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마감하며 도로 량켠을 파랗게 차지한 나무들, 상쾌한 기분으로 그 사이를 지나며 팔련성으로 향하는 내내 기분은 마치도 도시의 오염물들을 툭툭 털어낸듯 한결 가볍기만 했다.
팔련성 취재에 앞서 잠간 들린 훈춘시 삼가자만족향 사타자촌, 사토자로도 불리우기도 하는 이 마을은 훈춘시 세 개 국경다리 가운데의 하나인 사타자국경다리가 위치해있는 고장으로 통상마을로도 통한다.
력사기재에 따르면 사타자에 우리 민족이 자리 잡기는 1866년 12월, 당시 조선 경원군 농안면 농포동에서 온 최안영이라는 사람이 사타자에 자리잡은 첫 조선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타자촌 채길춘촌장을 통해 료해한데 따르면 현재 사타자촌의 인구는 1300명정도에 이르는데 그중 조선족이 절반, 한족 및 기타 민족이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사타자촌 촌민들은 전통적으로 수전과 한전 농사를 해왔으며 현재 수전과 한전 비률은 각기 절반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 발해국시기로부터 훈춘이 일본 등을 비롯해 통상무역을 활발하게 벌려왔다면 사타자통상구가 자리잡고있는 사타자촌 역시 예로부터 대조선무역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기재에 따르면 1929년부터 시작된 훈춘과 조선간의 무역은 서보강(지금의 고성촌)에 통상국이 세워지면서 더욱 활발해졌으며 이에 따라 1909년에는 훈춘에 훈춘총관(해관)이 세워지고 1911년부터 1930년까지 사이 여러개 검사소가 세워지는데 사타자가 그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사실조선의 새별세관과 마주하고있는 사타자통상구는 전통적인 민간무역통상구로 개혁개방전에는 주로 중조 두 나라 변경주민들의 친척방문통로로 리용되여왔다. 자료에 따르면 사타자에 검사소가 세워지기는 1929년, 해방후 지방 2급 통상구로 되었다가 1985년에 사타자해관으로 되면서 화물통관을 시작했으며 2007년 국가2급통상구로 승격되면서 지금은 일당 10만톤의 화물, 연 10명 인원이 통관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같은 력사자료를 보면서 갑자기 아마도 력사적 및 지리적 여건 및 역할로 인해 오늘의 사타자통상구가 존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타자통상구가 마을에 위치하고 있지만 촌민들은 그 혜택보다 열심히 수한전을 다루며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조선족들은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출국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현재 마을에서 외국으로 나간 사람이 50명정도, 젊음이 줄어든 마을이라서인지 록음이 짙게 드리운 마을은 자못 평온해보였고 촌사무실에서 조용히 앉아 마작을 즐기는 년세가 든 촌민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느라니 역시 마을의 분위기마냥 평온해보이면서도 어쩐지 약간의 서글픔도 살짝 묻어났다.
전윤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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