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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정부 구성하거나 재선거
1949년 이후 초유의 사태 벌어져
대연정 거부 슐츠 사민당 대표
30일 메르켈과 회동이 분수령
사민당 내달 전대서 ‘불참’ 땐
브렉시트 협상, 유로존 개혁 등
굵직한 현안 모두 멈춰설 위기
독일 새 정부 구성 난항…'EU 견인차' 정국 공백 장기화 우려
독일 연정 협상이 결렬된 지 이틀 후인 지난 21일 하원 본회의에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AP=연합뉴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마르틴 슐츠 사민당 대표가 오는 30일 만나기로 했다.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간의 좌우 대연정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 회동은 이른바 ‘자메이카연정’ 협상이 지난 19일 결렬된 이후 전후 최대 혼란에 빠진 독일 정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최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자메이카연정은 지난 9월 24일 총선 이후 연정 구성을 협상해 온 중도 우파 기민기사연합과 친기업 성향의 자민당, 친환경 정당인 녹색당의 상징 색깔인 흑·황·적으로 이뤄진 자메이카 국기 색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자민당이 지난 19일 돌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결렬을 선언함으로써 독일은 1949년 이후 처음으로 소수정부를 구성하거나 재선거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총선 이전부터 새로운 대연정 구성에 반대한다고 명확히 밝혔던 슐츠 대표가 메르켈 총리를 만나기로 한 것은 사민당 출신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중재 노력의 성과다. 후베르투스 하일 사민당 사무총장은 24일 “사민당은 대통령이 초대하는 어떤 대화에도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슐츠 대표도 “사민당은 독일과 유럽에 대한 책임을 알고 있다”며 “국가의 위기는 아니지만 독일은 복잡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민당의 대연정 협상 참여 문제는 다음달 7일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자메이카연정 협상 결렬 이후 사민당은 연정 참여 압박을 받아 왔다. 사민당은 일단 협상을 배제하지 않기로 했지만 당내 사정은 여전히 복잡하다. 대연정 불가 입장인 강경파와 메르켈 소수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얽혀 교통정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타협 능력 뛰어난 메르켈 없으면 타격
사민당과의 대연정 협상마저 결렬된다면 새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독일의 정치적 공백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특히 지난 12년간 독일 총리로서 유럽연합(EU)을 앞장서 이끌어 온 메르켈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할 수 있다. 이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할베 자힐스트라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자메이카연정 협상 결렬 직후 “유럽에 나쁜 뉴스”라며 “독일은 EU 내 영향력이 큰 나라다. 그들이 정부나 권한을 갖지 못하면 유럽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그동안 유로존 재정 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압적 합병에 대한 강경 제재,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협상 등 굵직굵직한 이슈와 관련해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지나치게 독일 입장만 강요한다는 비판도 들었지만 타협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다른 유럽 정치지도자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런 메르켈 총리의 부재는 곧바로 유럽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새 총선은 메르켈 총리에겐 일대 정치적 도박이 될 수 있다. 판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승산이 그리 크지 않아서다. 기민기사연합은 지난 9월 선거에서 32.9% 득표에 그쳤다. 1949년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최악의 결과였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12.6%의 득표율로 일약 제3당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극우 독일대안당(AfD)이 새 총선에서 세를 더 불릴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실제로 그럴 경우 메르켈 총리는 불명예 정계 은퇴의 길로 내몰릴 수 있다.
독일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새 선거가 치러질 경우 적어도 내년 여름까지는 새 정부가 들어서기 어렵다. 그사이 약체 과도정부가 아무런 중요한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할 가능성이 크다. 시급한 난제가 산적한 유럽으로서는 독일의 정치 공백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다음달 14~15일엔 EU 정상회담이 열린다. 영국은 여기서 브렉시트 협상의 돌파구가 열리길 기대하고 있다. 영국이 EU를 공식 탈퇴하기 전까지 내놓아야 할 재정기여액 규모와 아일랜드와의 국경 문제가 선결 과제다.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는 브렉시트 이후에도 EU 국가인 아일랜드와 현재 수준의 관계로 남기를 원하고 있다. 반면 영국은 북아일랜드도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마크롱 EU 개혁도 동력 얻기 어려워
이런 민감한 문제에 대한 EU 측 결단은 결국 독일·프랑스와 같은 핵심 국가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엔 독일과 메르켈 총리의 입지가 너무 약해 주요 의사 결정이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영국으로서도 매우 심각한 사정에 빠질 수 있다. 브렉시트 협상에 속도가 나지 않아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영국에 있는 각국 금융회사들이 독일이나 프랑스 등 EU 회원국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정 협상 만료 시한인 2019년 3월 29일을 지나면 ‘무합의’로 EU와 ‘이혼’할 수 있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혹시라도 독일에 재선거가 실시된다면 브렉시트 협상의 미래는 장기간 표류할 수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EU 개혁도 독일의 전폭적 지지 없이는 추진 동력을 얻기 어렵다. 마크롱은 지난 9월 26일 “2020년대 초부터 유럽은 공동의 신속대응군, 공동의 방위예산, 공동의 행동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크롱은 또 이민 절차를 신속하게 하고 국가마다 다른 체계를 조화롭게 맞추는 EU 차원의 유럽난민청과 유럽국경경찰 창설을 제안했다. 또 유로존 공동 예산과 이를 책임질 유로존 재무장관 신설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마크롱은 독일과 메르켈 총리의 지원사격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안정된 독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 역시 빛을 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폴란드와 헝가리 등 유럽에서 득세하고 있는 민족주의와 극우파 문제도 공동의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정치는 타협과 협치를 통한 안정의 전통을 세워 왔다. 연정 협상을 거부하고 있는 자민당이나 사민당이 국익보다는 지나치게 당리당략과 당의 이익만 앞세울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EU를 이끌어야 하는 독일의 정치 세력들이 막판에 극적으로 연정 구성에 합의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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