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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일 회장, “함께 성장하는 재일본 조선족 공동체 구축해야”
조글로미디어(ZOGLO) 2024년12월23일 10시08분    조회: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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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1】 

오늘부터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서성일 회장, 유한회사 ‘시루바포트’의 사장(CEO)의 특별 인터뷰를 세 번에 나누어 싣는다. 첫 번째 인터뷰는 그의 창업 성공 스토리이다.

“시련을 이겨내야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어”

<2025 세계 조선족 설맞이 문예공연>과 <2024 세계 조선족 글짓기대회 시상식> 등이 내년 1월 17일부터 19일 사이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다. 주최 측의 가장 관심사로 여겼던 메인 스폰서도 일찌감치 계약 체결됐다. 그간의 행사는 모두 ‘시루바포트(Silverport Co., Ltd)컵’으로 명명된다. 메인 스폰서로 나선 인물은 유한회사 ‘시루바포트’의 서성일 사장(CEO)이며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이하, 연합회) 회장직을 겸하고 있다. 명실공히 재일본 조선족 사회 단체의 수장이자 리더이다. 기자의 취재 요청에 그는 사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기자에게 '시루바포트’ 창업이야기를 하는 서성일 사장 

“솔직히 저 앞에 나서기 싫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메인 스폰서로 나선 것은 사회적으로, 특히 조선족 사회에 주는 선(善)의 영향력이 아주 크기에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고, 또 재일본 조선족들이 우리 민족 전통문화 지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습니다. 앞서 리용식 선배님도 조선족 사회 여러 가지 행사에 메인 스폰서로 나서거나 자주 헌금을 해오신 것도 저에 대한 영향이 컸습니다. 큰 도움은 아니더라도 우리 조선 민족 공동체구축에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었으면 기쁘겠습니다.” 사업가답게 실제적이고 착한 표현법을 구사하였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일본에는 조선족이 약 7만명 정도 살고 있다. 1980년대부터 이주의 붐이 불기 시작해 지금은 상당한 규모의 조선족 경제인들과 지역사회 단체장들이 여러 조직을 만들고 연합을 해서 조선족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일본 조선족 사회가 튼튼히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우선 수없는 조선족 경제인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2005년 4월 환경 테스트 장비, 건조 오븐, 건조 컨베이어, 금속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제조업체 시루바포트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발전시켜 온 서성일(1962년생) 사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 회장은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라는 속담을 신조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비 온 뒤에 땅이 굳지요.” 그가 말했다. “전 경험을 통해 이 속담의 진의를 믿게 됐어요, 우리 회사의 경영 신조로 내세울 만큼. 경영하다 보면 시련이 오고, 그런 시련을 이겨내야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으며 몸도 맘도 더 단단히 굳어지게 되지요.”

현재 임직원 수 30여 명의 시루바포트 유한회사는 정밀판금, 열처리기계 및 산업장비제조를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 성장의 이면에는 “리먼 쇼크와 19호 태풍 등 큰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극복하는 힘을 얻은 것”이 원동력이다. 기자는 그런 “힘”을 길러온 서 회장의 성장 스토리가 궁금했다.

“저의 고향은 연변 용정시 지신촌(智新村)입니다. 자라면서 저는 특히 도문철도 기문단의 공정사 삼촌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고향에 대한 따뜻한 회포를 갖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집을 떠나 삼촌네 집에 가서 생활하며 당시 성 중점고중이었던 도문제1고에서 공부하였다. 삼촌은 그의 심지를 굳게 해준 롤모델이다. 그의 인도하에 서성일은 길림공학원(현 장춘공업대학) 기계 전업에 입학하였다. 4년 동안 주로 기계 설계와 제조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열심히 배웠다. 이는 그가 이후 기계업과 운명적으로 연(緣)을 맺게 된 계기가 됐다.

‘시루바포트’ 회사에서 설계 제조한 산업기계(베아링그 열처리 기계.)

“기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손재간이 있고 호기심이 많으며 말보다 행동을 먼저 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기자가 묻자 그가 웃었다. “비슷해요. 더 중요한 것은, 기계공학은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란 것이죠. 새 기계를 만들거나 고장 난 기계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추구하게 되지요. 또 기존의 기술에 근거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기존 기술을 향상하려는 도전적인 사고와 드팀없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전 연변통용기계공장에 기술자로 배치받아 선반 만드는 일에 전념했는데, 그런 실천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왔지요.”

