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1991년 12월 9일.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존 메이어 영국 총리 등 13명의 유럽 지도자들이 베아트릭스 여왕 주최로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마스트리흐트의 네이르카너 고성에 모여 오찬을 함께 했다. 오늘날 ‘유럽 이사회 오찬’이라고 불리는 이 모임에서 지도자들은 지하 포도주 저장고 벽에 숯으로 서명하고 “유럽이 하나로 뭉치기 위해 하나의 통화를 쓴다”는 원칙을 세웠다. 다음해 2월 7일 마스트리흐트 림뷔르흐 주정부 청사에서 공식 서명이 이뤄졌고, 각국의 비준을 거쳐 1993년 11월 1일 ‘유럽연합(EU)조약’이 발효됐다. EU라는 용어가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20년 전의 일이다.
28일(현지시간) 잔뜩 흐린 네덜란드 마스 강변의 마스트리흐트는 고요했다. 네이르카너 고성의 역사적 장소는 레스토랑으로 변한 지 오래다. 이곳이 유럽 통합의 장소라는 증거는 조약 체결 10주년이었던 2002년 시내 폐공장터에 이탈리아 건축가 마우라 비아바가 설치한 ‘유럽의 별들’ 조형물뿐이다. 길고 짧은 35개(유럽 국가 수)의 은색 별들은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들 속에서 쓸쓸해 보였다. 몇 년째 지속되고 있는 재정위기 속에 실업률과 불법이민 등 고질적 문제들이 불거지고, 국가 간 격차가 벌어지면서 유럽인들 마음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마스트리흐트대학에 재학 중인 프리드리히 아펠만(31)은 “최근 EU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있고, 각종 국제행사가 많이 열리는 도시여서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EU 출범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도시로 브뤼셀(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트라스부르(프랑스)가 꼽힌다. 이 세 도시는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의회, 사무국 건물 등이 있어 ‘유럽의 심장’으로 불린다. 브뤼셀과 룩셈부르크는 EU 건물들이 늘어나면서 서유럽 도시답지 않게 재건축과 신축이 한창이다. 지난 5~6년간 유럽의 재정위기를 겪으면서도 이 두 도시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브뤼셀 거주민 100만명 중 20만명이 EU본부 직원과 가족, 해외기업 및 국가 관계자일 정도로 국제화됐기 때문이다. ‘공무’라는 명분으로 씀씀이가 헤퍼진 이들에게 불황은 남의 일일 뿐이다. 브뤼셀을 오가는 기차 요금은 유럽 내 다른 지역의 같은 거리에 비해 두 배가 넘고, 호텔비와 사무실 임대료 역시 살인적이다.
브뤼셀 도심에 살던 저소득층 상당수가 북쪽과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슬럼가가 형성됐고, 생활물가도 10년 사이 두 배 이상 올랐다. 하지만 브뤼셀의 EU본부 유치가 안트베르펜, 브뤼헤 등 북쪽 지역에 비해 낙후됐던 벨기에 중남부 지역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벨기에 국민들은 긍정적이다. 룩셈부르크는 EU 관련 건물이 30여개에 이르지만, 거주민 숫자는 거의 늘지 않았다. EU 관련 기관에 근무하는 외국인 상당수가 높은 세금과 물가 때문에 인근 독일, 프랑스 지역에 거주하며 출퇴근하고 있다.
유럽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의 경우에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의회의 특성상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벌여 온 오랜 전쟁의 중심 지역이었던 이 지역에 유럽 통합을 의미하는 유럽의회가 자리 잡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가 이를 덮고 있다. 각종 법안과 지속적인 권한 확대로 영향력을 키워 온 EU 집행위는 유럽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회원국을 외면하는 ‘브뤼셀 리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각종 정책을 추진하면서 EU 위원회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이 회원국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EU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부터 7년간 EU의 차기예산은 205억 유로(약 30조원). 기금을 늘리려는 집행위와 조금이라도 돈을 덜 내려는 회원국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집행위는 기금을 활용한 각종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3개국, 3개 기관 이상’의 컨소시엄 구성을 의무화하는 등 국가 특성을 배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회원국들은 조금이라도 자국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이다. EU 집행위가 외교와 문화, 교육에까지 손을 대려고 시도하면서 갈등의 전선이 확대되고 있다. 28개의 회원국, 5억여명의 시민과 함께 성년을 맞은 EU. ‘하나의 유럽’이라는 당초의 목표에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글 사진 브뤼셀·룩셈부르크·마스트리흐트
박건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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