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병사의 이야기](8)
전우들의 피로 물들여진 군복을 입고 정전협정까지 싸웠다
―항미원조 마지막 전역에 참가했던 김만석의 이야기
71년전의 금성전역을 이야기하고 있는 90세 고령의 김만석로인
1953년 7월, 항미원조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정전담판이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쌍방은 일부 핵심 문제에서 여전히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보다 유리한 담판지위를 쟁취하고 련합군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규모적인 진공전역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역이 바로 금성전역이다.
자욱한 포연과 총포의 울부짖음 속에서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 2주동안 지속된 금성전역은 항미원조전쟁의 최후의 대규모적인 전역이였을 뿐만 아니라 정전담판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관건적인 전역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김만석이 어머니와 함께
당시 이 최후의 치렬한 전투에는 19살의 젊은 전사 김만석도 54군 모사의 전우들과 함께 투입되였다.
그 때를 회상하는 그의 눈에는 절절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밤,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인해 번진 불빛으로 하늘이 환했고 총포소리에 귀가 먹먹했지요. 나는 전우들과 함께 산등성이의 거대한 바위돌 밑에 은페해 있었어요.”
갑자기 산을 넘어 날아 폭탄 여러 발이 김만석과 전우들 앞에 터졌다. 그 폭발로 앞에서 지휘하던 련 지도원이 머리에 직접적인 타격을 맞았고 여러 전우들도 쓰러졌다. 김만석과 다른 전우들의 옷과 얼굴도 사상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김만석이 수여받은 기념장들
“우리는 전우들의 피로 물들여진 군복을 입고 그들의 유지를 받들고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용감히 싸웠어요.”라며 김만석로인은 그때의 가렬처절했던 장면을 추억한다.
그때 젊은 김만석의 마음에는 승리에 대한 집념과 전우들의 희생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뿐이였다. 전장의 자욱한 포연과 끝없이 이어지는 총포의 울부짖음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우들과 어깨 겯고 꿋꿋이 싸워나갔고 결국 정전협정의 체결을 맞이했다.
나라와 인민 위해 전장에 나간 외동아들
1934년 조선 함경북도의 삼가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여난 김만석은 어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역전 근처(현재의 화룡시 역전거리)의 단결촌에 이사왔다.
김만석(뒤줄 왼쪽 세번째)의 소학교 졸업사진
추위가 매섭던 1951년 12월, 화룡중학교를 졸업한 17세의 김만석은 당과 국가의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항미원조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당시 집에는 어머니만 홀로 남았지만 외동아들 김만석은 국가와 인민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입대했다. 그때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인 주덕해동지가 직접 동원했기에 젊은이들은 참전의 중요성과 절박성을 더욱 명확히 할 수 있었다.
국경 1주년 맞이 화룡중학교 배구,축구경기 우승 기념촬영 (1950년 10월 1일)
단동에 도착한 김만석은 상황이 긴박하다보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을 틈도 없이 전장에 투입되였다. 김만석은 처음에 모 군 무공대(武工队) 에 배속되여 조선에 나갔다가 병력보충이 필요한 소속 부대를 따라 잠시 귀국해 정비와 훈련을 받았다. 그후 모 군 정통련(政统连)에 배치되여 다시 전장에 파견되였고 1953년에는 54군 모사에 배치되여 그의 마지막전투인 금성전역에 참가하게 되였다. 금성전역에 파견된 그는 주로 부대 간부들의 통역일을 맡아했다. 그가 속해 있던 54군은 전쟁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온 16군을 교대해 출전했다. 전쟁터에서는 이처럼 빈번한 부대교체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복잡한 전쟁 환경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전략적인 결책이였다. 이런 방식은 전선의 지속적인 전투력을 보장했고 전쟁의 최종 승리에 토대를 닦아놓았다.
김만석의 제대군인증명서
김만석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고향 화룡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늘 외동아들이 그리워했고 아들의 안위을 걱정했다. 기차를 며칠씩 타야 당도하는 1,400리나 되는 먼 길이지만 그는 두번이나 단동까지 아들을 보러 갔다. 1953년, 아들 소식이 간절했던 어머니가 단동으로 달려갔지만 그때 김만석이 금성전역 전쟁터에 있다 보니 만나지 못했단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부대를 따라 귀국한 김만석은 1955년 2월까지 학습에 참가했다. 그때 어머니가 두번째로 단동을 찾아왔고 오매불망 상봉이 이루어졌다.
김만석은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와의 만남은 3년여만의 그리움과 미안함을 달래주었고 앞으로 어머니께 더 효도해야겠다는 다짐을 더 굳히게 했단다.
사업에 정진하는 젊은 시절의 김만석
1955년에 퇴역하고 귀향길에 오른 김만석은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바쳐 바꿔온 평화의 소중함을 더 간절히 느끼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의 장을 열었다.
제1자동차공장의 ‘황소’
고향인 화룡에 돌아온 21살 청년 김만석은 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1년뒤, 항미원조 참전 경력이 있는 그는 촌에서 유일하게 당시 설립된지 3년도 안되는 제1자동차공장에 추천받게 되였다.
제1자동차공장에서 근무하던 나날에 동료들과 함께
김만석의 회억에 따르면 1956년 화룡의 4명을 포함해 연변에서 총 22명이 제1자동차공장에 추천받았다고 한다.
그가 처음 공장에 배치 받았을 때 제1자동차공장은 초창기다보니 조건이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새 일터에 적응해나갔다. 그는 제1자동차공장 주조공장 실험실에 배치되여 주로 분광분석, 화학분석 등 분석실험을 했다.
“당시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어요.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참 재미있게 보냈어요.”라고 처음 공장에 들어와서 조선족들과 함께 보내던 시절을 회억했다.
실험실은 자동차의 품질안전을 보장하는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철강원자재를 분석해야 하고 검사를 통해 합격 된 원자재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자동차의 부품이 만들어지고 자동차가 만들어진다.
가장 책임감이 수요되는 중요한 일터에서 김만석은 능숙한 기술과 사업에 대한 고도로 되는 책임감으로 동료들과 함께 제1자동차공장 실험실의 품질 관문을 지켰다.
김만석은 제1자동차공장에 배치받은 첫해에 새중국의 첫 트럭 해방패의 출시를 지켜보았고 1958년에는 새중국 첫 소형자동차 동풍패, 이듬해에는 새충국 창건 10돐을 맞으며 새중국 첫 고급승용차 홍기패의 출시의 기쁨을 함께했다.
홍기자동차 품질돌격대가 집체공을 기입받고
김만석의 부인 리옥금(86세)은 수십년을 제1자동차공장의 후근부 식당, 유치원 등 부문에서 근무한 동료이다. 인터뷰 내내 옆에 앉아있던 리옥금은 “저분은 재직시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수십년을 일했어요. 몸이 아파도 나가고, 집안에 일이 있어도 나가고 정말 모범답게 일했습니다. 하여 공장에서 23년 련속 로력모범으로 뽑히면서 ‘황소’라는 별명까지 붙여졌지요. 그리고 제1자동차공장의 일터 기준병으로 당선되여 사진이 공장 영예판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함께 자동차공장에서 근무하던 시절을 자랑스럽게 회억했다.
김만석, 리옥금 량주
1993년, 37년간 근무한 실험실을 떠나 퇴직한 후 김만석은 제1자동차공장조선족로인협회에 가입하여 30여년째 협회의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만년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길림신문 유경봉, 오건, 정현관 기자
编辑:유경봉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