그러나 3년 후에 그는 단연 철밥통을 버리고 친구와 함께 급수설비를 만드는 사업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을 하였지만 생활은 계속 돈이 딸렸다. 친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하자고 해도 돈이 모자라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는 기계업보다 설계붐이 일어나 설계를 배우는 친구들이 잘 나갔다.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보자! 돈 벌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이는 그의 갈망이었다. 그러나 급수설비 사업도 여의찮았다. 그는 결국 연길로 돌아와 석유화학기계공장에 재취직했다. 당지에서는 꽤 좋은 회사였다.

1994년은 그의 인생 전환의 중요한 한 해였다. 공장에서 차간 기술주임으로 있던 그는 연수생 제도가 처음 나오자 우여곡절 끝에 일본 연수를 떠났다. “1994년이면 중국의 개혁개방이 한창때였는데 일본은 벌써 선진국에 들어섰으니 일본의 기술에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그가 감탄했다.

일본 연수를 다녀온 후 그는 1998년 말까지 길림성기계수출입공사 연길왕당무역회사에 취직해서 기계와 기계 부속품에 관한 무역업을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가서 연수하던 회사와 연락을 끊지 않았다. 돈을 벌어 잘살아보겠다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1998년 말에 그는 일본 공무 비자를 발급받아 일본에 갔던 차에 그 회사를 다시 찾아 취직하게 됐다. 그 후 1년 자동차정비공장에서 일하다가 도심으로 나가고 싶어 도쿄와 가까이 있는 사이타마 캔의 기계 관련 회사로 이직했다. 5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일을 열심히 하여도 변하지 않는 적은 수입(당시 일본인과 외국인 사이에 월급 차이가 있었다.)과 일에 대해 나름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사들과 마찰을 자주 빚곤 했다. 이제 회사를 그만둘까, 이직할까, 아니면 창업할까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창업하자니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제일 컸지요. 아무리 고민해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겠더군요. 더구나 주위 친구들이 창업을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대학 나와서 쭉 회사에서 로임만 받고 살았으니까요… 그러던 중 설날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올해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한다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스스로 용기를 주었던 것 같아요. 뱉어버린 말은 지켜야 하니까 창업하기로 마음먹고 작은 집을 빌려 힘겹게 창업을 시작했지요. 그해가 2005년, 제가 서른여덟 나던 때였지요. 전 자신을 믿었어요. 남들은 일본에 와서 박사를 한다 어쩐다 학문 쌓기에 여념 없었지만, 저의 최대 장점은 기계 전업을 배우고 그동안 거의 기계 분야에 취직해서 쭉 경험을 쌓아왔으니까요. 물론 단점이라면 빈주먹으로 시작한다는 거였지요.” 그가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제조한 자동차 개페기 자동검측장치.

“처음엔 기계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중고 용접기 하나 사서 빈주먹으로 시작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중국에서 배운 기초적인 제조 기술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런 것들이 창업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가족의 든든한 믿음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는 창업에서 용기와 자신감, 판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거래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원래 일하던 일본회사 거래처들에서 알고 도와주었지요. 일도 조금씩 주고 사람도 소개해 주고요. 일을 받으면 너무 기뻤지요.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도 없이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점점 일도 늘어나고 직원도 늘어나고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또 판금 업계잡지로부터 취재받고 기사로 나간 적도 있는데 그걸 보고 문의를 받기도 하고 주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회사 이름을 시루바포트(银港)로 달았다. 원래는 무역 일을 하고 싶어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데 무역 일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기에 기계 쪽으로 쭉 일을 해왔다. 시루바포트는 업종 용도를 불문하고 고품질 제품 제조를 목표로 하였다. 주문을 받으면 설계, 용접, 조립, 열 테스트까지 하여 신속하게 납품했다. 시간도 단축하고 가격도 줄여주었다. 전문성이 뛰어난 기술인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시루바포트는 동 업계에서도 어엿한 열처리 기계 메이커로 우뚝 성장하였고 자동차, 반도체, 철강 등 여러 가지 큰 업계에 납품하며, 또 외국에 있는 일본업체에 납품하기도 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위기가 찾아왔다. “창업하여 처음 4년 정도는 순조롭게 성장했지요. 직원도 늘어나고 공장도 작다고 생각하여 집세를 세 배 정도 더 내며 좀 큰 곳으로 이사를 하였지요. 그렇게 평탄하게 성장해 오던 중 2008년 리만 쇼크(경제위기)가 터졌습니다.”

