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나의 책상서랍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소중히 간직했던 ‘빈하중농협회회원증’이 있었다. 한차례 전투에서 목숨을 내걸고 원쑤들과 싸운 ‘공훈상’도 아니고 성과를 올려 받아안은 ‘모범상’도 아닌 색바래진 ‘회원증’에는 지난 세기 60년대 20세의 새파란 나이에 구수한 흙냄새가 풍기는 땅에 인생의 뿌리를 박고 인생의 닻을 올리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변강 오지 흑룡강 동녕현 삼차구에서 태여난 나는 1965년 7월에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입시 신체검사에서 합격되지 못해 귀향하게 되였다. 그때 농촌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이고 온 마을에 고중 졸업생이 나 혼자 뿐이였다. 공작대원들과 사원들이 내가 마을 활동에 참가했으면 하는 기대를 내비쳤으나 대학입시에서 락방된 나는 고민에 쌓여있었다. 온종일 집에 박혀 소설책만 들여다보았다.
어느 날 점심 때 어머니가 시원한 오이 랭국을 나에게 주시면서 “셋째야, 머리도 쉬울 겸 래일 논기움을 매러 가거라. 이렇게 집에다 몸을 가두면 병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여섯살 때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들 삼형제중 막내인 나는 언제 한번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이튿날 나는 옷을 갈아입고 논으로 나갔다. 그때 생산대에서는 무슨 일이나 정액제를 실시하여 누가 김을 더 매면 공수를 더 많이 주기에 30여명에 달하는 사원들은 일을 많이 하겠노라고 서로 앞다투며 땀벌창이 되여 김을 맸다. 뒤에는 전문 질 검사를 하는 박동혁 대장이 있었다. 그때 박동혁 대장은 나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농사일이 처음이니 급해 말고 천천히 김을 매오.”라고 했다. 나는 사원들의 뒤에서 김을 매기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가래’나 개돌피는 손쉽게 뽑아버릴 수 있었으나 참돌피는 좀처럼 가려낼 수 없었다. 제일 앞장에 선 사원은 논뚝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내 옆에서 김을 매던 녀성들도 나를 20여메터나 떨구어놓고 일손을 다그쳤다. 급해난 나는 ‘에라, 모르겠다. 되가는 대로 김 매보자’고 생각을 굴리며 눈에 띄는 ‘가래’와 개돌피만 뽑고 마구 흙탕물을 튕기면서 남의 뒤를 따랐다. 30여명 사원들의 해놓은 기움을 검사하던 박대장은 내가 한 일을 찬찬히 살피더니 대뜸 얼굴이 흐려졌다. 박대장은 나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무슨일이나 거짓으로 하면 안되오. 여기를 보오, 이것은 개돌피고 저것은 참돌피요. 개돌피만 뽑고 참돌피를 뽑아버리지 않으면 가을에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없소.”라고 말하면서 김매는 요령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점심, 사원들은 밭머리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기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 장단을 펼쳤다. 내 옆에는 60여세의 신윤칠로인이 앉아있었다. 신로인은 다른 사원이 내놓은 상추쌈을 자시고 자기가 싸온 삼겹살을 나의 밥그릇에 놓아주시면서 “배고프겠는데 이 고기에다 밥을 먹소.”라고 말씀하셨다.
모두 내것, 네것 따지지 않고 모여앉아 맛있게 점심밥을 먹었다. 팔소매에 흙이 게발리고 누런 이에 고추가루가 끼인 신로인의 얼굴을 곁눈질해보니 그이가 건네준 삼겹살을 좀처럼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먹자니 게름직하고 안 먹자니 남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같아 입에 넣은 돼지고기를 씹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뱉아버렸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박대장은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도 밥을 먹어야 살고 쌀은 농민들의 피땀으로 가꾼 것이요. 농촌에 뿌리박고 우리 한번 고향을 잘 건설해보기요.” 일찍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고 머리에 파편이 아직도 남아있는 로당원 박대장의 말은 나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도 달라지는 법이다. 나는 농촌을 떠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낫 갈고 소 후걸이를 씌우고 ‘양창질’ 하는 등 농사일을 하나하나씩 익혀갔고 어지럽고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했다. 사원들의 손에 장알이 얼마 박혔으면 나의 손에도 그만큼 장알이 늘어났다. 그해 8월말이였다. 벼 사막받이가 방금 끝날 무렵 마을에 60년래 보기 드문 특대 홍수가 터졌다. 연변 경내에서 흘러오는 골물이 갑자기 마을에 덮쳐들어 밤중에 온 마을 사람들이 서산으로 대피해야 했다. 박대장이 손전지를 들고 집집마다 돌며 젊은이들더러 나이들고 병이 있는 분들을 부축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병마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돌볼 겨를도 없이 20여명에 달하는 로인들과 환자들을 이끌고 무릎을 치는 물살을 헤가르며 이들을 안전한 지대로 대피시켰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 후부터 나와 사원들 사이에 막힌 ‘장벽’도 소리없이 무너졌다. 소대 시사학습, 기공원, 박대장의 발언 자료 쓰기 등 여러가지 임무가 나에게 맡겨졌고 나는 충실하게 완성했다. 후에는 공작대의 추천으로 대대단지부 서기로도 있었다.
언제였던가 공사에서 문예경연대회를 열었는데 다른 대대공연대에서는 시대에 맞는 노래와 춤을 공연하였지만 나는 문예 골간들을 조직하여 ‘혁명렬사를 추모하는 시랑송’을 내놓기로 했다. 렬사들을 추모하는 시랑송이기에 복장과 도구를 준비해야 했다. 우리는 파출소에 가서 수갑을 빌려오고 사육실에 가서 쇠사슬을 가져다 발에다 감고 닭을 잡아서 그 피를 흰적삼에 발랐다. 노래 〈국제가〉의 웅장한 반주에 맞추어 한수 또 한수의 렬사 추모 시가 랑송되자 관중들 속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 우리 종목은 ‘특별상’을 받았다.
1965년 12월말, 박동혁 대장은 나에게 ‘빈하중농협회회원증’을 넘겨주면서 “오늘부터 동무는 농사기술도 배웠고 농민들 속에 뿌리를 박았기에 이 증서를 발급하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그때 사원들은 ‘빈하중농협회회원증’이란 말이 길어서 그냥 ‘농민증’이라고 불렀다.
농민증, 보기에는 가벼운 종이장에 불과했지만 여기에는 나라의 어엿한 주인이 된 농민들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스며있었다. 그 이듬해 1월, 나는 영광스럽게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입당 소개인은 바로 박동혁 대장과 김규범이였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어느덧 고희 문턱에 들어섰다. 몸에서 먹물 냄새 풍기는 풋내기 고중졸업생이 짧디짦은 반년 사이에 대대간부로 발탁되고 그 후 중학교 교원, 공사간부로 한걸음씩 승진한 것은 나의 노력도 있겠지만 콩 한쪽도 서로 나누어 먹는 순박하고 진실에 묻혀 사는 농민들이 나의 등을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인생의 밑거름이 되여준 ‘농민증’에 대한 기억을 인생의 막바지까지 가슴깊이 아로새기며 살리라.
/리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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