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가장 흔히 '폭발버튼'을 누르곤 하는 감정이다.
이것은 인간이 좋아하지 않는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이 분노해도 싫어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기도, 분노를 다루기도 싫어하며, 자기 아이가 분노하면 더더욱 싫어한다. 우리는 대부분 분노는 장려하기는커녕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가르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분노는 허용되지 않거나 부정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가 일어나면 핑계를 만들어 내거나,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거나, 억누르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분노 –우리의 분노든 아이의 분노든- 에 생산적으로 대처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믿음도 분노는 나쁜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해 왔던 대로 밖으로 폭발시키거나 안으로 곪게 두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부모님이 일방적으로 지시를 할 뿐 내 입장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아서 늘 내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면, 내 아이가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내 말을 따르지 않을 때 아마 나는 매우 가혹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다 힘겨루기에 들어가면, 사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나와 아이의 싸움이 된다. 둘 중 아무도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화가 나면 우리는 아이가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싶어진다. 처벌(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이를 곤란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창피를 주는 모든 일)은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행동에 대한 앙갚음이다. 우리는 아이를 방에 가두고 때리고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 주던 혜택을 빼앗는다. 이 모두가 우리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아이의 분노를 질책하기 위한 수단이다.
처벌은 아이에게 행동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가르치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아이에게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주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따금 아이의 행동이 바뀌면서 부모가 바라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아이에게 처벌의 6R, 즉 원망(resentment), 반항(rebellion), 보복(retaliation), 자존감 저하(reduced self-esteem), 억압(repression), 복수(revenge)를 가르칠 뿐이다.
1. 넌 정말 버르장머리가 없어. 지금 이 난장판을 좀 보렴.
내가 몇 번을 얘기해야 하니? 나는 네 쓰레기 치워 주는 사람이 아니야.
부엌 싹 치우기 전까지는 집 밖에 못 나갈 줄 알아.
2. 부엌에 이렇게 음식이 널려 있는 걸 보니 나는 너무 화가 나.
이 난장판을 내가 치울 순 없어. 네가 지금 바로 치워 줬으면 좋겠어.
다 치우고 나면 바로 친구네 놀러가도 좋아.
분노에 차서 말을 한다 해도, 그 분노를 제대로 인정하고 있다면 아이도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1번 시나리오에서 아빠는 “내가 몇 번을 얘기해야 하니?”라고 하면서 사실 분노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딸을 비난하고 있다.
2번의 반응은 분노가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솔직하고 책임감 있다. 딸은 분명 아빠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부엌을 어지럽힌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있지만(좋은 죄책감), 아빠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나쁜 죄책감). 그만큼 아이가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청을 받아들이기도 쉬워진다.
‘너 때문에 너무 화가 나’는 우리가 자신의 분노를 얼마나 철저히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지를 잘 보여 주는 표현이다. 우리는 저 말을 무수히 들었고,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하고 있다. 이제는 이 악순환을 멈추고 “…할 때 나는 너무 화가 나”라고 정확히 밝혀야 한다. 그러면 말의 의미도, 그에 따른 책임 소재도 극적으로 바뀐다.
우리의 분노는 우리가 만든 감정이다. 화를 내는 것 자체는 괜찮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면 아이들도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면 우리는 좀 더 거리를 두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 위치에 서면 우리도 아이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문제와 감정을 억지로 뜯어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고 격려할 수 있다. 건강한 경계선이 생기면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아이에게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억눌린 분노 -우울증, 질병, 불안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를 대면하는 일은 두렵고 불편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물리적으로 불안을 겪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떨리며, 눈물을 흘리거나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분노를 무조건 덮어 버린다. 게다가 사람들도 다들 분노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마치 남을 위해 봉사라도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분노는 비아냥, 비판, 원망, 죄책감, 심지어 만성적 지각 같은 수동공격적인 행동 등의 형태로 어떻게든 스며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폭발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한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를 주체할 수가 없더라고요.” 아이에게 악을 쓰고 난 뒤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들은 이렇게 한탄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지금 꼭 필요한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당신이 직접 그 변화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저 분노에게 맡겨라! 그러면 막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올까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다. 한 번에 조금씩 드러내자. 단, 반드시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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