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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시기 든든한 조선족 ‘국문 지킴이’
조글로미디어(ZOGLO) 2024년12월8일 22시15분    조회: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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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병사의 이야기](6)

항미원조시기 든든한 조선족 ‘국문 지킴이’

―변방검사원으로 항미원조를 지원했던 방덕용옹을 만나보다

압록강변에서 맞은켠의 조선 땅을 바라보는 방덕용로인

“‘항미원조, 보가위국’에서 나는 ‘보가위국’만 7년 가까이 열심히 했지요. 외동아들이라 전선에 나가고싶어도 나가지 못하고 중조 변경의 집안국경검사소 검사원으로 일하면서 국문을 든든히 지켰더랬지요.”

최근, 91세의 방덕용(方德用)로인은 집안시 량수조선족향 해관촌의 압록강변에서 맞은켠의 조선 땅을 바라보며 기자 일행에게 말보따리를 풀어 70여년전의 혁명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학생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덕용로인/자료사진

1946년, 13살 소년 방덕용은 고향인 조선 자강도 위원군에서 부모님과 함께 두 녀동생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큰아버지가 사는 당시의 집안현 다박지(辑安县大薄地, 현재의 집안시·集安市 량수조선족향) 해관촌에 정착했다.

17살에 지원군 안내하여 전쟁터 드나들다

1950년 10월,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되자 거의 날마다 해관촌에서 1리 남짓 상거한 압록강 부교를 통해 집안현으로 건너오는 조선 난민과 보무당당하게 에 나가는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이 부지기수였다. 17살 열혈청년 방덕용도 영광스러운 지원군 전사가 되여 압록강을 건너 조선과 중조변경을 괴롭히는 적군과 싸워이기고 싶었지만 그가 항렬 1남 2녀중 외동아들인데다가 3년전에 아버지마저 여의고 가정의 유일한 남자식구인지라 어머니가 그의 입대를 결사반대해 나섰다. 하지만 소학교에서 6년 동안 교육을 받은 그가 중조 량국 언어에 능통한 우세가 있던터라 집안(编辑)변방공안분국 해관촌파출소의 호출을 받고 군복을 입게 되였다. 그때가 1950년 11월이였다.  

젊은 시절의 방덕용/자료사진

파출소에서 통역일을 시작하여 압록강변에서 대량의 소통 안무와 안치 사업을 맡아하던 그의 출중한 능력과 듬직한 성미는 집안현공안국에까지 전해졌고 그는 현공안국에 전근하여 3주간의 강습을 받았다. 방덕용은 강습을 거쳐 동북군구 변방공안 모 퇀 소속 집안현통상구 변경검사소로 정식발령을 받게 되였다.

방덕용의 근무 당시, 집안기차역앞에 위치한 집안통상구에는 해관, 검역, 은행, 변경검사소 등 4개 부문의 사업일군이 진주해 있었다. 당시 변방검사조에는 7남2녀, 도합 9명(조선족 5명, 한족 4명) 검사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매일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여 국경을 오가는 인원과 차량, 물품에 대해 세심한 검사를 하고서야 통과시켰다.

집안변방검사소 검사원 시절의 방덕용(뒤줄 오른쪽 첫번째)/자료사진

방덕용은 동료들과 함께 매일 다양한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과 차량을 상대하며 모든 증명서를 철저하게 검사하고 의심가는 사람이 잠입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만 했고 추운 겨울에도, 무더운 여름에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 또 하나의 세부사항이 모두 국가의 안전과 관계되는 것이였기에 모든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검사원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방덕용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국인민지원군의 림시통역관으로 되여 오매불망 그리던 지원군의 일원으로 지원군 부대를 안내하여 압록강을 건너 자강도 초산군을 지나 그가 태여난 위원군, 집안에서 270여리 떨어진 강겨시 등 조선전쟁 일선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적이 여러번 된다. 조선땅을 밟은 지원군 전사들은 낮에는 적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안전한 곳에 은페해있다가 밤이 되면 일체 전등을 끈채 조심스럽게 전쟁터를 향해 전진했는데 방덕용은 지원군 전사들과 함께 위험천만한 경우를 여러번 겪었다고 한다.