일을 받던 거래처가 망하여 회사는 사라지게 되었고 약 천오백만 엔(당시 인민폐 약 100만원)이라는 거액을 받지 못하게 됐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회사로서는 아주 큰 돈이었다. 일도 줄어들고 고객이 빠져 정말 힘들었다. 그만두는 직원들이 많아 이제는 회사를 접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장만하기 위해 갖고 있던 기계들을 팔려고 마음먹었다.

서성일 회장은 창업이 힘들었을 때 도와준 이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앞줄 왼쪽, 두 번째 연변대학학우회 호림 명예회장, 세 번째 전일본조선족연합회 허영수 초대 회장, 네번째 서성일 회장 등 순이다. 

“그런데 중고 기계 판매상들을 불러 견적을 받아보니 살 때는 엄청 비싸게 주고 샀던 기계들이 팔려니 완전 폐찰값이었지요. 너무나 큰 충격에 눈앞이 새까매 났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든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비싼 집세를 낼 수가 없어 이사를 고민하던 중 부동산중개사로부터 지금의 회사가 있는 장소를 소개받았지요. 당시 원래 있던 회사가 망해 나가고 쓰레기만 가득하던 건물이었습니다. 돈이 없다 보니 일단은 아무 곳에나 기계를 들여놓아야 한다고 생각해 집주인과 상의하여 쓰레기를 치워주는 대신 반년 집세를 면제해달라는 조건으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당시 전기도 가스도 없었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발전기를 돌려 기계를 하나씩 가동시켰고,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또 옛 거래처들에서 하나둘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힘든 시기도 지나왔습니다.” 그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그때 포기했더라면 저는 그냥 빚더미에 앉게 되었겠지요. 절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시기도 지나가고 회사는 승승장구하였다. 모든 게 너무 순조롭고 평탄하게 진행되던 시기였기에 어느 순간부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내에게도 너무 평온하여 예감이 안 좋다, 뭔가 발생하려고 이러나 싶다고 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2019년 관동지구를 휩쓸어 간 태풍이 회사에 물 폭탄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기계가 들어있는 곳에 2미터 넘게 물에 잠겼고, 1억엔 가까운 기계도 당연히 모두 버리게 되었다. 그나마 정부의 보조금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의 드팀없는 지지, 그리고 본인이 갖고 있는 기술, 직원들의 든든한 실력과 거래처가 모두 남아있었기에 경제위기 때처럼 두려움은 없었다.

“태풍 피해를 전승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연합회 허영수 초대 회장님, 마홍철 회장님, 연변대학우회 호림 명예회장님 등 많은 분들이 피해 현장에 찾아오셔서 고무 격려해 주시고 경제적 후원도 해주시는 등 가족과도 같은 따뜻한 사랑을 나눠주었기 때문이지요. 이는 이후 조선족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저를 힘 있게 밀어준 근본 원인의 하나이지요.” 서 회장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기계도 새로 장만하자 금방 복구가 되었다. 재해 전보다 더 많은 선진적인 생산설비들이 도입되었고, 여러 가지 새로운 사용 호들이 개척되고, 생산량도 태풍 피해 전보다 근 배로 급격히 늘어났다.

“사업을 하다 보면 모든 위기는 항상 더 발전할 기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들이쉰 후 창업자들에게 몇 마디 당부했다. “창업을 하고 싶다면, 첫 번째는 무조건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재능, 생각 등 매우 다르지만 뭔가를 하고 싶다 생각이 들면 일단은 무조건 시작해야 합니다. 속담에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두 번째는 ‘견지하라’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순조롭지만은 않고 여러 가지 풍파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견지하다 보면 반드시 좋아지고 또 많이 성장합니다. 또 한가지, 항상 새로운 위기에 도전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몇 가지가 중요하지요.”

그는 일본 사람들의 장인정신에 감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긍지감이 아주 높은 것 같습니다.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이 아닌 일반회사의 간단한 기술 일이라도 맡은 일에서 정교함과 치밀함을 추구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조선족들이 배울 점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에 만족합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는 우리 직원들이 너무나 잘해주고 있어 자랑스럽다.”며, “쭉 같이 일해온 분야별 기술자들이 너무나 맡은 바 소임을 잘해주고 있기에 이제는 어떻게 하면 회사를 잘 물려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또 “지금은 땅이 단단히 굳어져 아무리 비가 와도 겁나지 않는다.”며, “내가 회사에서 물러났을 때 남은 친구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고 퇴장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흔연히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진정한 사업가다운 흉금이 한결 돋보였다.

<다음에 계속>

/동북아신문 이동렬 기자

[본 문장은 길림신문 해외판 발표이기에 한국어표기법을 그대로 두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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