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60여년 세월이 그의 얼굴에 주름살을 그려놓고 귀밑머리에 흰 서리를 선물했지만 그는 항상 “선수의 패기로 내 마음 껏 살아온 지난 인생에 하나의 후회도 없다!”고 말한다.
1959년도에 연길시 신흥가에서 태여난 지철해는 어릴 적부터 동네방네에서 빼어난 륙상선수였다. 신흥소학교를 거쳐 연길시3중에 올라오기까지 그는 학교의 운동장을 주름잡는 만능선수였다. 100메터달리기부터 시작하여 3,000, 5,000메터 장거리는 물론 축구, 씨름, 스케이트와 아이스하키까지 그의 그림자는 항상 각종 체육무대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연변주체육학교에서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을 모집할 때 그의 이름인 지철해도 번듯이 올라 있었고 그는 연변1조 혹은 길림성2팀의 유니폼을 입고 각종 급별의 경기에 참가하였는데 그의 령활한 몸놀림과 뛰여난 속도 그리고 정확한 패스는 수많은 아이스하키애호가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졌다.
“1980년에 북경에 가서 경기를 치르고 돌아 왔는데 상급의 지시로 우리 아이스하키팀을 없애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아이스하키 운동생애를 마치게 되였지요.” 조용한 스타일인 지철해씨는 아무런 일도 아닌 것 처럼 그때를 회억한다. 당시 연변주체육운동학교의 륙상, 스케이트, 국제씨름 등 부서에서 그를 요청하였고 또 연길시 중소학교들에 체육교원으로 배치하여주는 정책도 있었으나 그는 키가 작고 소학교 때부터 체육만 하다보니 공부를 못해 교원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리유로 다 사절하고 연길시통용기계공장 축구팀에 가담하여 축구인생을 즐긴다.
“그냥 체육을 좋아하니 정식편제도 주지 않는 그런 공장에서 일하는 선택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4년이 지난 후 이웃 나라 아이스하키팀이 연변에 와서 초청경기를 하는데 그 경기에 참가하라는 연변주체육운동학교의 부름으로 부랴부랴 집중훈련을 하고 국제우호아이스하키경기에 참가한 적도 있고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팀을 해산하다보니 또다시 직업을 찾아야 하는 고생도 겪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연변주종자공사 산하의 연길대리석공장 공장장으로 일하게 되였는데 공장이라야 수십명 직원을 둔 소형기업이였다. “개혁개방이 갓 시작될 때라 건축회사들에서 수요하는 대리석 건축자재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기업이였지요.” 직원들이라야 정식편제가 없는 림시로동자들이 대부분이였다. 지철해 선수의 정신이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얼마 안되는 리윤의 몇프로를 총공사에 바치고 나머지로 종업원들을 먹여 살리는 전도가 거의 없는 그 기업에서였다.
“불시로 비석을 가공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지요. 건축재료로 파는 데 비하면 비석으로 파는 리윤이 곱절 많거든요.” 1980년대 말부터 개인묘지에 비석을 세울 수 있게 정책이 허락되면서 부터였다. 그렇게 1989년까지 그는 종업원들을 이끌고 약 4년간 년간 500개 이상의 비석을 가공해 팔면서 연변의 비석가공분야에서 남들의 앞장에 서서 달렸다. 그러다가 공장장임기가 끝나자 그는 총공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영업을 하기로 작심한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습관이 몸에 배이다보니 그게 편한 선택이였지요.” 각종 비석수요량이 많아지고 거래처가 연길로부터 주내로 확장되면서 십여년간 눈코뜰새 없었다는 그의 말이다. 도문시만 해도 봉오동 반일전적지로부터 두만강연안의 각종 비석은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비석가공에서 손을 뗀지도 거의 20년이 되여오지만 지금도 가끔 비석주문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지철해씨는 40대의 젊음을 불태웠던 그 시절을 그려본다. “2000년도로부터 인젠 편하게 살아보자고 등산과 낚시를 시작했는데 그만 낚시에 빠져버렸지요. 그것도 겨울낚시는 정말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덩어리이죠.”
처음에 원주필낚시대(원주필대를 리용하여 만든 낚시대)로 시작한 겨울낚시였는데 하다보니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되고 또 쓰기가 불편한 낚시대를 개량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란다. “원주필낚시란게 원래 큰 고기를 낚아올릴 수 없고 쩍 하면 부러지는 등 페단이 있었거든요.” 이번에도 선수의 빛이 반짝거렸다.
손이 편하게 손잡이를 만들고 밤낚시에 편하게 부표에 전자불을 안장하였더니 주변 사람들이 낚시대를 어데서 샀는가고 묻더란다. 자기절로 만들었다고 대답하니 믿기지 않는 듯 이러이러하게 가공할 수 있는가고 설계도를 제시하면서 문의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란다. 처음엔 재미로 만들어 주었는데 수요자가 점차 많아지면서 낚시슈퍼에 납품할 정도가 되였다고 한다. 거기에 쓰기 편한 낚시대에 고급 원자재를 사용하고 보기좋은 도안을 조각해 넣으니 말그대로 고급 낚시대로 되였다.
아이스하키 선수라 하면 우람진 체격에 거친 목소리를 떠올리겠지만 자상하고 온화한 성격에 이야기도 조용조용 하는 지철해씨가 그 단단한 나무에 한홈한홈 조각칼 질을 하는 모습은 마치 조각예술가가 오래동안 구상해온 자기의 작품에 자기의 정신을 새겨 넣는 형상을 련상시킨다.
연변주체육운동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지철해씨는 모아산과 원예농장에서 체력훈련을 하여왔단다. 어느해인지 치치할시에 가서 경기하다가 한살 년하인 방어수 두조재가 대방의 하키채에 맞아 코등이 터졌던 일과 평균년령이 가장 어린 연변아이스하키 선수들이 성숙된 경기를 한다고 높이 평가하던 어느 유명감독의 평가를 곧잘 떠올리기도 했다.
“그시절 꿈이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선수였는데 그것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본의 아니게 비석을 다듬고 낚시대를 깎는 장인이 되여버렸지요. 그래도 무엇을 하면 남보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선수시절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게 없지요. 허허허…”
페부에서 우러나오는 듯 나지막하지만 무게감이 있는 그의 웃음소리에서는 체육장을 누비던 선수시절에 대한 추억과 너무나 멀리 비껴간 꿈에 대한 아쉬움이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길림신문 김태국, 김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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