행사가 락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37식 돌격총을 손에 든 선발대 대원들은 그 방향을 따라 쏜쌀같이 달려가서 도망가려는 미군비행사를 포로했다.
선발대는 양덕에 위치한 포병사령부에 미군 포로를 인계하고 길을 재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원군 전사들의 투항을 권고하는 대만 장개석 군대의 고음나팔 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하지만 선발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심조심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김응진 로병사의 3등공 상장
당시 적군에 비해 지원군은 무기에서 후근 보장까지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하여 당시의 상황을 ‘좁쌀+보총’이라고 일컫는데 김응진은 자신이 소속된 포병부대의 상황은 ‘좁쌀+보총’에 ‘노새+산포’였다고 말한다. 구경이 200미리메터인 대포가 너무나 무거워 바퀴가 10개 달린 대포견인차가 끌어야만 했다. 하지만 복잡한 지형의 영향으로 항상 노새 여러 마리가 대포를 끌고 포병들이 함께 밀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적군과 근거리 백병전을 해야 하는 보병에 비해 포병은 전방 관측소에서 무선으로 포격 좌표를 보내오면 목표를 향해 포를 쏘았기 때문에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전우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부대 역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김응진 로병사는 말한다.
소속된 포병부대와 함께 상감령전투 등 전투에 여러차례 참가하여 영용무쌍하게 싸운 김응진은 1953년 7월에 중국인민지원군사령부 정치부로터 3등공을 받았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부터 군공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김응진을 포함한 포병부대의 련락병들은 다른 부대에 편입되여 조선 현지에서 군부대 의무일군들과 함께 조선 군민들의 병치료에 도와나섰다. 당시 학질이 많이 돌아서 군민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언어우세가 있는 김응진은 군의사들의 통역까지 맡아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많이 기반시설이 많이 파괴된 조선에서 군민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김응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부터 수여받은 군공메달 증서
1955년 6월에 고향에 돌아온 김응진은 변경지역인 연변의 공안부대에 배치되여 군복을 벗고 경찰복을 갈아입고 인민의 생명재산 안전 수호를 과업으로 삼았다. 그러던 1969년, 룡정현공안국 동불사진파출소 부소장으로 근무하던 김응진은 칼을 들고 살인행각을 벌이는 살인미수용의자를 성공적으로 나포하여 2등공을 기입받고 길림성 공안계통 군영(群英)표창대회에 참석하여 메달을 가슴에 달았다.
1978년에는 상급부문의 지시를 받들고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연변지대의 주비사업을 맡아서 임무를 원만히 완수했으며 후에는 무장경찰지대의 군관이 되어 여열을 불태우다가 1988년에 무장경찰부대 연변지대에서 준위의 계급으로 정년퇴직했다.
김응진의 말을 빈다면 그는 37년 동안 지원군복, 인민경찰복, 무장경찰복 등 한평생 제복을 입고 조국의 번영과 변강의 안정, 인민의 생명재산 안전을 위해 기여했다.
김응진 로병사는 현재 ‘연길 로병사의 집’ 무료강연단의 주요성원으로서 주내의 대중소학교, 주둔부대, 기관단위 등 다양한 군체의 후대들에게 홍색혁명전통 교양을 하러 다니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금 처한 국제정세를 보면 아직도 진정한 평화시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위대한 조국에 살고 있기에 전쟁에 대한 근심걱정이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평화로운 조국에 감사해 하고 행복감을 동력으로 위대한 조국에 충성하고 더욱 큰 기여를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응진 로병사는 후대들에게 이같이 당부한다.
/길림신문 유경봉, 오건, 리전 기자
编辑: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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