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우=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태어나서 총을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는 스무살 사샤 그리고리바는 이젠 우크라이나군에서 신병에게 사격을 가르친다.
입소 직후 2주간 훈련을 받을 때 총을 분해, 조립하는 속도가 다른 동기들보다 월등히 빠르고, 목표물 모두 명중시키는 '특등 사수'인 그를 눈여겨보고 군에서 사격 조교로 발탁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이후 틱톡과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총쏘는 장면을 수백 번 '시뮬레이션'한 효과가 있다고 했다.
지난 석 달간 수많은 신병에게 총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사샤는 러시아와 교전이 치열한 동부 지역에 가려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동생같은 10대 청소년까지 최전선에서 싸우고 싶다며 동부 돈바스(루한스크주와 도네츠크주)로 향할 때는 '과연 이 친구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어 가슴 한쪽이 저립니다"
우크라이나군에는 18세 이상이면 자원입대를 할 수 있다.
얼굴에 아직 소녀티가 남아있는 사샤는 댄스 강사, 셰프, 타투이스트 등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그 꿈은 전쟁 뒤로 미뤘다.
그의 인생 설계도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군복을 입은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간단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곳곳에서 죽어 나가는데 키이우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한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변과 주변에 상의도 하지 않고 입대 지원서를 냈어요.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 군대에 가서 총을 잡는다는 소식에 그의 어머니는 만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샤의 뜻을 꺾지 못했다.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하겠다는 사람이 몰려 입영 부대를 잡는 게 쉽지 않았지만, 수소문 끝에 갈 곳을 찾았다.
사샤가 군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훈련이나 불편한 숙식 환경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전쟁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라고 했다.
사샤는 이 전쟁 때문에 친구 2명을 떠나보냈다.
소중했던 사람과 영원히 작별하는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인데 장례식장에서 가족을 보면 여러 감정이 솟구쳐올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쟁 전 삶을 묻자 표정이 한결 밝아져 영락없는 '스무 살짜리'로 잠시 돌아왔다.
2017년부터 K-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사샤는 입대 전 식당에서 요리하며 돈을 버는 틈틈이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강사 일도 겸했었다.
군부대에서 생활하면서도 쉬는 시간에는 K-팝을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마음속에 묵직하게 쌓여있는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내려고 한다.
벌써 넉 달 가까이 이어지는 이 전쟁에 끝은 있을까. 군부대가 아닌 곳에서 군복을 벗고 너무 좋아하는 춤을 미사일이 날아올 수 있다는 걱정 없이 마음껏 추는 날이 올까.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떻게 전쟁이 끝나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확실했다.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승리해야 비로소 멈출 거예요. 러시아는 그렇게 넓은 땅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왜 우리 땅을 빼앗으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끝까지 이기겠다는 믿음 하나로 싸우고 있습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