1953년 집안현무장부로부터 발급받은 방덕용의 검사원증/자료사진

한번은 지원군 부대를 안내하여 걸어서 초산군에 당도하여 부대가 사전에 은닉해놓았던 석유 20통을 다른 곳으로 이송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 나타난 적군 비행기가 다짜고짜 연소탄을 대거 투하하는 통에 사방이 불바다로 변했다. 방덕용은 입었던 바지가 불에 타는 바람에 하마트면 크게 화상을 입을번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원만히 완수한 방덕용은 조선인민군 군복을 입고 귀국해야만 했다.

방덕용은 근면한 사업태도와 출중한 능력이 상급의 인정을 받아 변경검사소 간사, 검사원을 거쳐 검사조 조장으로 발탁되였다.

김일성 차대에 도장 찍어준 변방검사소 검사원

어느날 아침, 방덕용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검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조선 방향으로부터 갑자기 찝차 수십대가 통상구에 들어섰다.

1957년에 동북군구로부터 수여받은 ‘2급 검사능수’영예증서/자료사진

찝차마다 군복차림의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을 한 조선 군인들이 탑승해있었다. 세여보니 22대의 찝차에 통일 장교복장의 조선인민군 군인이 3명씩 탑승해 있었는데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눈길이 예리했으며 규률이 엄격해 보였다. 방덕용은 동료들과 함께 조선군인들이 소지한 증명서를 자세히 검사하고나서 통과 도장을 찍어주었다. 찝차가 서서히 떠나기 바쁘게 압록강 건너편 만포시 상공에 적군 비행기 여러대가 나타나더니 무작정 폭격을 해댔다. 삼포시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중조 변경 해관촌에서 근 70년째 함께 살고 있는 1933년생 동갑 부부 방덕용과 김옥순 로인

방덕용은 “그때까지만 해도 찝차에 조선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타고 있을 줄을 생각하지도 못했고 찝차 대오가 가까스로 위험천만한 적군의 폭격을 피해 집안을 거쳐 모주석을 만나러 북경으로 가는 길이였다는 것도 후에 들어서야 알게 되였다.”면서 그때의 장면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방덕용의 일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그후 한번은 검사소 근처에 위치한 현기차역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당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차 한대가 훼손되였을뿐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후에 우리 나라의 방공시스템이 점차 강대해지면서 적 비행기는 더 이상 집안현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7년간 고작 3번 집 찾아, 뜻밖의 희열 찾아와

변경검사소에서 사업한 7년간 방덕용은 시종 일터를 열심히 지켰고 사심없이 헌신했다. 사업의 특수성 때문에 그는 가족과 만나는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7년 동안에 집을 다녀간 차수는 고작 3번뿐이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검사소에까지 전해져 방덕용은 급히 휴가를 내고 집으로 한걸음에 백리길을 달려갔다. 집문을 열고보니 다행히 어머니는 가벼운 감기에 걸렸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허탈감이 들었지만 방덕용은 안도의 숨을 쉬고 며칠후 어머니가 완쾌된 모습을 보고는 곧장 검사소로 돌아갔다. 헛소문으로 한번 ‘돌아가셨던’ 어머니는 80대 후반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보가 느리고 무뎠던 당시 그가 근무를 시작해서 처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간 이후로 방덕용은 자신의 결혼식과 녀동생의 결혼식 때까지 두번을 집에 더 다녀왔다.

집안시조선족소학교의 의무선전강연원이 되여/자료사진

그동안, 홀로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묵묵히 남편의 사업을 지지해나선 그의 동갑 안해 김옥순은 해마다 농망기가 지나야만 남편을 보러 군부대를 찾아갈 수 있었는데 이들 신혼부부의 상봉은 7월과 음력설 매년 두번뿐이였고 번마다 보름을 초과하지 않았다. 1954년 여름, 남편 면회하러 갔던 김옥순은 갑작스러 들이닥친 대홍수로 인해 한달 넘게 발이 묶였고 집에 돌아온후에야 첫아이 임신사실을 알게 되였다. 이 뜻밖의 작은 생명의 탄생은 방덕용에게 더 강한 책임감을 부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무하는 기간 방덕용은 종래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국가의 리익을 첫 자리에 놓았고 개인의 득실을 뒤로 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개인의 가정생활을 희생시킬지라도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내 역할이다. 전쟁터에서 조국과 인민의 안전을 위해 젊은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렬사들에 비하면 나는 한게 없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검사능수’, 70대 후반에 향인대대표

1953년에 입당한 방덕용은 1955년에 상사계급을 수여받았으며 1957년 3월에는 동북군구로부터 ‘2급 검사능수’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두달후 제대하여 귀향한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군대에서 쌓은 경험과 지도능력으로 그는 재빨리 생산대대 출납과 부주임 등 직무를 맡았다. 하지만 장기간의 군생활에서 얻은 맹장염, 페결핵, 신우신염 등 질환으로 시달리며 체중이 급격히 줄어든 그가 중체력 로동에 종사할 수 없다보니 1959년 조직으로부터 압록강 배사공(摆渡员)으로 임명되였다가 3년후 건강이 회복되자 생산대 대장, 회계 등 직을 맡고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까지 20여년간을 드높은 책임심과 사명감으로 촌의 건설과 발전에 적극 참여해 촌민들의 실제 곤난을 해결해주었으며 여러가지 민생공정의 실시를 추동했다.

2011년의 량수향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던 일을 소개하는 방덕용로인

방덕용은 촌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좋은 간부가 되였다. 그의 이야기는  사회에 봉사하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구축하도록 더 많은 사람들을 격려했다.

군영에서 생겨난 맏아들은 아버지를 본받아 일찍 1977년에 입대하여 4년동안 료녕성에서 열심히 군복무를 마쳤는가 하면 큰 딸은 의사 남편에게 시집가서 장사를 해왔고 현재 둘째 아들과 작은 딸은 집안시 모 중학교 교장직과 교원직에서 퇴직했으며 작은 아들은 시정부에서 근무중에 있다.

1993년 방덕용, 김옥순 량주의 환갑식 장면/자료사진

방덕용로인은 지금도 중조변경 압록강에서 1리쯤 상거한 해관촌에서 동갑내기 부인 김옥순과 근 70년째 살고 있다. 2011년, 78세 고령의 방덕용은 파격적으로 향인대 대표로 선거되기도 했다. 뿐더러 그는 집안시조선족소학교의 학생들에게 홍색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혁명정신을 고양하도록 후대들을 인도했다.  

량수향은 통화지역의 현급시인 집안시에서 유일한 소수민족향이다. 량수조선족향퇴역군인봉사소 김광오(金光伍) 부소장에 따르면 일찍 1950년에 입대하고 1953년에 입당한 방덕용로인은 현재 량수향의 154명 퇴역군인중 최고령 로병사일뿐더러 몇명 안되는 항미원조 참전로병사중의 한명이다.

10여년전부터 삼륜오토바이를 타고 부인을 싣고 다닌다는 91세 고령의 방덕용로인.

“방덕용로인이 70여년전에 피와 땀을 흘리며 청춘을 헌신하며 근무했던 집안현통상구는 현재 국내 3대 대조선 통상구이다. 7년 동안 국문을 굳건히 지켰던 방덕용로인은 우리 향 제대군인들의 훌륭한 대표일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일원이며 후대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이다.”라고 량수향의 김해웅(金海雄) 향장은 말한다.

자랑스러운 영예를 한가득 안고/자료사진

후배 변방검찰과 소학생들과 함께/자료사진

/길림신문 유경봉, 오건, 류향휘 기자


编辑: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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